[box type=”note”]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자 이슬람 카리모프. 헌법을 개정해 종신 집권이라는 영생을 꿈꿨던 독재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6년 9월 2일 뇌출혈로 사망한 카리모프. 그의 죽음 뒤에도 우즈베키스탄 민중의 삶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국가, 우즈베키스탄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과 정치, 사회와 경제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이 연재는 총 10회 이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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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존 리드의 표현대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거친 뒤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당국은 이런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지속성은 강력합니다.
러시아 혁명에도 살아남은 천 년의 뿌리
천 년 전 러시아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기독교를 공인하고 개종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기독교를 러시아화(조금 더 엄밀하게는 동슬라브화)했습니다. 페룬, 모코쉬, 루살카와 같은 동슬라브의 전통신앙들이, 정교회의 성자 숭배에 그대로 녹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00년 전 표트르 대제가 아예 새 출발을 하자며 늪지대 위에서 지은, 유럽보다도 더 유럽적인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골목골목에는 전통 러시아의 민담과 도시 전설이 스며들었습니다.
러시아 혁명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련에서 선전하는 혁명의 1등 공신, 아브로라 순양함이 발사한 대포가 실질적으로 혁명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처럼, 천 년이 넘게 지속된 뿌리 깊은 러시아의 정치구조,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 그리고 문화는 끈질기게 러시아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하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소련을 비판해온 사람들이 말하는 바가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와 매우 유사했다는 점입니다. 소련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분석은 전체주의론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이는 소련이 당 지도부에 의해 움직이는 개인의 의견은 묵살당하는 사회였다는 이론이었습니다. 기존 전통 사회의 모든 가치는 억압받았으며 레닌, 스탈린과 그의 파벌이 나라를 철저히 전체주의적으로 개조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 공산당의 통일된 총 노선 하에 모든 인민이 단결함으로써, 구 러시아의 봉건적 잔재가 모조리 사멸했다는 모스크바의 선전과 사실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긍정적으로 평가하느냐 부정적으로 평가하느냐의 차이지요. 하지만 여러 수정주의 학자들은 이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냉전이 끝나고 열린 소련의 방대한 문서고는 수정주의 학자들의 기존 견해를 상당히 지지해줍니다.
‘수권정당’ 볼셰비키의 숙제 – 구세력 수용, 신세대 참여
러시아 10월 혁명을 이끌어낸 볼셰비키는 분명 조직적 역량이 탁월했으며 이전의 차르 정부는 물론이고 차르 정부 이후에 들어선 임시정부까지 포함해서 놓고 봐도 러시아 전체에서 가장 열렬한 근대적 비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하정당으로 활동할 때까지의 이야기고, 전 지구 육지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수억 명이 넘게 사는 대국을 통치할 집권정당에는 전혀 맞지 않는 평가였습니다. 아무리 혁명 영웅들이 그 헌신성과 철두철미함, 결정적으로 밑도 끝도 없는 잔학성과 무자비함, 그리고 증오로 위명과 악명이 높았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행정 전체를 책임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기존 차르 및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던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기용할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초기 소련 정부가 과거의 유산을 떨쳐버리지 못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볼셰비키의 입맛에도 맞는, 당성이 훌륭하고 행정적 역량도 우수한 기술관료 집단의 결핍이었습니다. 특히 기술적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의 엄청난 수가 외국으로 망명까지 해버렸으니 공산당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도 정부는 운영해야지요. 볼셰비키 입장에서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정도 야심만 있으면 당에 들어와서 각지의 요직에 발탁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신용할 수 없으며 과거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구 엘리트들이 정부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출세욕과 야심 때문에 당에 들어온, 어중이떠중이일지 아니면 잠재력이 뛰어난 미래의 국가 지도자일지 구분하기 힘든 신세대들이 정부에 대거 참여했습니다.
통제할 수 없었던 ‘엘리트 집단’, 조직의 이익에 목숨 걸다
나라가 초기에 워낙 엉망진창이었기에, 이들 엘리트 집단을 감시할 수 있는 수단은 사실상 없었습니다. 법의 지배를 정착시켜 신뢰라는 공공재를 통해 관료와 정치인들을 통제하는, 현대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국가는 이 시대 소련과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습니다. 물론 볼셰비키는 이전의 차르 정부와는 달리 구체제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소비에트(평의회)가 설치되고 당원이 파견되어 행정적 장악력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대규모 국민교육을 실시하고 행정과 국가운영을 재편했으며, 기존에는 상상도 못 하던 전기, 철도 시설 등을 확대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소련이 정책적 목표들을 실현해나간 것과 이것이 실제 현장에서 운영되던 방식은 전혀 별개였습니다. 애초에 제대로 교육받은 근대적 시민은커녕 문맹이 다수를 차지하던 사회에서 아래에서 이들 중간 엘리트 집단을 감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구(舊)체제의 부활을 염려하여, 그리고 자신들 정권의 정당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를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완전한 전환기의 엘리트층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었는지는 오직 소련 공산당의 제도적 역량에 달려 있었지요. 그리고 이런 역량은 기본적으로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나라는 엄청나게 넓은데 아직 제대로 된 교통과 통신수단도 갖춰져 있지 않았고, 중앙조직들은 각 지역의 기본적인 데이터와 통계를 취합하고 검증할 능력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각 조직의 진정한 실권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조직에서 한 자리 꿰찬 유력자들이었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다고 생각된 소련 공산당의 중앙위원회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런 실권자들의 협조 없이는 소련은 운영될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엘리트 집단은 국가적 대의보다는 자신들의 협소한 조직적 이익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종래의 엘리트 간 라이벌 의식 등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또 조직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흔히 소련을 중앙집권적 국가라고 생각하고 미국을 분권형 국가라고 생각합니다만, 순전히 국가 관료제를 통한 권력의 집중과 그 행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소련은 미국보다 권력누수가 훨씬 심한 국가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사례는 그 자체로 주장을 증명해줄 수 없다고 폴 콜리어도 언급했지만, 그래도 재밌는 사례들을 몇 가지 소개해볼까 합니다.
‘우랄’ 개발 위한 사기 보고서
산업계에서는 역시 ‘거대한 우랄 계획’이 백미입니다.
제임스 해리스(James Harris)의 [거대한 우랄] (“Great Urals”)이 이 건을 다루고 있지요. 지금의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우랄 지역과 근래에 문제가 많이 된 하리코프, 도네츠크를 중심으로 한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당시 러시아에서는 흔히 “남부”라고 불렸음)은 제정 러시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수의 철강 공업 지역이었습니다.
우랄은 표트르 대제 시절에 풍부한 목재를 기반으로 제철소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선발주자의 덫으로 돌아왔습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석탄과 코크스로 용광로를 돌리기 시작하자 우랄은 낙후지역의 표본으로 전락했습니다. 대신 돈바스 탄전을 끼고 있는 동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비테 백작과 스톨리핀의 시대에 서유럽 자본의 투자를 받아 엄청난 성장을 이뤘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엄청난 철강 공업 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 되자, 우랄은 이때 투자를 받지 못하면 영원히 우크라이나에 뒤처질 것이라고 기를 쓰고 공산당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콤비나트 체제의 기본은 막대한 천연자원 매장량인데, 우랄에는 석탄이 없어 안보적 이점이 아닌 이상 투자를 할 매력이 그다지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그러나 당시 소련에서는 누구나 건드리고 있던) 영역에 손을 댔습니다. 기존 우랄 지방정부에서 운영하는 지질조사국의 인력을 모두 교체하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지역 관료들은 우랄에 석탄 탄광이 존재한다고 사기를 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작된 보고서를 중앙에 제출하여 사업 계획까지 승인받았습니다. 지역 엘리트 간의 경쟁심이 나라의 근간이 될 산업정책까지 왜곡시켜 버린 것입니다.
당원의 부정 부패 – ’29년 당원의 37% ‘과음’ 사유로 제거
당연히 전반적인 인적자원의 질도 정말 답이 없었습니다. 대숙청 이전부터 공산당에서 당원들의 부패 등을 감사하는 중앙통제위원회는 질적으로 떨어지는 당원들을 정기적으로 솎아냈습니다. 무시무시한 건 1929년에 이들을 솎아낼 때 무려 37%가 과음이 그 사유였습니다. 거기에 죽은 당원의 가족들이 당원에게만 주어지는 배급특전을 계속 받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거기에 설령 출당되었어도 당원증 회수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서 계속 그 지역의 공산당에서 일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심지어 아직 발급되지 않은 백지 당원증을 지역의 당사무소에서 훔쳐, 국경 넘어 폴란드로 밀수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원이라는 것은 사실상 일반 국민과는 다른 신분이기에 배급 특전과 여러 사회적인 우대조치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를 노리고 밀수한 겁니다. 외부 소행이겠어요? 당연히 내부 소행이겠죠.
군부대에서는 하지도 않은 훈련을 했다고 보고하고, 외국 대사들과 대표단까지 와서 참관하는 대규모 행사에 미리 시나리오대로 진행한 짜고 친 훈련을 보여주었고, 모든 기관 모든 조직에서 장부를 조작하여 예산을 더 타내거나 온갖 물자를 횡령하고 빼돌려 밀수하는 일도 일상다반사였습니다. 그간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과 유사하죠. 사회 조직 방식이나 거버넌스의 발전이 대규모 부가 새로이 창출되고 투자되는 경제적 변동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5개년 계획과 대숙청
그러나 시행착오와 과거의 폐습에도 불구하고 소련 사회는 차츰 발전하고 있었고, 이런 식의 기강 와해 상태를 지도부로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과 독일에서 반공주의를 대놓고 표방하는 호전적 세력이 집권하여 소련을 위협하는 등, 대외관계가 급박하게 흘러갔기에 이는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제1차 5개년 계획(1928년~1932년)의 자본투자로 공장과 인프라 등에서 물적 기반을 확보하였는데 2차 5개년 계획은 이를 관리할 숙련된 인력의 활용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제 단순히 농민들 재산을 뜯어서 만든 돈으로 공장 때려짓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소련은 만들어놓은 공장을 실제로 굴려야 했고, 조직과 관리, 경영의 영역이 중요해졌습니다. 잘 잡힌 제도적 기반과 신뢰할 수 있는 인적자원의 필요성이 부상한 것이죠.
더하여, 이제 발전한 인프라와 조직력에 힘입어 중앙정부의 능력이 상당히 신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gosplan)가 뭐 하나 계획을 만들고 싶어도 지역 실권자들의 협조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고스플란은 나름의 자료와 방법론에 기초하여 독자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스탈린은 이미 제1차 5개년 계획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대신에 세입과 재정권의 상당수를 중앙으로 가져오고, 사법권도 전적으로 중앙에 이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혁명 이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이제 꾸준히 공급되고 있었지요.
‘대숙청’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직 하나 잡고 왕처럼 굴던 이들, 지역당의 유력자들은 모조리 제거되었고 그 폭풍은 문화계와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져 최소 60만 명이 약식재판을 거치고 처형당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강제노동수용소, 굴라그(gulag)로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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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현대 우즈베키스탄 정치의 기원과는 관련해 초점을 맞추고자 한 것은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옛 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 그리고 그것이 근대적 행정국가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여기에 민족 문제와 종교 문제가 겹쳐 그 세부적 맥락은 러시아에서 있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긴 합니다마는 우즈베키스탄도 이런 혼란상을 그대로 겪었습니다. 다음 편에는 우즈베키스탄이 혁명에서 숙청까지 어떤 길을 걷게 되었는지, 즉 우즈베키스탄 엘리트 집단의 기원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