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자 이슬람 카리모프. 헌법을 개정해 종신 집권이라는 영생을 꿈꿨던 독재자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2016년 9월 2일 뇌출혈로 사망한 카리모프. 그의 죽음 뒤에도 우즈베키스탄 민중의 삶은 계속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국가, 우즈베키스탄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과 정치, 사회와 경제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이 연재는 총 10회 이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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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러시아 혁명 정권이 자리를 잡기 전 중앙아시아 엘리트의 선택지는 셋 중 하나였습니다. 1) 친러시아 공산주의자 2) 부하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자디드 운동가 3) 민족주의적 성향의 바스마치 운동가. 하지만 바스마치 운동은 10년에 걸쳐 최종적으로 ‘진압’되었고, 중앙아시아에는 소련 공산당이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남습니다. (3편 참조.)
민족, 그것이 문제로다
친러시아 공산주의자 그룹과 모스코바에 협조적이긴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독자성을 강조한 자디드 운동가 그룹은 모스크바의 지도 아래 중앙아시아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다는 점은 같았지만, 바라보는 지향점이 너무 달랐습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민족 자치와 근대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정의하는 그 ‘민족’이라는 게 이 지역에서는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면 대충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일단 중앙아시아는 대체로 타지크인을 제외하면 서로 사투리라고 해도 무방한 투르크계 언어들을 쓰기에 언어를 통해 가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언어 집단끼리 명확한 경계도 없었고, 뒤섞여 살고 그랬지요.
이들은 자신을 규정할 때 ‘한국인 김 씨’처럼 ‘우즈벡인 무함마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대신 이렇게 말하고, 자신을 인식했습니다.
‘OO도시 XX씨족의 @@유력자 가문에 속한 ##의 몇 번째 아들’
상황이 이럴진대 무슨 민족을 해방시킵니까. 옛날에 경제 살리기라는 슬로건을 비꼬면서 ‘경제를 먼저 죽여야 살리지’라는 식의 유머가 돌아다닌 적이 있었죠.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민족을 해방시키기 전에 먼저 그 민족이라는 걸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뭘 민족이라고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모두 소련의 근대화 프로젝트와 연관 맺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느슨한 통치에서 상대적으로 더 명확한 소련의 관료행정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어찌 되었건 필요했습니다. 이 전환 과정에서 새로운 행정구역들이 설치될 것이었고, 기존에 없던 행정구역을 어떤 식으로 정립하는지는 이들 지역이 어떤 사회적 비전을 갖고 있느냐에 좌우되는 것이었습니다.
투르케스탄 단일 공화국의 꿈이 깨지다
근대적인 소련식 관료행정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놓고 중앙아시아에서 최초의 정치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민족주의적 엘리트 그룹은 우선 모스크바 정부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투르크 기반 정체성에 더욱 많은 배려를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실 이 지역의 유력자나 지주,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봉건사회의 잔재이자 압제자이니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선 계급해방보다 민족해방이 먼저라고 주장했고, 무슬림과 투르크 정체성에 기반하여 중앙아시아를 하나의 통합된 행정구역으로서 운영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즉,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투르케스탄 자치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르케스탄 ASSR) 체제를 다듬자는 것이었죠. 후에 카자흐 지역을 이끌게 되는 투라르 르스쿨로프(Turar Ryskulov, 1894년~1938년)와 우즈베크를 이끌게 되는 파이줄라 호자예프(Fayzulla Khodzhayev, 1896년~1938년, 사진) 같은 사람들은 단일 투르케스탄 공화국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부는 이런 생각을 용인해줄 수 없었습니다. 폭넓은 자치라던가 민족문화 지원은 철저히 계급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했습니다. 즉, 중앙아시아 민족들이 피억압 민족인 것은 잘 알겠으나, 그중에서도 봉건사회의 지도부와 구습은 어차피 숙청하고 가야한다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민족문제로 당내에서 이론적으로 뜨게 된 스탈린은 개별 민족에 연연하는 것을 사회주의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고, 군부에서 스탈린과 친하던 프룬제 역시 중앙아시아에서 바스마치 운동을 토벌한 경험을 토대로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중앙아시아와 같은 거대한 지역의 다양한 민족적 차이를 무시하고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은 기형적이며, 이는 당내에서 범투르크주의적 야심을 키우는 것 아니냐며 비판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중앙당의 노선에 따라 행정구역이 개편됩니다. 1924년에 주로 언어에 기초하여 투르케스탄이라는 거대한 지역을 분할한 것입니다.
소련 특유의 복잡한 행정구역 체계 때문에 이 변천사를 다 보면 머리가 아파질 지경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이때 역사의 전면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바로 카자흐, 키르기즈, 투르크멘, 타지크, 그리고 우즈베크지요. 이들은 스탈린이 그어놓은 인위적인 국경선 속에서 자신들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 정체성을 새로 주입받아야 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옆에 있던 놈은 우리 씨족의 원수였는데 이제 오늘부터 같은 말 쓰고 비슷한 동네에 있으니 같은 우즈베크인으로 서로 잘 지내라는 겁니다. 큰 혼란과 반발이 잇따랐으나 소련은 이를 강행했고, 새로운 행정체계는 중앙아시아에서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라르 르스쿨로프는 경력에 오점을 남겼고, 파이줄라 호자예프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호자예프의 선택, 사마르칸트
판이 안 좋게 돌아가자 호자예프와 부하라 시절부터 함께한 그의 동료들은 재빨리 노선을 변경하여 모스크바에 매우 협조적으로 다가갑니다. 다 나름의 속셈이 있던 것이었죠. 이들은 토착민족의 전통과 유산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지식인이었고, 자신의 지지기반부터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부하라였습니다. 따라서 이왕 우즈벡 SSR(이하 우즈벡 공화국)으로 재편되는 이상 자신들의 자부심과 현실정치의 이익을 모두 만족시켜줄 수 있는 쪽으로 변화를 주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롭게 생긴 우즈벡 공화국의 수도를 역사적 고도이자 그들의 세력기반인 부하라에서 가까운 사마르칸트로 이전해야 한다고 모스크바의 당 중앙에 끝없이 요구했습니다. 사실 지금이야 사마르칸트가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지, 사마르칸트는 수도가 되기엔 당시만 해도 좀 뜬금없었습니다. 왜냐면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이 몰락한 뒤 지속해서 쇠퇴하면서 18세기 말에는 사실상 버려진 폐허나 다름 없어졌고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철도를 부설하고 지방행정 도시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때서야 소생했기 때문입니다. 일찍부터 러시아인들이 많아 소련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노동자층이 많았던 기존 수도, 타슈켄트와는 급이 안 맞았던 것이지요.
호자예프는 애초에 너무 러시아적인 타슈켄트가 우즈벡 공화국의 수도로 기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가 부하라 에미르국을 멸망시키고 부하라 인민공화국을 수립해 소련 체제의 성립에 기여한 공로가 워낙 컸기에, 당 중앙은 사마르칸트로의 천도를 허락했습니다. 1925년에 우즈벡 공화국 최초의 정부는 이제 타슈켄트가 아니라 사마르칸트에 꾸려졌고, 부하라에 기반을 두었던 자디드 지식인 출신 당원들은 ‘사마르칸트 파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아예 타슈켄트를 다른 공화국에 넘겨버리자고 제안까지 했는데 그다지 민족적이지 못했으나 매우 발전한 도시인 타슈켄트가 향후 사마르칸트의 입지를 위협하는 것을 사전차단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타슈켄트를 자기 지역에서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호자예프는 당 중앙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서,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출신 지식인들을 입당하게 하고, 그들을 우즈벡 공화국의 정부 요직에 배치했습니다.
타슈켄트 파벌의 등장
타슈켄트는 이런 상황을 두고만 보지 않았습니다. 우즈벡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발전한 근대적 도시였는데, 사마르칸트 같은 것이 치고 올라오는 걸 용납할 순 없었겠죠. 혁명에 헌신하는, 사회주의에 충실한 타슈켄트의 공산당원들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파벌을 형성하는 호자예프의 움직임에 반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어차피 부하라나 히바를 멸망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정치적인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모스크바와 연계해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타슈켄트는 사마르칸트와 라이벌 의식을 형성하였고, 타슈켄트의 불만을 규합하여 사마르칸트에 대항할 호자예프의 라이벌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타슈켄트 태생의 우즈벡인으로 혁명 후 모스크바에서 수학하고 온, 공산주의적 비전의 열렬한 옹호자인 아크말 이크라모프(Akmal Ikramov, 1898년~1938년)였습니다. 이크라모프는 1924년의 행정구역 개편 당시 프룬제를 지지하였고, 1925년에는 타슈켄트 주 당서기[footnote]일반적인 도지사 혹은 주지사와 동급[/footnote]가 됩니다. 이크라모프는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1929년에는 우즈벡 공화국 당서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을 주로 훌륭한 당성을 지닌 사회주의자들로 충원하고자 했는데 그런 이들은 당연히도 타슈켄트에 가장 많았고, 자연스럽게 이크라모프를 중심으로 ‘타슈켄트 파벌’이 등장하게 됩니다.
호자예프 vs. 이크라모프
여기서 공산권 행정조직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호자예프가 “정부 요직에 배치했다”는 것과 이크라모프가 “당서기가 되었다”는 것의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공산권의 행정조직은 일반적인 국가의 행정조직과는 살짝 달라서, 기본적으로 당이 영도하고 정부가 따르는 형태입니다. 실질적인 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관료 교육, 배치, 그리고 인사 관리와 같은 조직의 핵심업무는 당이 합니다. 그리고 당이 제시한 방향에 맞추어 각 부처별 세부적인 정책 집행을 수행하는 건 정부가 합니다[footnote]조금 익숙한 예시를 들자면, 중국의 시진핑과 리커창이 각각 총서기라는 당의 최고위직과 총리라는 중국 국무원의 최고위직을 맡은 것이 있겠습니다[/footnote].
같은 우즈벡 공화국의 최고위 정치인들이라고 할지라도 두고 있는 조직기반은 너무나 달랐지요. 호자예프는 우즈벡 인민위원회의 의장(인민위원회는 각 정부부처라고 생각하면 되고 인민위원회 의장은 내각 총리 정도)을 맡아 정부 영역에 자신의 파벌을 만들었다면, 이크라모프는 당서기가 되어 당에 자신의 파벌을 만들었죠. 그리고 1929년은 의미심장한 해였습니다. 이때 이크라모프가 본격적으로 호자예프와 동격의 위치에 올랐는데, 때마침 소련 사회를 뿌리까지 뒤흔들 초대형 국가 개조 프로젝트, 제1차 5개년 계획에 시동이 걸리고 있었습니다.
우즈벡 공화국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에 대한 호자예프와 이크라모프라는 두 라이벌의 노선갈등, 러시아와 가까운 타슈켄트와 전통적인 사마르칸트로 양분된 지역적 지지기반은 우즈벡을 분열시켰습니다. 2편에서 보셨다시피 사실 당시 소련의 모든 지역과 모든 조직이 다 이 모양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소련 사회를 뿌리부터 뒤흔든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고 바로 이 불편한 결합이 현재 우즈베키스탄 정치 상황의 직접적인 뿌리가 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