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몇 가지 논쟁을 보면서 미디어의 공정성 확보 방안이라며 흔히 채택하고 있는 ‘정당 간 균형’이라는 방법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한 가지 사례를 보자. 윤석열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 관련 논란이다.
대통령실이 4월 24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 실린 것으로 밝힌 내용에는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무릎 꿇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두고 야당 측에서 윤 대통령의 역사관 등을 문제 삼으며 비판하자, 국민의힘은 외신이 오역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문장의 주어가 생략됐는데, 그 주어는 윤 대통령이 아니라 ‘일본’으로 해석하는 게 상식적이라는 주장이다. 야당에 대해서는 ‘가짜뉴스 선동’이란 원색적인 표현을 쓰며 비난했다.
정당 간 쟁점 공방, 사실 확인과는 무관
그러자 억울함을 참지 못한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한국어 녹취 파일 내용을 그대로 옮겨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사그라졌다. 한국어로 녹음된 내용에는 윤 대통령이 분명하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이 사건 전개 과정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의 녹취 원문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논쟁은 얼마나 더 길어졌을까? 그런 논쟁을 통해 국민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는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간 여야 간 지리멸렬한 수많은 공방이 진실은 밝히지 못한 채 공격에 공격을 이어가며 혐오와 분노만 조장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사례만 있는 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양이원영 의원도 윤 대통령의 방미 성과로 정부가 발표한 넷플릭스 투자 건을 한국이 넷플릭스에 투자하는 것으로 잘못 읽고 비판하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곧바로 내렸지만, 소모적 논쟁이 오갔다. 정가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제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은 말들이 당장의 대결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독기 가득한 상태로 뿜어져 나올 수 있는 구도를 제도화하는 것은 온당한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가 방송 프로그램 패널이 마주 앉아 나눈 대화는 아니지만, 패널의 대화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다. 패널 구도 이전에 형성된 공방을 그대로 패널 토론으로 가져오고 여기서도 진실을 찾아가기 위한 진솔한 대화를 하기보다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로 독한 말을 쏟아내기 일쑤다.
그렇다면 진실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윤 대통령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 내용이 한국 사회를 위해 유익한 토론거리가 되려면 쟁점을 둘러싼 여야 간 공방을 중계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적 문장인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무릎 꿇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에 대해 무슨 뜻인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대통령에게 물어야 했다.
그랬다면 윤 대통령이 3월 16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21일 국무회의 모두발언과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라는 사실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그날 국무회의에서 “과거는 직시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정당 간 패널 토론 앞서 사실관계 취재부터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이 말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이다. 정말 한국이 일본에 ‘무조건’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렇게 해보면 일본도 몰상식하게 한국에 무릎을 꿇으라고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 강제징용 노동자와 위안부에 대한 포괄적 배상을 백 보, 천 보 양보해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도에 대해 현재 실효적 지배하는 한국의 권리를 과거 식민지배 시절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한때 기록으로 발목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한미일 가치동맹을 논하려면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한 일본의 노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명제가 도출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여야 공방을 살짝 소개는 하더라도 주를 이뤄서는 안 된다. 여야 공방이 저질 혐오만 확대 재생산할 뿐 진실에는 한 발짝도 다가서지 못하게 해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거대 양당이 20대 대선에서 거둔 지지율은 전체 유권자의 74.3% 수준이다. 거대 양당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가 성비나 연령비 등에 있어서 전체 국민의 분포를 제대로 담보하고 있지도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 양당에만 초점을 맞춰 이들의 독기 어린 공방이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국민의 냉정한 판단을 흐리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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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언론 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언론포커스’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칼럼의 필자는 정연구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입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