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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가 김희철에게 했어야 하는 건

솔직히 별 관심 없었다. 연예인 말실수는 흔하고, 그에 따른 기자나 칼럼니스트의 문제제기 역시 흔하니까. 위근우는 6만이 넘는 팔로워를 가진 해당 분야 권위자고, 현재 그 글엔 좋아요 2만과 댓글 6,600여개가 달렸다.

위근우의 게시물 전문

사적으로 친했던 두 동료를 잃은 김희철 씨의 분노를 내가 감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젠더갈등'(따옴표를 쓰는 이유는 내가 젠더갈등, 성별 간 갈등이란 개념에 동의하지 않아서다)의 혼파망(‘혼돈파괴망가’ 혹은 ‘혼돈파괴망각’의 줄임말, 편집자) 속에서 나온 혐오발언들로 두 동료가 힘들어 했다고 느껴진다면 페미니즘의 당위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질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고 설리 씨에게 남성 악플러뿐 아니라 여성 악플러도 있었고, 그 중 태세 전환이 있던 이들이 있던 게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해도 이걸 ‘성별간 갈등’ 문제로 치환해 둘 다 잘못이라 말하는 건 엇나간 판단이라는 생각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남성 악플러 여성 악플러 둘 다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 근거로부터 ‘성별 간 갈등’에서도 남녀 둘 다 잘못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러한 논리가 정당화되려면 고인에 대한 여성 악플이 이런 ‘젠더갈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내적 연관이 제시되어야 한다. 가령 설리의 노브라에 대해 비난하고 그에게 성희롱을 하던 남성들의 악플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혐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고인에 대한 여성 악플 역시 ‘남성혐오'(역시 따옴표를 쓰는 건 편의적으로 쓰지만 동의하지 않는 개념이라서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걸까. 이 부분의 논리적 고리가 약하다.

또한 이런 내적 정합성의 문제와 별개로, 고 설리 씨가 겪어야 했던 경험적 맥락을 따져도(심지어 그것을 김희철 씨가 나보다 더 잘 알지라도) 저 판단은 잘못된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 악플이 동일하게 가해졌다 가정해도 실제로 기사나 연예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고인에 대한 오피셜한 공격으로 가시화된 건 결국 남성중심적 담론이었다. 즉 고인을 직접적 혹은 우회적으로 비난한 연예기사들은 다분히 남성(혹은 남초) 중심적 관점으로 고인의 노브라에 대해, 고인의 ‘시선강간’이라는 워딩에 대해 시비했다. 가령 ‘누가 설리에게 시선강간이란 말을 알려줬는가’ 따위의 쓰레기 같은 기사들이 그러하다.

둘째, 고인이 본인의 삶 안에서 지키려 한 태도 자체가 다분히 여성의 자기결정권(노브라)과 자매애(생리대 지원)였다. 김희철 씨는 고인을 ‘젠더갈등’의 피해자로 보지만 정작 고인이야말로 ‘젠더갈등’에서 여성 진영의 중요한 플레이어이자 파이터였다. 그렇게 여성 연예인에 가해지는 여성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내서 저항한 고인이 과연 ‘성별 간 갈등’이라는 프레임에 동의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개인적 친분과 함께한 시간이야 김희철 씨가 훨씬 많겠지만.

셋째, 악플러는 모든 성별에 존재했지만 반대로 설리의 삶을 존중하고 응원해준 이들 대부분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었다. 앞서 인용한 쓰레기 같은 기사들에 대해 반박하고 고인을 옹호한 기사나 칼럼들은 내가 재직했던 ‘아이즈’의 기사를 비롯해 다분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작성됐다. 이런 반박 기사조차 김희철 씨가 ‘젠더갈등’적인 기사들로 싸잡아 비난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위의 이유들로 고인에게 가해진 무차별한 악플을 근거로 김희철 씨가 평소 믿던(노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가사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젠더갈등’ 담론을 정당화하는 건 그리 세밀한 분석이라 보지 않는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친했던 동료를 잃었던 그의 울분을 감히 가늠할 수 없고 그 울분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말이 이젠 없는 고인의 진심을 대변하는 게 되어선 안 되며, 그럴수록 이런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덧. 고인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김동완 씨가 지적했던 [악플의 밤]의 문제에 동의하며 그렇게 고인을 악플에 ‘직접 맞서도록’ 방송에서 밀어붙이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김희철 씨 말대로 고인이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행복하다고 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이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고인을 대신해 [악플의 밤]에 대한 알리바이를 다름아닌 JTBC 예능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리 윤리적이지 못한 편집이라고 생각한다.

덧의 덧. 얼마 전 허지웅 씨가 ‘젠더갈등’이란 워딩에 대해 ‘젠더갈등’이라는 중립적이고 건조한 현실이 있고 그 이면에 여성차별이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 원론적으론 이해하지만 위에서 보듯 거의 대부분의 경험적 맥락에서 ‘젠더갈등’이란 개념은 그 개념의 사용을 통해 여성차별이라는 이면의 진실을 가리는데 사용된다.

김희철의 댓글

아저씨. 악플러나 범죄자가 ‘남자냐 여자냐’ 이게 중요함? 성별을 떠나 범죄 저지르면 그냥 범죄자지. 그리고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노래는 그동안 내 루머랑 악플들 생성하고 퍼뜨린 일베랑 여시를 깐거지 어딜 봐서 내가 페미니스트를 깜? 하물며 나도, 그들과 친했던 동료들은 아직도 먹먹하고 속상해서 두 친구 이름을 함부로 못꺼내고 조심히 언급을 하는데.. 아저씨는 뭔데 고인 이용해 이딴 글을 싸는거죠? 이거 또 기사나면 님 원하는데로 이슈 만들까봐 그냥 읽고 넘어가려했는데.. 본인 인기 얻고 유명세 올리고 싶어서 존나 빨아재끼네 진짜.. 마지막으로 댁들 싸우는데 고인을 무기로 쓰지마시죠. 개같으니까

김희철은 자신의 투박한 언어로 정제되지 않은 댓글을 남겼고, 그 댓글은 마치 위근우의 논리(김희철의 경솔함과 부도덕함)를 증명하는 듯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심지어 문제가 되는 그 방송조차 보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지인과의 대화로 깨달았다. 나는 당연히 김희철이 천박한 한남이며, 위근우가 그 한남에게 지엄한 판단을 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문제의 그 글과 위근우가 올린 캡처만 보았을 땐 누가 봐도 그랬다.

방송을 다시 보며 맥락을 봤다. 앞에선 유명 유튜버들이 겪었던 악플의 실태가 나오고, 김희철이 뒤를 이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실 저는.. 그 두 친구랑 좀 친했었는데, 그래서 이제 제가 그 일들을 겪고 가장 화가 났던거는, 요즘 뭐, 솔직히 성별을 갈라서 싸우잖아요. 그런 아까 두 분이 받았던 악플처럼(대도서관과 윰댕) 남자들은, 소위 말하는 성희롱으로 두 친구들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고, 여자들은 여자 망신이다, 부터 또 모욕적인 말들을 하다가… 그러다가 이제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이제 탓 거리 할 걸 찾는 거에요. 니네 탓이다. 아니다 니네 탓이다. 아니다 프로그램 탓이다. 뭐 누구 탓이다. 그러니까 서로 또 먹이를 물어뜯으러 다니고, 뭐 너무 슬퍼서 우리는 추모를 할 거다. 그렇게 욕하던 친구들이.. 그러면서 저도 이제 전 평생 연예인을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인데, 저도 형(신동엽)한테 고민상담 할 정도로… 제가 그래서 그때 SNS를 다 끊고 닫았거든요. 나도 너무 화가 나서 이 모든 걸 볼 때마다 더 화가 나서…” (김희철, JTBC – ’77억의 사랑’ 중에서 , 강조는 편집자)

이 발언에 가한 위근우의 논리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 나머지, 나는 지성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행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알겠다.

페미니즘이란 담론으로 보자면 김희철의 발언은 충분히 정치적으로 해석 가능하다. 둘 다 잘못했다는 판단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지도 고치지도 못한다. 김희철 정도 인플루언서의 발언은 감시당할 필요가 있다. 그리해 위근우의 말은 담론 상에서 굉장히 정당하다.

그러나 김희철의 발언은 다른 식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김희철의 말이 고인의 진심을 대변하면 안 된다던 기자의 말과 달리, 김희철은 자신의 상실감과 진심을 말했을 수 있다. ‘나는 그 담론 때문에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 그 담론이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내 친구들을 지키지 못했다, 어떤 싸움도 내 사람들을 되돌리지 못한다, 왜 내버려두지 않았느냐, 왜 죽은 후에도 그러지 못하느냐, 연예계 종사자로서 나는 환멸을 느낀다..’ 나는 조심스레, 김희철에겐 페미니즘을 비난하던 사람이나 지지하던 사람이나 악플러나 모두 같은 사람으로 느껴질 거로 생각한다. 정치나 담론 이전 개인인 김희철이 있다. 소중한 사람은 이제 그의 곁에 없다. 무엇도 그녀들을 되돌릴 수 없다.

위근우의 말처럼 고인들이 자기 삶 안에서 지키고자 한 게 자기결정권이었을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의 마음으로 설리와 구하라의 행보를 응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고인들이 원한 삶은 친구 김희철과 보란 듯 잘 지내는 평범한 삶이었을 수도 있다. 말이나 사상을 검증당하지 않는, 그냥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주는 삶. 나는 “기자님들, 저 좀 예뻐해주세요. 시청자님들, 저 좀 예뻐해주세요.”라던 설리의 영상을 울컥 떠올린다. 그녀들을 사지로 내몬 건 엄중한 잣대와 시선이었고, 페미니즘은 그녀들을 죽이진 않았으나 잡아주지는 못했다. 그게 내가 아프게 인정하는 현실이다.

위근우는 해석 가능성이 두 갈래로 나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밝힌다. “사적으로 친했던 두 동료를 잃은 김희철의 분노를 내가 감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설리와 구하라를 괴롭혀온 것과 같은 매커니즘의 해석을 택했다. 개인을 지우고 거룩한 대의를 남겨두었다. 나는 위근우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나 맞아서 문제라고 생각한다. 김희철은 틀렸다. 그리고 충분히 틀릴 수 있었다.

누군가의 발언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차원이었다면, 그 누군가가 연예계 종사자이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이라면, 위근우가 택했어야 하는 차원은 무엇인지 곱씹는다. 그는 페미니즘의 당위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동시에, 김희철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는 화용론과 맥락과 시스템을 말해온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친구를 잃은 연예인이 자기 언어로 세련되게 호소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위근우는 전자를 택했다.

언어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 말하는 기본 전제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에게, 운이 나빠 학력을 갖지 못한 친구들에게 왜 세련되게 말하지 못하냐고 탓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학력에서 배운 거라곤 그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특권. 구하라도 설리도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찾다가 좌절했다. 연예인에게는 세련된 지성의 언어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고인들은 알려주었다.

김희철의 투박한 댓글은 그를 더 추락시켰다. 그는 이제 위근우의 논리를 증명한 빼박 천박 한남 연예인이 되었고, 위근우의 위상은 더 올라갔다. 덕을 본 건 누구일까. 어젯밤 나의 지인은 “이런 게 쌓여서 사람이 죽었구나” 했다. 맥락을 살피지 않고 단죄하는 것, 자기 마음을 세련되게 호소할 수 없는 이에게 세련됨을 요구하는 것, 체급이 다른 이와 싸우는 것. 나는 그게 지성이 가진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인의 의미는 세련된 언변이 아닌 해석가능성에 있다. 단어와 생에는 여러 함의가 있고, 특권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많은 해석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정확도란 언제까지나 객관적인 무엇이 아닌 시대의 특권자가 선택한 것에 다름 없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사살이 아닌 구명에 가까운 해석가능성에 마음 써야 한다. 우리는 윤리적으로 우월해지려는 게 아니라 함께 가기 위해 윤리를 꺼내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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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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