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쩌다보니 ‘아재돌’[footnote]아재돌: 아재들이 좋아한다는 의미로 ‘아이돌’에 빗대어 만든 조어.[/footnote]이 되었다고 했다.
모든 오늘의 삶은 어제에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 경로의존적이다. 그 어제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내 삶을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 그저 우연히, 마치 제비뽑기처럼, 삶에 의해 선택당했을 뿐이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이 이미 결정돼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은 운명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에도 결이 있어서, 어떤 운명, 가령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숙명인 반면에 어떤 운명, 가령 행복한 연애나 슬픈 이별 따위는, 물론 쉽지 않겠지만, 노력해서 성취하거나 가까스로 피해갈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숙명이니 운명이니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임명묵이라는 스물다섯 청년이 아재돌이 된 경로와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의 행로가 서로 겹치고 어긋나면서 직조한 씨줄과 날줄이 마치 그 운명과 숙명처럼 때로는 이미 결정된 형태로 또 때로는 결단 혹은 선택으로 조금씩 그 결을 달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사의 많은 일들이 이미 ‘지리’에 의해 결정됐다는 관점(지리결정론)을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지리의 결정에 맞서는 건 인간의 의지이기도 하다.
스물다섯 ‘아재돌’이 바라보는 세상에 관해 물었다.
- 2018년 7월 18일
- 서울 근교 식당과 카페 등
- 인터뷰이: 임명묵
- 인터뷰어: 민노씨
= 자기소개.
복학생이다. 페이스북과 슬로우뉴스에 글을 쓴다. 글쓰기가 취미인 대학생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 일간지에 2030 칼럼을 쓰게 됐다고?
서울신문이 2030코너에서 칼럼 지면을 내주었는데,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건 아닌가 걱정이다. 최대한 재밌게 쓰려고 한다.
= 조만간 책도 나오는데.
슬로우뉴스에서 연재했던 중국에 관해 글들을 모아서 출판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8월 중에는 나올 것 같다.
= 책 제목은.
아직 미정이다. 내가 원래 제목을 짓는 걸 참 힘들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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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돌
= 페북에서는 일명 ‘아재돌’로 불리는데.
기본적으로 저를 좋게 봐주시는 표현이라서 고맙게 생각한다.
= 누가 처음 쓴 표현인가.
한 페이스북 친구께서 처음 쓰셨는데, 그분 이름을 알려드리면 그분께서 좋아할지 싫어할지 몰라서 일단 그렇게만 말하겠다.
= 그분(들)은 어떤 취지로 ‘아재돌’이라는 표현을 쓴 건가.
30, 40대들이 즐겼던 컨텐츠를 내 나이또래에 비해선 내가 비교적 잘 알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니까 그런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아재들이 좋아하는) 컨텐츠를 곧잘 페북 등에 올리는데, 그러다보니까 ‘너는 어떻게 나이도 어린 20대 친구가 이런 걸 어떻게 알아서 올리냐’라고 하시더라. 그런 맥락에서 나온 표현 같다.
= “30, 40대들이 즐겼던 컨텐츠”라고 했는데 어떤? 예를 들면.
80, 90년대 음악이나 영화 그리고 대중문화. 예를 들면 WWF(지금은 WWE). 그리고 레트로 게임들. 가령, 버추어 파이터, 파랜드 택틱스, 코에이 징기스칸…
= 슬로우뉴스에는 왜 그런 아재들의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지 않나? 슬로우뉴스에는 주로 외국, 특히 중국, 동아시아 이야기의 정치사에 관한 좀 무거운 글을 주로 쓰는데.
사안이나 문제에 관해 맥락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각을 주면서 의의를 밝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즐기고 겪었던 일에 관한 체험을 풀어내는 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는 일에는 약한 편이라서 주로 전자의 글을 더 많이 쓰는 편이고,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 ‘아재돌’이라는 표현은 마음에 드나?
내 나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 같기도 하고, 나를 어쨌든 좋게 봐주시는 표현 같아서 흡족하게 여기고 있다.
= 스스로 주변 또래와는 많이 다르다고 느끼나.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살았고, 집안이 어려웠다가 사정이 나아져서 (삶의 큰 굴곡 없이 균일하게 혹은 평균적으로 유복하게 자란 친구들에 비해선) 다양한 시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어느 한 지역에 고착해서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것 같다. 또래 20대 중에 유별나다고 생각하진 않은데, 이방인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긴 하다.
= 이방인적인 성향?
일테면, 40대 분들을 만났을 때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고, 20대와 만나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수도 있고, 서울 사는 사람들에게 시골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지역에 사는 친구들에게 서울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다. 뿌릴 박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달까. 그런 의미에서…
= 아직 뿌리를 내리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 거 아닌가.
그렇긴 하다. (ㅎㅎㅎㅎㅎ)
= 페이스북에 올린 고향(음성) 사진이 너무 을씨년스러워서 인상적이었다. 유년의 왕국은 나에게도 따뜻한 풍요의 공간이면서 여전히 공포스러운 결핍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향이라는 건 어떤 느낌, 어떤 기억인가.
나에게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은 두 곳이다. 음성과 조치원. 음성에서는 11살까지 살았고, 조치원에선 19살, 고3까지 살았는데, 사실 두 곳 모두 흔히 사람들이 ‘고향’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느낌과 이미지는 아니다. 고향이라고 하면 보통 따뜻함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이 따뜻함에서 가장 중요한 게 고향’사람들’이다. 즉, 고향에 가면 있을 친적, 가족, 친구들이 있어서 고향이 따뜻하다고 느껴질텐데, 사실 지방 소도시에서도 공동체의 해체랄까 그런 게 이미 많이 이뤄져서 과거 모습과는 이제 다르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익숙한 얼굴들이 있어서 그립긴 하고, 여기에서 뭘 했지, 이런 추억이 있지, 이런 게 생각은 나지만 그게 엄청나게 강렬한 느낌, 따뜻한 감정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 아재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들은 뭔가.
사안에 대해서 분석적인 이야기를 할 때. 20대 친구들이 쓰는 글은 분석적인 글보다는 자기 체험을 좀더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것 같은데, 내 경우엔 그런 쪽은 잘하지 못해서 내가 재밌어 하고 잘하는 분석적인 관점이 담긴 글을 올렸고, 그런 글들을 감정적인 글보다는 더 좋아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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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 아재 혹은 아재 vs. 청년
= 20대로서 또래 친구들과 글을 통해 교류하는 아재들 사이에서 일테면 ‘경계인’이라는 생각이 들법한데.
두 집단(청년 집단과 아재 집단)과 두루 친하게 지내고, 또 어떻게 보면 진정한 고향이 없는 것처럼, 두 집단에 온전히 속하지도 못한다고 볼 수 있는데… 생물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 기본적으론 20대이긴 하다. 그런데 내가 독특하게 생각하고, 여러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시골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내 글을 가장 많이 읽고, 그 글을 페북에서 가장 자주 교류하는 나이대가 3, 40대인데, 한국사회 전반에서는 이 세대가 ‘낀 세대’ 같다. 농촌문화가 잔존하는 세대면서 새로운 도시문화를 받아들인 세대 같다. 그런 맥락에서 한 이야기다. 그런데 ‘진짜 아재’라고 할 수 있는 50대 이후부터는 좀 구독률이 떨어지는 것 같다.
= 좀 더 설명하면.
80년대까지 한국 사회는 굉장히 동질적이었고 생각한다. 도시문화나 소비문화가 발전하지 못했고, 개인주의가 정착하지 못했다. 반면 90년대 이후에는 서울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문화, 소비문화, 개인주의가 만개하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90년대에 시작한 소비문화, 선진국에 가까운 문화에 익숙해진다. 내 생각에 과거로 갈수록 농촌문화의 잔재가 많이 남았던 것 같은데, 나는 이런 문화적 변화를 늦게 받아들인 동네에서 청소년기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아재들과의 문화적인 접점이 많았던 같다.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와서 또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조치원이나 음성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질감’을 크게 느꼈다.
= 이질감은 어떻게 작용했나?
그 이질감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한국 사회를 좀 더 생각하게 됐다. 중산층 대학생 문화랄까. 그런 게 실체가 있다면, 그것을 벗어나서 세상을 보려고 노력했고, 글에도 그런 노력이 담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는 한다.
= ‘아재돌’의 관점에서 두 집단(청년 집단과 아재 집단)의 사회적인 물리적인 간극, 두 집단의 심리적인 정서적인 갈등이 실재한다고 판단하나.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집단이 부모와 자식으로, 선생과 스승, 선배와 후배로 엮여 있지만, 80년대만해도 대한민국은 현재의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고, 서로 다른 토대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서로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서로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반드시 갈등하는 건 아니지 않나. 왜 갈등의 요체는 무엇이라고 보나.
도시문화와 농촌문화가 충돌했을 때 사회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관한 방법론이 충돌하는 것 같다. 조너선 하이트는 정치적 갈등의 본질을 도덕적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설명했는데, 7, 80년대의 농촌 정서에 익숙한 사람과 1인당 GDP가 2만달러를 넘어서는 세계를 태어나면서부터 체험한 세대는 서로 도덕적 판단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고, 청년세대는 태생적으로 저항의 DNA랄까 그런 걸 타고 난다고 생각한다.
= 저항?
이를테면, 내 부모님은 20대 중반, 지금의 내 나이에 결혼을 하셨는데, 기본적으로 가정을 꾸리거나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 반항정신은 좀 누그러지고, 현실인식이 강해지는데, 지금은 20대 중반의 나이는 여전히 학생이고, 진학을 준비하는 부모에 의존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여전히 20대 중반의 나이에도 책임을 질 게 별로 없다. 그러니까 오히려 반항적일 수 있는 것 같다.
= 20대의 반항이라는 것은 그렇다면 자기모순 같다. 왜냐하면 반항이라는 것은 최소한 스스로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고, 자신을 객체화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기본으로 한다고 보는데, 당신이 하는 말은 부모에게 의존적이면서 악세사리처럼 저항이나 반항으로 치장하는 것 같달까. 그런 지적인 것 같은데 맞나.
기본적으로는 맞지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반항의 본질은 그 자체로 자기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잘 굴러가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누군가는 변화를 외쳐야 하는데, 불안정된 상태에서 변화만 주장하면 혼란으로 치닫을 위험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탐색할 때 위험을 분산할만한 지지대가 있어야 하고, 부모의 존재, 부모의 뒷받침이 탄탄한 계층이 좀 더 반항적인 행동을 할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정서적 물질적 지지대를 갖춘 상태에서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은 사회의 안정과 변화를 갖기 위해 생기는 자기모순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의식을 완전히 버리고, 완전히 의존한 상태에서 지켜지지도 못할 변화를 외치는 것은 균형이 파괴된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기성세대로 진입하면 더 보수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나 자신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아직 어린애라는 걸 자각하고 살려고 한다.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 지는 사람들을 더 존중하기 위해서다.
= 20대의 보수화를 많이들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20대의 보수화, 그 주력 계층은 중산층 이상의 자녀가 아니라 무산층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인가.
나에게 이 질문에 관한 통계나 데이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보수화’ 그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갈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이 갈등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 갈등이 창조적인 생산이나 조화로 이뤄지지 않고, 서로에 대한 적대와 단절로 고착할 수 있는 위험은 상존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쪽의 가능성이 클까.
후자, 적대와 단절의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어야 하는데, 고도성장의 부산물이랄까. 고도성장도 얻고, 세대조화까지 기대하는 것은 욕심인 것 같다. 세대갈등은 고도성장에 비례해서 증폭했고, 그것은 당연한 대가로 생각한다.
= 그럼에도 그 갈등의 비용은 최소화해야 한다. 그 비용을 줄일 방법은.
현재 잔존하는 구세대 문화가 좀 더 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좀 더 퇴장해야 하는 구세대 문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리돼 있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도 사적 영역의 논리를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서구는 살롱이나 공론장이 등장하면서 가문이나 소속과 상관 없이 그저 개인과 개인으로 관계 맺는 문화가 등장했는데, 이는 농촌문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고, 산업문화에 어울리는 것이었다고 본다. 한국은 그런 공사분리가 이뤄지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산업이 발전했다. 이제는 개인과 개인으로 관계맺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문화가 많이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런데 이런 정서는 어떻게 보는 지 궁금하다. 가령,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가장 크게 공감을 이끌어낸 요소는 지금은 크게 파괴된 마을 공동체의 따뜻함이랄까, 인간미, 정… 이런 것들이었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개인주의의 정착과는 별론으로, 많은 이들이 공동체의 파괴에 굉장한 정서적 상실감을 느끼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동의한다. 구세대 문화, 공동체 문화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에 개인주의문화에 대해 경도된 측면이 있는데, 이제는 과거, 고향,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것 자체, 공동체가 큰 자산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그 심리적 효용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회가 너무 빨리 변화하면서 공동체 문화의 부작용은 드러나서 공격받았고, 사라졌는데, 그런 공동체 문화를 제공해주던 심리적 안정감, 정서적 만족감을 대체할만 것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다.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다.
= 개인주의문화와 공동체문화는 제로섬인가 플러스섬인가.
이상적으로는 플로스섬이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제로섬에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이동성이 높아지면서 개인들이 경제적 기회를 찾아서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런 경우에는 공동체문화는 정착하기 어렵다고 본다. 끈끈한 공동체문화보다는 ‘느슨한 유대’가 좀 더 적합할 것 같다.
서구 포퓰리즘의 발흥이 그 두 문화(개인주의 vs. 공동체)의 싸움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조기숙류의 청년관(‘청년이라면 열정과 패기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야지’)은 어떻게 생각하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정 세대가 자신감을 얻으려면 스스로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고, 자신의 경제 사회적 조건이 나아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해야 생긴다고 보는데, 현 세대가 그럴 만한 기회 자체가 없었는데, 어떻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서 실제로 성취했다는 사실보다는 성취할 수 있다는 느낌이 더 중요한 것 같다. (= ‘느낌’의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사회에 기대, 미래에 대한 신뢰,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기대… 586과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런 정서적 차이로 본다.
= 미래에 대한 기대가능성 혹은 예견가능성이 가장 큰 차이라는 건가.
그렇다. 다시 강조하지만, 실제 소득이나 어떤 지표상의 수치라기보다는 심리,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너희 젊은 세대는 풍요롭게 성장했는데, 왜 그렇게 징징거리니’라는 힐난은 실제 통계나 데이터로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발언권을 쥔 사람들은 매년 향상의 경험을 했고, 우리 세대, 적어도 IMF 이후 세대는 그 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는 점이다. 그것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하나 더 부연하자면, 발언권 자체도 세대로 이어지며 세습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기성세대가 아직 발언권을 많이 쥐고 있다고 나는 말했지만, 기성세대 중에서도 마이크를 쥔 사람과 마이크를 쥐지 못한 사람이 있다. 청년 세대도 발언권이 없다고 불평을 많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 보면 다 소위 ‘인서울’ 명문대생이다. 세대 간 차이만큼이나 세대 내의 계층 차이도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얘기는 자세히 얘기하려면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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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 꽤 긴 글을 쓰는데. 딱히 이유가 있나.
하고 싶은 말을 다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다 쏟아내자, 그런 생각으로 쓰다보니 글이 길어지는 것 같다. 글을 쓰다가 자료조사를 하다보면, 재밌는 얘기들이 많아지다보니까 그래서 더 길어지기도 한다.
= 글쓰는 일은 즐거운가.
재밌다. 생각을 정리해서 실물로 만든다는 것도 재밌고, 글에 반응이 좋으면 더 재밌다.
= 지금까지 슬로우뉴스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글은.
‘중국과 오래된 미래’ 연재. 이번에 책으로 나오는 것도 이 연재를 바탕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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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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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아쉬웠던 글은.
트럼프 당선 당시에 쓴 글들이 지금 보면 좀 아쉬운 점이 많다. 그때는 생각이 좀 짧았달까. 다시 읽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글을 읽어보면, 맥락이나 배경(기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가끔은 배경을 설명하다가 본론을 까먹을 것 같은 느낌 들 정도다(웃음).
맞다. 과거가 현재나 미래를 모두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사건을 만들기 위해선 수많은 사건이 모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유장한 스타일을 의외로 많이 좋아들 하신다. 요즘에는 별로 보기 힘들 스타일이라서 그런가 보다(웃음).
= 그리고 ‘지리결정론’에 상당히 경도된 태도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맞다. 지리가 인간사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리라는 게 고정된 것은 아니고, 인간의 활용 능력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인간의 능력과 지리가 결합했을 때 수만 가지 장면이 나오는 것이고, 그게 인간사의 재미 같다.
= 지리결정론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로 생각하는 한두 가지 사례를 예시하면.
지리결정론의 대표적 책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아주 다양한 사례들이 설명돼 있다. 그 중에서도 잉카제국이 한줌의 스페인 정복자에게 무너지는데, 다이아몬드는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이렇게 쉽게 정복한 이유를 식물자원과 동물자원의 차이 그리고 대륙의 모양에서 찾는다.
좀 더 부연하면,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작물로 만들고, 가축화할 자원이 풍부했던 반면에서 아메리카대륙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유라시아 사람들은 정교한 문명을 만들만한 식량을 확보했고, 가축의 힘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었으며, 치명적인 전염병도 얻었다(동시에 ‘항체’도 얻었다는 의미에서). 아메리카사람들은 대규모 전염병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체가 당연히 없었고, 스페인과 접촉하자마다 대다수가 그 전염병으로 죽었다.
= 대륙의 차이는?
유라시아는 동서로 길었기 때문에 교류에 용이했다. 위도의 차이가 심하지 않아서. 지식의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는 남북으로 길었기 때문에 교류가 어려웠고, 가지고 있는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다.
= 지리결정론의 관점에서 한반도는?
유리한 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온대기후였기 때문에 일찍이 농경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문화 중심지인 중국과 가까워서 빠르게 문명발전을 쫓을 수 있었다. 중국에 흡수당할만큼 가깝지는 않아서 독자적인 문화와 정치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 미래에도 지리결정론은 중요한가.
인간이 물질적인 존재인 이상 지리결정론을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본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라고 하더라도 가장 효율적인 정보의 교류는 ‘면대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과점에서보면 세계적 대도시라는 지리가 혁신이나 아이디어 교류에 유리하고, 이 분포는 과거 역사, 그 역사의 바탕이 되는 자연환경에 강하게 얽켜있다.
= 그런 관점에서 가장 유리한 국가나 도시는 어딘가.
미국의 대도시들, 뉴욕이나 LA,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중국의 상하이, 선전. 한국의 서울 등.
= 글쓰기의 전범이 있다면.
이언 모리스를 가장 좋아한다. 그때그때 인상적으로 읽은 책의 문체가 흡수되기 때문에 딱히 고정된 전범이 존재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 쓰고 싶은 소재나 주제가 있다면.
일단은 20세기 러시아를 써보고 싶다. 일본의 근대화로 시작해서 전쟁까지 가는 과정을 써보고 싶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살을 좀 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