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2일 대법원에서 세계 재판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판결을 했다. 이른바 ‘자살보험금 미지급’ 건이다.
사건의 진짜 쟁점은 무엇인가
사실 이 건은 자살보험금 미지급 건으로 불러서는 곤란하다. 쟁점이 자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험사들이 자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 쟁점을 자살로 잡았을 뿐이다. 이 사건의 쟁점은 자살이 아니라, 약관작성자의 책임이다.
약관을 작성한 자, 즉 보험회사가 자신들이 작성한 약관에 불리한 내용이 들어간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가, 보험금청구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고,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 것이다.
설마 몰랐겠느냐 직접 작성했는데 알고 그랬겠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 있는데, 실제 과장급 이상 직원들을 만나본 결과, 그들의 지적 수준이 간단한 약관의 효과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수준임을 확인했다.
약관 내용 = 계약 2년 경과 시 자살보험금 지급
문제가 된 보험은 생명보험에 해당하는 상품으로, 재해사망에 관한 특약 약관에서 보험계약 체결 후 2년이 경과한 이후의 자살에 대해서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을 둔 것이다(재해사망보험금이 일반사망보험금보다 금액이 많다).
보험회사는 2년 경과 후 자살사망에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약관을 작성하여 계약을 체결했으면서도, 정작 보험금 청구가 들어오자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며 재해사망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이와 똑같은 계약이 2010년 4월까지[footnote]이후에는 약관을 변경[/footnote] 무려 280만 건, 국내 10개 생보사[footnote]삼성·교보·한화·ING·알리안츠·신한·NH농협·동양·동부·메트라이프생명[/footnote], 총 미지급금액이 약 2조 원에 달한다. [footnote]불과 수 년 만에 10만 명 이상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회적인 문제는 논외로 하고.[/footnote]
모순된 주장, 금융산업 특유의 ‘비양심’
이번 사건에서 보험사는 자신들이 작성한 약관이 불리하게 작용하자 “해당 약관은 잘못 작성된 것인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체결한 소비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실제로 이렇게 주장했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금융산업 특유의 비양심을 또다시 보여주었다.
이번 사건은 교보생명이 피고고, ING 생명이 피고인 재판이 전원합의체로 계류 중이었으나 이번 판결이 확정됨과 동시에 취소되었다. 다른 모든 생보사들은 이 두 건이 보험사의 승리로 굳어지길 바라며 생보 산업계 전체의 역량을 동원하여 전방위적 로비와 여론전을 펼쳤다.
특히 항소심 판결이 보험사의 승소로 확정되면서 그 정도가 심해졌는데, 2015년 하반기부터 2016년 상반기의 보험과 관련된 모든 토론, 세미나, 학회 등등에 학자(교수), 보험사 법무팀 직원, 보험사 홍보팀 직원, 보험사 대리 로펌, 보험사에 잘 보이고 싶은 대학원생 등등 수많은 사람이 자살은 보험금 지급 요인이 아니라며 보험회사 편을 들고 다녔다.
논점이탈의 오류
이들의 주장에는 큰 오류가 있는데, 바로 논점이탈의 오류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이 사건의 쟁점은 자살이 재해인가, 보험금 지급사유인가 하는 부분이 아니다.
[box type=”info”]
“회사가 스스로 작성한 약관이 자신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
[/box]
약관을 통한 계약 법리에 대한 재확인이다. 법학에서 ‘약관작성자의 책임’ 또는 ‘(약관)작성자의 불이익 원칙’으로 불리는 법리를 보험회사가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라 이 부분을 쟁점으로 하면 보험회사가 승소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보험회사 편을 든 다른 모든 자들도 마찬가지. 따라서 이들은 약관작성자의 책임이 아닌 ‘자살의 당위성’을 쟁점으로 주장했다.
대법원, ‘명백한 사건이라 시간 끌 이유 없다’
다행히도 고등법원과 달리, 대법원은 보험회사와 어용학자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고 쟁점을 바로 잡아 계약의 기본원칙을 지키도록 하는 판결을 하여 자본주의의 근간이 무너지는 일은 막았다.
원래 이 판결은 빠르면 여름, 아마도 연말쯤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대법원 재판부의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예정보다 엄청 빨리 판결이 나왔다. 빠른 판결이 나온 이유는 주심인 대법관이 이 사건은 이렇게 오래 끌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더불어 보험회사의 주장처럼 심각하게 어렵게 고민할 문제도 아니므로 이후 예정되었던 전원합의체도 취소되었다고 한다.
현재 진행 중인 다른 보험회사의 소송들에 대해 대법원이 확고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하급심에서 보험회사들의 줄 패소가 예상된다[footnote]본 사건의 변호인도 김앤장이다. 김앤장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사건을 자주 수임하긴 하나 승소율은 높지 않다[/footnote]. 여러 형사, 정치적 이슈에서 대법원도 자주 비판을 받으나 적어도 보험사건에서는 현행법의 해석 한계 내에서 최대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판결을 한다. 특히 약관의 경우 대법원은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소송 대리인이 뭔가 굉장한 근거라도 제시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내심 실망스러웠다.
해외 사례? 없다, 왜냐하면 너무 당연하므로
이 건을 준비하면서 선진국의 사례를 찾아보았으나 소송으로 간 사례는 전혀 찾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약관 작성자가 자신이 잘못 작성한 약관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논의의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자신이 잘못 작성한 약관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 씌우려다 법원에 덜미가 잡힌 유일무이한 사례로 세계 보험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이 건에 대해 자문을 구하면서 이 내용이 이미 유럽학자들에게 알려졌다. 판결이 나오자마자 심지어 보험회사의 편을 들어 학계에서 발표까지 했던 자들이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행동하기도 했다.
보험회사 다수가 같은 문제를 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선도적 보험회사의 약관을 검토 없이 베껴서 상품을 만드는 ‘관행’ 때문이며, 역시나 ‘관행’을 이유로 상품 제조자로서 약관을 검토할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수년 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보험료의 담합을 문제 삼을 때도 동일한 내용으로 항변하기도 하였다. 예외로 프루덴셜 생명보험사는 분쟁 없이 보험금을 지급하였는데 애초에 문제가 되는 약관 조항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질, 기업 이익 위해 소비자 기본권 침해한 사건
옥시와 정운호 게이트로 기업의 윤리적 사회적 책임이 도마 위에 오른 시기에 맞물려 이 사건도 주목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보험 건은 대중의 관심을 받기 쉽지 않은 듯하다. 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비자의 기본권을 침해한 사건이라는 본질은 같다.
초학자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 있는 경험을 한 사안인데,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혼자 ‘예’라고 한 경험, 온갖 회유와 험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틴 경험, 정치한 논리만이 내가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경험 등등이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소비자가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기업들이 비양심적 횡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들을 밝혀내고 책임을 지우는 것.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증명해 내는 것. 그들이 책임을 지게 할 논리는 만드는 것. 사람들의 합의를 끌어내는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