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2013),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서울: 뿌리와 이파리.

문제의 책이다. 위안부 할머니 9명은 최근 박유하 교수의 이 책을 출판, 판매, 광고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며 서울동부지법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책을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거짓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나 ‘일본군의 협력자’로 매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금했다. 박유하 교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책을 구하는 데 며칠 걸렸다. 대형서점에는 동났단다. 어렵게 책을 구해 단숨에 읽었다. 요점이 분명하고, 문장도 유려해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핵심 주장을 반복해서 오해의 여지도 없다. 일단 박 교수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박유하 교수의 주장

(1) 강제 동원 증거 찾기 어렵다: 국가가 직접 동원한 정신대와 업자가 개입해서 해외 주둔 일본군에 제공한 위안부는 다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관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강제로 동원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2) ‘강간적 매춘’ ‘매춘적 강간’: 업자의 유혹, 기만, 강제로 위안부가 된 이들 중에는 돈벌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가 있다. 실제로 돈을 벌었던 이들은 적었지만, 기본적으로 수입이 있는 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강간적 매춘’ 또는 ‘매춘적 강간’이었다.

(3) ‘제국의 위안부'(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일본인 위안부뿐만 아니라 식민지 출신의 위안부 중에도 ‘일본인’으로서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를 맺은 이들이 있다. 점령국가 국민이 보기에 위안부는 일본군과 한통속이었다. 위안부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위안부’였다.

(4) ‘죄’라고 할 수 있어도 ‘범죄’는 아니다: ‘조선인 위안부’가 겪은 강간이나 가혹한 노동의 책임은 그런 체계를 이용한 일본군과 그것을 묵인한 국가에 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된 행위가 아니었기에 죄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범죄는 아니다. 범죄의 당사자는 폭행을 저질렀던 업자와 군인 개인이다. 그 자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지금 범죄의 책임을 질 상대는 이미 없는 셈이다.

(5) 운동 논리로 접근하니 평화적 해결 어렵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좌익 운동단체는 위안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보다 운동의 논리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일본의 일부 지원단체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정신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우익은 물론 일반 시민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이 때문에 정신대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워졌다.

강덕경 위안부
“내 나이 열여섯. 일본인 선생님의 강요로 가게 된 근로정신대.
고된 노동과 극심한 배고픔에 친구들이 죽거나 미쳐버리던 어느 날.
도망치다 헌병에게 잡혀 그 길로 군 위안부가 되었다오.
서러운 시절, 힘없이 짓밟혔던 우리를 잊지 말아주오.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도록 부디 힘을 모아주오.”
– 고 강덕경(1929년~1997년) 할머니의 글과 그림(“배를 따는 일본군”)

책이 저자 의도를 배반하는 세 가지 이유 

읽어가면서 머리는 맑아졌지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특히 ‘강간적 매춘’ 운운하는 부분에서 숨이 막혔다.

박교수의 확신에 찬 논조와 진정성 있는 표현으로 판단하건대, 그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논지를 주장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논지를 진행하기 전에 자신이 몇 가지 전제에 의존한다는 데 주의했어야 했다. 그 전제들 덕분에 그는 사실과 논지를 따르더라도 (사실은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배반하는 결과에 이른다.

1. 폭력은 때론 동의를 동반하며 간교한 폭력은 더욱 그렇다

첫째, 박 교수는 위안부에 대한 폭행, 감금, 강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또한 자발적 거래와 동지적 연대의 경험도 엄연히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강간과 매춘이 동시에 전개되었다면 위안부 사안을 일면적으로 볼 수 없다는 논지로 진행한다.

안타깝다. 일면적으로 보지 않더라도 폭력의 본성은 같다는 것을 왜 모를까. ‘매춘적 강간’도 강간이고, ‘강간적 매춘’마저 강간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요컨대 박 교수는 폭력은 때로 동의를 동반하며, 특히 간교한 폭력은 동의를 구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이는 단순한 어의론 또는 해석론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순정한 폭력은 자발적 동의와 비굴한 복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활용한다. 그래서 참혹하다.

2. 책임을 규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공유감각’ 특히 정의감이다

둘째, 박 교수는 법적 범죄와 비법적 죄를 구분한 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죄를 문제 삼을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친다. 과연 죄와 범죄를 구분할 수 있긴 하겠다. 박 교수의 주장처럼, 일본군은 범죄를 용인한 죄가 있을지언정 (당대 법과 규범을 기준으로 한) 위법적 행위의 당사자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책임의 귀속성은 죄와 범죄의 구분을 넘어선다. 죄와 범죄를 구분하더라도 책임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책임을 규정하는 것은 당사자의 행위가 아니라 특정 사건을 행위로 인정하는 공동체의 공유감각, 그중에서도 ‘정의감’이기 때문이다. 죄와 범죄를 구분하듯이, 법과 정의를 구분할 수 있다. 법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법’이란 인식이 가능한데, 여기에서 ‘참을 수 없다’는 정서의 근저에 정의감이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당대 식민지에서 불법으로 인정되지 않았을지라도 현대 동북아에서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 일을 드러내서 책임을 묻겠다는 당사자들에 대해 문제의 행위가 당시에는 범죄가 아니었다는 응답은 옹색하다 못해 ‘의심스럽게’ 된다.

위안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정의를”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집회.  2006년 일본. (사진: Korean Resource Center, CC BY ND)

3. 적들은 서로 죽일 뿐, 함께 살고자 하는 이웃만이 책임을 묻고 답한다

적들 간에는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 책임을 전가하고 서로 죽일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책임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 이런 까닭이다.

오직 함께 살겠다고 인정하는 이웃이나 공동체의 경우에만 과거 행위의 책임에 대해 묻고 답하기 시작한다. 화해를 추구하는 이웃은 책임 규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포옹 용서 화해
진실한 화해는 책임을 묻고 답한 뒤, 용서와 포용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 (사진: tim ellis, CC BY NC)

극우의 논리와 정서적 배경을 알게 해준 책

위안부는 동북아 현대사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이 문제를 마주하고 보듬고 정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제국주의 시대에 겪었던 고통만큼이나 참혹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것이다.

예컨대, 이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한, 자발적으로 외국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가혹한 처분을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외국 군대 주둔지에 형성되는 집창촌 문제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위안부 문제가 이런 사안들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면서, 그 연관을 이용해서 문제를 얼버무린다.

결국, 좋은 독서였다. 많이 배웠다. 이른바 극우의 논리와 정서적 배경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수확이다. 박 교수가 2005년 발표한 [화해를 위하여]도 읽고 싶어졌다. 그 책의 논지도 이러했는지, 폭력과 정의에 대해 같은 전제를 숨기고 진행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출판 금지’에 반대하는 이유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의 출판, 판매, 광고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어떤 책이 이런 엄청난 대접을 받을 수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검토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부제는 ‘기억의 투쟁’이란 용어를 담고 있는데, 투쟁이 아닌 논의된 기억, 검토된 기억, 성찰된 기억이 필요하기에 그러하다.

만약 이 책을 더 많은 이들이 읽은 결과, 박유하 교수와 같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그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새로운 형벌이요 비극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럴 기회조차 없애는 세상을 만들고 좋아한다면, 나는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관련 글

7 댓글

  1. 일본이 배정자에게 위안부 동원에 협조하게 한 것은 정말이지 최고의 잔머리였네요
    한국인 조차 저런 해석이 가능하다니..

  2. 비극이 이미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나요? 더구나 그런 입장에 선 사람들이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언론을 거의 독점한 상황인데요?

  3. ‘양공주’ ‘양색시’
    한국인 위안부의 인권 침해로 미국을 규탄해야한다.
    미국은 한국에 사죄도 배상도 실행하지 않는다.
    한국인 위안부의 인권을 지키자!

  4. 제가 읽은 바와는 상당히 다른 독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지적하신 세가지 부분에 대한 반론입니다.

    첫째, 책에서 위안부의 다양한 측면을 지적하는 이유는 각자가 원하는 부분만을 ‘기억’함으로써 일어나는 단
    절을 메우기 위한 것으로, ‘이런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 꼭 위안부의 비참성을 희석시키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고 쓰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폭력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위안부가 (자벌적인)매춘부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쓰인 것입니다.

    둘째, 당시에 범죄가 아니었다고 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90년대의 일본정부도 법적으론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지만 그래도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서 민간기금형태의 보상을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맞는 말씀인데 이게 어떤부분에서 책 내용의 비판과 연결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적이 아니니 대화를 통해 설득해 나가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는게 아닐까요.

  5. 강간적 매춘
    이 무슨말인지 모르겠다. 분명 한국말인데 전혀 단어의 모습이 그려지질 않는다.

    강간과 매춘은 두 가지 다른 상황의 표현이다.
    강간적…이라는 표현의 주체는 가해자 이고
    ‘~적 매춘’ 으로 끝나는 용어의 주체는 ‘성을 파는 여자’ 이다.
    그걸 합쳐 놓으니 상상이 안된다. 그건 이런 표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간 :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
    매춘 : 성을 사는 사람, 파는 사람…이 존재

    강간적 매춘 : 누가 설명 좀…

  6. 책의 내용에 반박을 하고 싶다면 증거를 제시하면 될텐데요. 왜 엉뚱한 동문서답만 늘어 놓으시는 것인지? 현재 한국에서 주장하는 위안부는 완전 허무맹랑하잖아요.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