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왜 서울 한복판에서 할까?

세 가지 의문 

동아일보가 12월 4일에 보도한 이 뉴스에 많은 사람이 분노했습니다. 기사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서울 한복판서 일왕 생일 축하 행사가 열려 논란이 예상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뉴스를 읽고 분노하기에 앞서 몇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동아일보 일왕
동아일보, [단독]서울 한복판서 4일 日王생일 축하행사

  1. 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왜 서울에서 할까?
  2. 어떤 내용의 행사이길래 문제가 되는 걸까?
  3. 이런 행사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왜 가만히 있나?

이제부터 이 세 가지 의문을 한번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의문 1. 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왜 서울에서 할까? 

동아일보 기사에 나온 문제의 행사는 정확히는 「천황 탄생일 축하 리셉션(天皇誕生日祝賀レセプション)」이라는 행사입니다.

이 행사는 전 세계의 일본대사관 주체로 매년 11월~12월에 열립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는 물론 싱가포르나 베트남, 중국 등에서도 열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는 한국(서울)도 포함됩니다. 그럼 대체 왜 일왕 생일 축하 행사를 외국에서 하고 있느냐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전 세계 입헌군주국의 ‘내셔널 데이’ 

전 세계 대부분 국가는 「내셔널 데이(National Day)」라는 게 있습니다. 이걸 한국말로 바꿔보자면 「국가의 날」 정도 되겠습니다. 국가의 날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날을 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나라는 독립기념일이나 정부수립일, 혁명기념일 등을 내셔널 데이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경우는 보통 국왕의 생일이나, 그 생일 전후의 특정한 하루를 내셔널 데이로 정합니다.

  • 영국은 여왕 공식 탄생일(‘Queen’s Official Birthday’)을 영국의 내셔널 데이(British National Day)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6월 두 번째 토요일 혹은 세 번째 토요일입니다.
  • 네덜란드는 전여왕인 율리아나 여왕의 생일인 4월 30일(여왕의 날)을 내셔널 데이로 정했습니다.
  • 덴마크 역시 여왕의 생일인 4월 16일을 내셔널 데이로 정했습니다.
  • 태국 역시 푸미폰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이 내셔널 데이입니다.
  • 룩셈부르크의 경우도 룩셈부르크 대공의 생일인 6월 23일이 내셔널 데이입니다.
  • 물론 한국에도 공식적으로 내셔널 데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천절」이라는 날입니다.

대부분 국가는 해외 공관에서 자국의 내셔널 데이에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내셔널 데이 행사를 엽니다. 이것은 해외공관의 아주 중요한 업무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한국도 이러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내셔널 데이 

그런데 일본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정한 내셔널 데이가 없습니다. 일본에도 「건국기념일(2월11일)」은 존재하는데, 이것은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무천황이 즉위했다고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그냥 건국기념일일 뿐이지「내셔널 데이」는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 패전 이전까지 내셔널 데이는 국왕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 전에는 쇼와덴노의 생일이었던 4월 29일이 내셔널 데이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에 패하면서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행사는 일시적으로 금기시됩니다.

그러다가 1952년 외무성 차관회의에서 외국공관에서 내셔널 데이를 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관습적으로 지켜오던 국왕의 생일인 4월 29일을 내셔널 데이로 정하게 됩니다.

일본에서도 논쟁이 치열했던 ‘국가의 날’ 

국가의 날을 예전처럼 국왕의 생일로 하느냐, 건국기념일인 2월 11일을 국가의 날로 정하느냐, 아니면 별도 기념일을 따로 만드느냐는 일본 내에서도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다만, 관습적으로 국왕 생일을 국가의 날로 지켜왔으니 외무성에서는 그 전통을 따를 뿐입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법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현재 일본의 해외공관에서는 내셔널 데이 행사를 국왕의 생일을 사전에 축하하는 형태로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날은 국경일도 아니며, 특별한 이름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날이 현재 일왕의 생일인 것도 아닙니다(일왕의 생일은 12월 23일). 단지 이날에 치르는 행사에 「천황탄생일 축하 리셉션(天皇誕生日祝賀レセプション)」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 뿐입니다.

문제의 행사는 우리나라로 치면 ‘개천절’ 기념식 

그러니까, 문제의 행사는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해외 공관에서 치러지는 「개천절 기념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일본대사관들은 이날에 현지의 일본인을 초대하고, 그 나라 주요 인물들에게 초대장을 보냅니다.

행사 취지도 공관이 주재해 있는 국가와의 친선과 화합입니다. 예를 들면 2010년 행사 당시 무토 마사토시 주한일본대사의 축사 내용도 당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을 맹비난하면서 한미일 삼국이 힘을 합쳐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천황’ = 식민지 = 침략전쟁 

이러한 취지의 행사인데, 한국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목적의 행사에 「천황 탄생일 축하」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에 큰 위화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에게 「천황」이란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니까요.

이 행사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온도 차는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문 2. 어떤 내용의 행사이길래 문제일까? 

그럼 도대체 「천황 탄생일 축하 리셉션」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걸까요? 매우 궁금한데, 거기에 대해서는 그냥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天皇誕生日祝賀レセプション」를 검색해보면 많은 행사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천왕 관련

현지 공관의 일본 대사나 영사가 나와서 인사말하고, 현지 일본인들과 기업인이나 정치가, 외교관 등을 불러서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행사입니다. 그리고 행사장에는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나 기업들에서 부스를 열어서 특산품이나 공산품을 홍보합니다. 공관이 아닌 호텔의 홀 같은 큰 장소를 빌려서 개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밀라노 총영사관에서 발행한 공문 

이러한 행사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은 매우 많은데, 그중에 밀라노 총영사관에서 발행한 공문의 내용을 들여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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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9월23일에 밀라노 일본총영사관에서 발행한 공문

우선 이 공문의 도입부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 재외공관에서 매년 11월~12월에 개최하고 있는 천황탄생일 축하 리셉션은 관민연계강화의 일환으로서, 회장의 일부 일본 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홍보 부스를 설치하는 등, 일본의 매력을 발산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당관에서는 올해 12월에 예정된 본건 리셉션에 대하여, 이러한 일본의 매력을 발산하는 활동의 가능성을 검토해주시길, 이하와 같이 안내해드리오니 상공회원 여러분께서는 부디 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내용의 공문을 국가별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재한일본대사관이나 SJC클럽(재한일본상공회의소에 해당하는 곳)에서는 관련 정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문제가 되어 게재하지 않았거나 삭제를 했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중국에서도 열리는 천황탄생일 축하 리셉션

이 천황탄생일 축하 리셉션은 중국에서도 각 지역 공관이 있는 곳마다 열리고 있고, 그 내용이 중국 내 언론에 아무렇지도 않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딱히 여기에 대한 반일 여론을 조성할만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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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개최된 천황탄생일 축하 리셉션 행사장 모습. 대량으로 만들어 놓은 스시 접시들이 인상적입니다.

의문 3. 이런 행사를 하는데 우리 정부는 왜 가만히 있나?

그러면 매년 열리고 있는 이 행사에 대해서 우리 정부는 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일까요?

입헌군주제 국가들 모두 제재? 중지할 명분 없어

일본의 행사를 제재하려면 입헌군주제 국가들의 공관에서 열리는 비슷한 종류의 내셔널 데이 행사를 모두 제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국가는 모두 여왕의 생일이 내셔널 데이이고, 당연히 이날의 행사를 여왕탄생일 명목으로 열고 있습니다. 똑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일본이라고 해서 이러한 행사를 열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행사가 딱히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행사도 아니고, 대한민국에 어떤 외교적 위협을 가하기 위한 것도 아닌 이상 중지시킬 명분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 행사에 특정한 압력을 가할 경우에 외교문제로 비화할 위험성만 커집니다.

결.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

우리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일본 관련 이슈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흥분과 분노 

쉽게 흥분하고, 쉽게 선동되고, 쉽게 분노합니다. 한국에서는 매년 이 행사가 열릴 때마다 비슷한 기사가 언론을 통해 발표되고 있습니다.

과거 기사를 찾아보면 거의 매년 이 행사에 대한 비판이 담긴 기사를 발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0년 행사에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이 참석하면서 크게 기사가 났습니다. 이상득 의원 이외에도 박종근 전 의원, 김태환 의원,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참석한 이유는 이들 모두가 당시 ‘한일의원연맹’이라는 단체 소속으로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링크한 2010년 뷰스앤뉴스 기사에도 자세히 나옵니다.

일본대사관 측 항의 보도한 마이니치 신문 

이번 동아일보 보도에 대해 일본대사관 측은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이에 관한 마이니치 신문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한일본대사관의 천황 탄생일 축하 리셉션을 둘러싸고 한국의 메이저 신문인 동아일보는 4일 자 조간에서 「지금까지 일왕(천황) 탄생일 축하 파티가 열릴 때마다 논쟁이 일어났다」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서, 사토 마사루 주한홍보문화원장은 같은 날 동아일보의 김차수 편집국장에게 「한일관계의 개선에 찬물을 끼얹는 기사로서 리셉션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항의하였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김국장은 「한일관계는 우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대로 철저하게 취재하겠다」고 답했다.

– 한국: 일본대사관의 천황 탄생일 축하 리셉션에 비판 기사  (2014년 12월 4일 자. 마이니치신문)

더불어 마이니치 신문은 “7월의 자위대 창설기념일 리셉션 때에도 비슷한 보도를 하여 리셉션 회장이 변경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축하 리셉션은 4일 서울 시내의 호텔에서 예정대로 열렸으며, 각국 외교관 등 약 800명이 출석했다.” 전했습니다.

한국 여론 눈치 보는 일본 대사관 

한국에서 열리는 천황 탄생일 축하 리셉션은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행사와는 달리 철통 같은 경비를 세우고, 행사 개최에 대해서도 딱히 홍보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올해는 구설에 오르는 것을 피하려고 매년 행사가 열리던 소공동 롯데호텔이 아닌 남산의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개최했습니다. 그렇게 치러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 대사관도 한국 내에서의 여론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기사에도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일본대사관은 그간 한국 내 여론을 감안해 기념행사를 조용히 열어왔다.”

선악 구도 벗어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일본공관에서 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선악(善悪)의 관점에 대입해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이제 조금은 그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언론에서도 이런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는 조금은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행사가 왜 한국에서 열리는지, 왜 매년 열릴 때마다 논란이 되었는지, 그런데도 왜 우리 정부는 특별히 제재를 안 하는지 등에 관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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