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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이상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아가고자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지표는 더 나은 내일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건, 본인으로서 바라는 내일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트위터에는 ‘정병러’가 있습니다. 그렇게 불리거나 또 자기 자신을 그렇게 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정병러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트위터 사용자들을 지칭한 용어입니다. 그 숫자도 상당하고, 그들의 활동이나 교류도 활발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병과 치료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거나 그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에 관한 이야기하며, 또 자신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많지는 않지만, 모임을 만들어 서로와 교류하기도 하죠.

트위터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고, 정병러는 그들 중에서도 관심도와 활동성이 높으며 자주 회자되는 부류에 속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병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정보를 교류하고, 현재 상태에서 더 편안한 생활을 위한 치료법을 찾거나, 질환자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자신을 지키거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거나 신뢰할 수 있는 상담소나 병원을 찾도록 돕기도 합니다. 서로 위안과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말입니다.

악수 협력

집단으로 칭해지고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구속하거나 같은 색을 가지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상을 강제하는 경우도 존재하고, 서로를 공격하는 일도 자주 발생하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각자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트위터를 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정신질환자의 존재와 고충, 그리고 어디서든 존재하는 그들이 내 옆이거나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과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방법의 문제이거나 지식의 부재, 혹은 ‘당사자가 아님에도 당사자임을 자칭’하는 것에서부터 출발 할 수 있습니다. 익명성은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폭력성과 타인과의 단절, 상대방에 대한 불신, 그런 점을 이용하고 즐기는 이들 또한 던져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진실을 판별하기도 어렵게 했죠. 저는 그러한 점들로 인해 나타나는, 정병러라 칭하는 이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정신질환인으로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자가진단 정병러들 

‘정병러가 뭘 말하는 거죠?’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이런 질문이 올라온 것을 본적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댓글로 올라온 것은 ‘정신질환을 코스프레[footnote]코스튬 플레이의 준말로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을 흉내내어 꾸미거나 행동하는 것을 뜻하며, 이 경우 정신질환자를 흉내내거나 그런 척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footnote]하는 이들’이라고 일축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진짜 정신질환인인 정병러는 없다는 섣부른 일반화에서 비롯된 말이기에 쉽게 긍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동시에 상당수 정병러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다수 정병러는 자신을 정체화하며 그것을 자신으로 지칭하는 것을 자연스러워 합니다. 그것은 본디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은 칭호이며, 자기 자신을 규정할 권리를 자신의 손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말 그자체로서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을 정체화하는 과정과 그 결과가 미치는 여파가 문제인데, 그들은 한정된 정보와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거나 상대방을 정체화합니다. 규정짓습니다. 이는 큰 오류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를테면 한때 유행했던 ‘싸이코패스 자가진단’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는 행동관찰과 상담, 문서테스트등의 복합적인 판단을 요구하며,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자가진단서로 나돌아 다니는 문서들은 어떤가 들여다보면, 간단한 몇 문항만으로 그것을 판가름하고 있습니다.

'정병러'에 관한 트위터에서의 논의들.
‘정병러’에 관한 트위터에서의 논의. 소위 ‘자가진단 정병러’에 대한 비판적인 해시태그 모음.

전문가도 아니고,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 화하는 것도 어려우면서, 그토록 부실한 몇 개의 문장으로 정의질환이 정확할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러한 것으로 진단된 질환은 실체하는 무언가라 판단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허구이며, 몽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도 할 수 없는 일이며 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은, 비단 반사회적 인격 장애만이 아니라 아스퍼거증후군이라든가 조현증, 다중해리성 인격장애등의 다양한 질환의 자가판단으로 이어집니다. 자가진단지만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라며 판단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병러는 정신질환이 필수 요소로서 적용되는데, 그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정병러라 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러 존재하는 그런 자가진단 정병러들의 경우, 간단한 상담이나 우울증 치료를 받다가 중단한 경우, 아니면 그저 스스로 판단한 경우, 다른 정병러의 이야기로 판단한 경우들입니다.  정신질환은 기본적으로 의료기관의 판단, 축적되어온 정신과적 지식의 규칙 위에서 정해집니다. 정신질환자라 칭해지는 것은 그들의 판단, 즉, ‘전문가’라 불리는 이들, ‘타인’에 의해 붙여지는 이름입니다.

의사

기준 요소를 충족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만한 의학적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고, 질환의 특성상 자가 판단의 객관성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예를 들면,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조현병과 조현정동장애의 구분, 정동장애와 분열 정동장애의 구분은 쉽지 않으며, 공유하는 증상의 존재로 인해 같은 질환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정신과에서의 질환은 세세하게 나눠지고, 제시된 치료법과 사용되는 약의 성분과 갯수, 용량, 투약 횟수, 추정 원인 등이 다릅니다.

더욱이 전문가들이 오판하는 경우도 있는 시점에서, 객관성이 의심되는 자가 판단이 얼마나 정확할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전문가인 타인’이 칭하는 이름을 사용하려면, 그들의 진단을 받는 것이 정확하고, 신뢰도와 정확성이 높습니다. 애초에 그 이름은 그들의 룰 위에서 정해진 이름이니, 그 규칙에 따르려면 자신이 그만한, 그러니까 그들의 체계에 합당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로 입증 하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입증할 자신이 없다면, 전문가의 진단 후에 칭하시거나, 정병러나 정신질환자가 아닌 이름으로 칭하셔야 옳습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그를 공부하고 노력한 전문가와 그들의 진단을 받고 질환과 함께 하는 이들에 대한 무시이자 모욕이며, 또 다른 왜곡된 정보의 재생산입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슬픔

불행을 전시하며, 나아가길 거부하고 자기 파괴적인 감정을 지속하고 그로 인해 그 감정을 전달하는 정병러들이 존재합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되고, 슬픔을 이야기함으로서 해결되기도 하고, 응원을 통해 힘을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다른 이들의 감정을 자극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끌어낼 수도 있겠지요. 함께 나아가고 싶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정병러의 경우 대다수가 자기 파괴적 감정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아보였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타인의 슬픔’을 더해 자신의 슬픔을 눈덩이처럼 크게 부풀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견뎌내지 못하고 더 밑바닥으로 추락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일반적이라면 타인과 선을 긋고, 남의 일로 여겨 자신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공감하려 노력하는 정도로 끝이 납니다.

장기간이 아니라면 그 감정들은 충분히 견뎌낼 여지가 있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에는 ‘나도 그래’라고 자신의 일과 동질감을 느껴 그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같은 정병러라는 동질감이, 자신의 경험들 속의 비슷한 것들을 생각지도 못하게 떠오르는 게 만드는 것이죠. 특수한 경우에는 있지도 않은 기억이 날조되어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 기억을 스스로 진실로 믿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되면 먼저 들었던 이야기들로 더 아프게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슬픔 눈물

그들은 이미 슬픔에 젖어있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을 시도했던 전적이 있거나 진행 중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게시하며 자해 방법이나 자살 방법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삶의 기력이 밑바닥으로 추락한 이들은 에너지가 없습니다. 연료등이 들어온 자동차처럼 언제 멈출지 모르는 상태라는 겁니다. 지치고 무기력해진 그들은, 치료를 진행할 힘도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자극들은 큰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병러가 아닌, 트위터를 하지 않는 질환자들도 포함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은 개방돼 있고, 얼마든지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다양한 검색 경로를 통해 트위터의 정병러 이야기를 보게 된 이들에게 그들의 글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우울은 퍼져나갑니다. 우울한 자들끼리 모이면 회복보다는 우울의 증폭이 더 많은 경우로 보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더욱 더.

왜 정병러는 철학자이고, 시인이며, 천재이어야 합니까? 

그리고 그들을 통해 그것이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 우울증은 가속화되고, 그것을 정병러들은 현학적인 이야기들로 풀어내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그 현학적인 이야기가 희화화되기에 충분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제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정신질환자는 철학적이거나 예술적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나 천재가,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을 앓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진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이 존재함에도 그것이 당연한 법칙인 듯 무의식적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고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연중에, 무의식중에.

그래서 정병러들이 그에 대한 압박이나 그래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정병러인 척 하기위해 그것을 이용할 것이라 여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글은 의도하지 않은 비문이 넘쳐나거나, 다양한 변수를 무시하고 뛰어넘은 비약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공허한 모호함을 담고 있습니다. 무질서한 이야기들입니다.

현학적일지도 몰라 보이는 단어들의 나열은, 유치하거나,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허무한 말뿐인 경우도 있으며, 그렇다면 문학적인 아름다움이라도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들도 많이 보입니다. 이는 인문학에 대한, 문학에 대한 편견도 한몫하고 있다 여기지만. 이에 대해서는 글에 취지에 맞지 않아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출처: Erich Stüssi, BY SA) https://flic.kr/p/Cvsam
Erich Stüssi, BY SA

어쩌면 그들의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저의 문제나 지금 이 시대의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떠나 사회의식에 반영된 결과로 보면, 현 시대의 정신질환자들의 편견을 증가시키고, 희화화하는 요소로 작용함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들은 무언가를 흉내내거나, 사유하지도 않고 사유를 입에 담습니다.  혹은 너무도 부끄러울 만큼 얕은 사유가 세상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도 보입니다.

물론 그것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미숙함이라 이야기해도 좋고, 독특하다 이야기해도 좋지만, 생각을 자유롭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이 혐오의 발언을 했다면 막아야하지만, 그들이 무언가 생각하며, 그들 나름의 멋을 찾는 것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병러들의 반복적으로 다수보이는 그러한 행동들은, 정신질환자에 대한 획일적 규정에 대한 찬동이자 재생산을 자기 손으로 한다는 것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하지만, 특별하지않습니다. 우리는 우월하지 않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왜 사유에 잠긴 철학자여야하고, 시인이어야하며, 천재여야만 하는 겁니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타인과 섞일 수 없는 ‘나’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 쓸쓸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아니, 당신 홀로는 그러해도 상관없을지라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은 질환자들에게 그 돌이 날아가게 만들지는 말아야합니다.

정신질환을 방패막이로 쓰는 정병러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저는 제가 생각하고 중요하다 여기는 이야기를 할 것이고, 이번이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바라보는 부분입니다.

정신질환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정병러들이 존재합니다. 감정장애가 있어 상대방을 공격했다며 그를 이해해주기를 강조하고, 그를 거부한 상대에게 정신질환자 혐오의 굴레를 직·간접적으로 씌우려 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좀 더 나아간 이야기지만, 제가 아는 정신질환 당사자 운동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사자들는 대부분 착해요. 너무 바보같이. 착해빠졌죠. 그래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어요, 분명히. 범죄자는 범죄자. 질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실제로 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다른 질환자들은 바보에요? 그냥 범죄를 저지른 놈이 바보에 나쁜놈인 거에요.”

실제로 범죄와 정신질환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 결과가 상당수 존재합니다. 질환자의 우범률이 높지 않다는 통계는 유명하죠. 실질적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은 가해자가 아닌 폭력 등의 피해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니, 정병러, 그들이 하는 말이 맞는다고 치죠. 질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럼 증상을 객관화하고, 그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할 수 있고 당신은 할 수 없다는 걸까요?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힘들어도 상관없을 사람이며 당신의 질환이 더 무겁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누구도 더 중하지않고,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정신질환을
정신질환을 방패막이로 써선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줄 이유는 없습니다.

질환의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특히나 정신질환 중에서도 조현증은 정말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정병러들이 주로 말하는 감정 장애 류의 질환이 타인을 공격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게 계기는 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죠. 제가 만난 당사자들과 당사자 운동가들은 그들을 스스로 ‘사람’이라 말합니다. 당신들이 ‘정상’이라고, 타인이 붙여준 질환의 굴레에 묶여있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았던 다수의 정병러들은 스스로 굴레에 묶여있길 바랍니다. 배려를 바란다면서 본인은 ‘할 수 없는 것’이라 단언합니다. 그래요, 질환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힘들 수는 있겠죠. 그럴 수도 있어요, 저도 그런 경우를 모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요? 당신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줄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당신 질환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은 사람이, 당신의 공격을 받을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안에 숨지 마세요.
그 이름 안에 변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저 솔직하게 사과하고, 그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살아가세요.
당신을 ‘배려’할 수는 있을지라도 당신에게 ‘섬길’이유는 없습니다.

우린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면 사회 구조에 희생당하고 있다면 그 구조를, 시스템을 부수어 우릴 ‘같은 사람’으로서 살 수 있게 하면 됩니다. 개개인의 의식을 변하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냥 기분이 불쾌하다며 언어적 공격을 하고, 화내고, 또 그걸 질환의 핑계로 도망치고…….

더는 타인에게 ‘차별’이란 이름의 굴레를 남발하며 씌우지 말아주세요. 그건 그렇지 않은 수많은 당사자들의 나쁜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그렇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 모욕을 선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정합니다. 목표를 정하고 꿈을 꾸죠. 이상향이 있죠.

정병러라는 이상향은 과연 자신들이 바라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까요? 그들이 바라는 것이, 사회의 부정적 시선이 없는 것, 자신의 괴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것이라면, 이제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의 익명성이 어려울 질환의 이야기를 마음껏 하게 했고, 좀 더 마음 편하게 병원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죠. 혼자 끙끙 알며 병원이나 상담소로 걸어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조언과 힘도 많이 줄 수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힘을 얻고 당당히 목소리도 얻을 수 있게 했습니다.

포옹 사람 포용 용서 허깅 화해

그래요, 그들의 긍정적인 면은 분명 있습니다. 단지 불투명하고 불안함을 가진 정보들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서 제대로 된 정보의 구분이 어려워지고 그로인해 장점이 가려지고 있다는 점만 빼면 말입니다.

질환은 질환이지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닙니다. 우린 그저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우린 희화화되거나, 캐릭터로서 사용되어도 좋을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나이를 떠나 대다수 질환자들에게는 트위터의 속도는 너무 빠르고 자극적이어서 사용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하며, 그나마 페이스북은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일 뿐.

글을 쓰기위해 몇 일을 트위터를 들여다본 저도, 너무 힘들어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느끼기까지 했었습니다. 그 자극들을 버텨내기엔 우리에게 그곳은 너무 끔찍합니다. 활동할 수 있는 분들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멋대로 증상을 올리기를 꺼려하고, 증상을 말할 때 모호함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정병러 중에서는 구체적으로 증상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심지어 내세운 질환과는 다른 질환을 떠올릴 증상들을 나열하기도 합니다. 이들 중 얼마나 정말 질환을 앓고 있는 지, 저는 개인적으로 무수한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그저 캐릭터성으로 자신에게 질환을 덧붙이는 것이라면, 그만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질환자들에게 던져질 돌을 그만 내려놓아주세요.

우린,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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