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 ]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상헌 박사의 ‘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box]
“제 아버지를 잘 아는 아이는 현명하다”
영국 속담이다. 교육감에 출마한 아버지들에 대해 쓴 아이들의 편지 두 편을 읽는다. 이 아이들은 현명하다. 놀라우리만큼 담담하다.
하나는 한글로, 다른 하나는 영어로 쓰였지만, 둘 다 여러 번 읽고 고친 흔적이 역력하다. 눈물의 흔적도 보인다. 게다가 두 편지의 구조도 놀라울 만큼 닮았다. 하지만 하나는 사랑의 편지고, 다른 하나는 증오의 편지다.
교육감 후보 자녀의 편지
두 편지 모두, 마지막 두 번째 문단에서, 선거에 나선 아버지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린다.
한 편지.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시면서, 아버지는 “진심 교육감”, “교육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당찬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후보자의 높은 도덕성과 청렴함을 전제로 해야만 하는 이러한 구호를 감히 내걸었다는 사실 자체가, 조희연이라는 개인이 지닌 진정성이 그만큼 흠잡을 데 없다는 점을 반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바라봐온 저 또한 아버지가 한 점의 부끄러움 없는 사람임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As a child he neither educated nor rarely even spoke to, I must inform the citizens of Seoul that he does not qualify for this position. If the role of a superintendent of education is to look after the educational policies and systems of a city, Seung Duk Koh is a stranger to this role. How can he act as the leader of education for a city when he is unwilling to teach his own flesh and blood?”
고승덕 씨가 교육하기는커녕 거의 말도 걸어주지 않았던 자녀의 입장에서 저는 서울 시민들에게 그가 서울시 교육감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교육감의 역할이 서울의 교육정책과 시스템을 책임지는 일일진대, 그는 그런 역할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자기 혈육도 가르치지 않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한 도시의 교육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번역: 김성우)
두 번째 편지를 영어 원문으로 먼저 옮겨 둔 까닭은, 이것이 그 아이가 말한 방식이었고, 게다가 이것은 한글로 잘 전달되지 않는, 고발장이기 때문이다. 법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아이가 제 아버지를 마치 법정에서 고발하듯이 울부짖고 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처럼 서늘하다. 그래도, 이 글로 가장 아픈 사람은 바로 이 아이일 것이다. 아비는 아직 분노할 뿐이다.
다시, 원점으로: 아비의 죄가 아이에게, 아이의 분노가 어른에게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속담을 뒤집어 이렇게 말했나 보다.
“아이들을 잘 아는 아버지가 현명하다.”
하나 더 있다. 현명하지 못한 아버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아버지의 죄는 아이들에게 떠넘겨진다”고 했다. 과연 그렇다. 허나, 그가 모른 게 한가지 있다. 아이들에게 떠넘겨진 죄는 오랫동안 그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가, 다시 그 아비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그 순간, 아버지와 딸의 생물학적 관계는 사라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객지 생활하는 내게 지방선거에 관한 투표권은 없지만, 교육감 선거에 관심이 간 이유는 세월호 때문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게 세월호 참사다. 죽어가면서도 아이들이 부모에게 남긴 사랑한다는 쪽지는, 그래서, 우리를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어른들의 위기다.
다시, 희망을 찾다
그런데 조희연 후보 아들이 제 아비를 위해 쓴 편지를 보고, 사실 희망을 찾았다. 조희연 특정인의 당선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래도 아이들 눈에 괜찮아 보이는 어른들이 있다는 게, 나 같은 아비에게 오히려 큰 위안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더 흥분했다. 아비들은 잘 안다. 제 자식들로부터 진심 어린 존경과 신뢰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린 모두 조희연이고 싶었던 것이다.
고승덕 후보의 딸 편지는 제 아비가 사는 세상에 대한 고발장이다. 이 편지를 두고 공작설이 있는지, 문 후보 쪽에서 이용한 건지, 여차여차한 ‘제 아비 세상’의 얘기는 그 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였을 뿐, 이를 두고 벌이는 ‘어른 세상’의 난투까지 그녀에게 책임지울 순 없다. 이 두 가지를 묶어 버린 순간, 우리에겐 숨 쉴 공간도 없어진다.
다시, 돌아온 세월호의 바닷가
딸의 아비는 여전히 그 세상의 언어로 답했다.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이고, 딸과의 ‘내밀한’ 카톡도 공개했다. 세상의 아비들 중 이런 류의 피해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연 많은 아비들이 무수하다. 그렇다고, 그게 아비가 아비 역할을 못 한 데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니다. 아이 얼굴 한번 보겠다고 숱한 구박을 당하는 아비들은 삼류영화의 소재만은 아니다.
이 딸의 아비는, 자신을 세상에 고발한 딸에게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 오로지 딸에게만 보내는, 다소 구차하더라도 용서를 구하는, 회한의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 더 이상 토를 달지 말았어야 했다.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어쩌면 마지막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자회견을 했고, 보도자료를 돌렸다.
하루키가 그랬던가? 겉모습에 속지 마라.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이다. 이제 다시 우리는 세월호의 바닷가로 돌아왔다.
선거결과가 어떻든, 이 선거의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졌다.
달리기하는 사람은 주변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하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산책하는 사람은 주변의 소리를 듣습니다. 새소리, 바람소리, 사람의 소리.
풍경을 보면서 갑니다. 하늘의 색을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나무와 풀의 변화를 보면서 계절을 느끼고 마음으로 담습니다.
또 함께 걷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같이 걸어가며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가다가 힘이들면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캔디고의 편지를 보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너무나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냉철함은 공공성에 맞춰져 있습니다.
한 가정의 아비를 떠나 사람을 살피고 함께하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제 선거가 끝나고 하루 이틀이 지나감에 따라 조금씩 들려오고 보이겠죠.
우리는 느리게 걷더라고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느린 것 같아도 결코 늦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길은 원래 없었기 때문입니다.
“걸으면 길이 됩니다.”
저도 캔디고 글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짊이 되어 자유롭지 못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