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자신이 믿는 생각을 위해 기억조차 ‘재구성’한다. 심지어 자신이 목격한 것이라 해도 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것을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액면 그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느끼게 된다
단재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 서문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영국에 한 역사학자가 있었는데 어쩌다가 런던탑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어느 날 밤 런던탑 아래서 두 사람이 한참을 옥신각신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직업의식이 발동한 이 역사학자는 이들이 왜 싸우는지 어떻게 싸우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그런데 다음날이 돼 사람들이 그 싸움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자신이 기록한 내용과 전혀 달랐다고 한다.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그것이 역사기록이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 기록하는 역사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져 버린다.
‘역사란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이건 사실 역사학자들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그래도 20세기 후반 들어 역사철학 수준이 높아지면서 역사학자들은 그런 고민에 더는 빠지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됐다. 바로, ‘무엇이 역사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이다(여기를 참조). 그리고 ‘객관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정성’이라는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요는, 객관성이라는 함정을 벗어나야만 더 큰 진실을 직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언론인들이 ‘사실’보다 ‘진실’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했던 말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상황이 달라지고 처지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없는 사실을 들이대면 그건 공정성에도 어긋나고 ‘진실’과도 정반대에 있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NLL ‘괴담’이 바로 그런 경우다. (NLL: Northern Limit Line의 약자. 1953년 7월 27일 남북간 육상경계선을 설정한 정전협정 직후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북한과 협의 없이 설정해 북한에 통보한 해상 한계선으로 (특히 한국 서해의) 북방 한계선을 가리킨다. )
논의 전개를 위해 먼저 최근 ‘NLL괴담’의 형성과 유포 과정을 되짚어보자. 새누리당 의원 정문헌이 10월 8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에 대해 주장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비밀녹취대화록을 비선을 통해 확인했다”고 말하면서 NLL 괴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이재정), 국정원장(김만복) 등이 즉각 비밀녹취록 같은 건 없다고 반박하면서 정문헌 의원이 봤다는 녹취록의 실체를 먼저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정문헌은 녹취록에서 대화록으로 표현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날 이때껏 대화록에 대해 아무런 후속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그러고는 노무현이 퇴임 직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민감한 문건들을 폐기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이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통령기록관으로 넘겨줘야 할 기록 중 상당수를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만들어 목록까지도 공개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며 그 과정에서 목록 삭제와 기록 폐기를 지시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정권 영토포기 및 역사폐기 진상조사 특위’를 구성했다. 한국일보 10월 25일자 보도를 보면 현직 통일부장관인 류우익은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면합의는 있지 않다.” “비밀대화록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인사가 한 명 있다. 바로 2007년 정상회담 당시 국방장관을 지냈고 2008년 비례대표로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됐던 김장수다. 그는 최근 NLL 관련 진상조사특위에 부위원장이 됐다. 김장수는 최근 2007년 당시를 회상하면서 NLL 문제와 관련해 자신이 정부 논의과정에서 배제된 것인 양 얘기했다. 그는 동아일보 전화인터뷰(10월 24일자)에서도 “그동안 노 전 대통령의 좌우맥락을 살펴보면 개연성은 있다. 실제 발언 여부를 알기 위해서 대화록을 공개하거나 열람하자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2008년에 나온 그에 관한 기사에선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온다.
2008년 3월에 대표적인 인터넷 보수매체라고 할 수 있는 데일리안은 ‘공관 내주고 전세 얻은 ’꼿꼿장관‘ 김장수’라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여기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김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에 가서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앞에 꼿꼿이 서 악수하면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꼿꼿장수´라는 별칭과 함께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재임기간 그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으며 그가 평양 국방장관 회담을 떠나기 전,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좋으니 NLL문제는 장관 뜻대로 하시라”는 노 전 대통령의 백지위임을 받아낸 사실은 회자되는 일화다.(출처는 여기)
이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NLL과 관련해 백지위임을 받아냈다면 정상회담과정에서 NLL 문제는 강경입장이던 국방부 뜻대로 논의됐다는 걸 뜻한다. 그럼 최근 일부 매체에서 의혹을 제기한 NLL 포기발언의 진원지가 사실은 국방부란 뜻이라도 되는 걸까? (발화점은 여기)
사실 그가 남북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도 최근 언행과 괴리가 있다. 최근 동아일보 보도(10월 24일자)에 따르면 그는 10.4선언 다음날인 10월 5일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NLL을 끝까지 지킨 것이 이번 회담의 군사 분야 성과”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도 “정상회담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노 대통령이 회담을 마치고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본 NLL의 성격, 인식을 자세히 설명해 김 위원장도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고 했다.”면서 “노 대통령이 충분히 우리 국민의 뜻을 이해를 시켰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장수는 김정일 앞에서는 꼿꼿했다. 하지만 정파 이해관계 앞에서는 전혀 꼿꼿하지 않다. 그는 지금 국익(國益)이 아니라 당익(黨益)을 수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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