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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판결문은 잘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합니다. 교양 있는 보통 사람에게도 ‘암호문’에 가까운 판결문. 슬로우뉴스가 주요 사건에 관한 판결문을 쉽게 풀어 읽어드립니다. 그래도 어렵다고요? 어떤 문장, 어떤 표현이 어려운지 현명한 독자의 ‘지적질’ 부탁합니다. (편집자) [/box]

이 글에서 살펴 볼 사건은 ‘지만원 vs. 5.18 유공자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판결문 읽기에 앞서

아주 간단한 사건입니다. 지만원 씨는 우리나라의 잘 알려진 극우 논객입니다. 지만원 씨는 5.18 민주화운동에 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고, 북한이 개입한 폭동이라는 주장이 담긴 게시물을 온라인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이에 5.18 유공자 등은 지만원 씨 주장이 사실적 진술로서 5.18 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반발했습니다. 검사는 지만원을 벌줘야 한다고 정식으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지만원 씨의 행위를 결국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일단 문답으로 이 사건 판결 이후의 풍문들을 정리해볼까요? 질문 나갑니다.

문 1. 지만원 씨는 명예훼손 행위를 했습니까? (네) 
답: 지만원 씨는 온라인 게시물을 통해 5.18 유공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하긴 했습니다.

문 2. 장난하세요? 명예훼손죄가 아니라면서요. 무죄라고 했잖아요? (설명 필요)
답: 지만원 씨의 행위 자체는 명예훼손의 ‘행위’에 해당하더라도 형법적으로 바로 ‘죄’가 성립하는 건 아닙니다. 지만원 씨가 5.18 유공자들 가운데 한두 명 또는 개개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발언을 공공연히 했다면 지만원 씨의 행위는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았을 겁니다. 또 가정이긴 하지만 5.18 유공자들의 수가 아주 적었다면 지만원 씨 행위는 역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았을 겁니다. 즉, 지만원 씨의 행위 자체는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이지만, 그 대상인 5.18 유공자들이 너무 많아서 명예훼손”죄”가 성립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성립 여부가 쟁점)

지만원 씨가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법원이 지만원 씨의 주장처럼 5.18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으로 인정했다는 둥, 5.18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부정했다는 둥, 5.18은 북한 소행이 맞다는 둥 엉뚱한 주장들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무지의 소산이거나 사실을 알면서 왜곡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경우라면 사실을 제대로 알고 바로 잡으면 됩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왜곡하는 경우라면…… 네, 그렇습니다.

문 3. 어쨌든 법원은 지만원이 무죄라고 했으니 5.18 민주화운동 역시 지만원의 주장대로 DJ의 내란과 북한 소행이라고 인정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답: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법원은 오히려 5.18 민주화운동을 법적, 역사적 평가가 끝난(게임 오버!) 우리사회의 상식으로 자리잡은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5.18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이라거나 북한 소행이라고 하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민주화운동’으로서의 역사성, 정당성을 당연하게 긍정하는 것이죠.

잘 몰라서, 그러니 무식해서 5.18을 김대중 내란이라거나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어떤 분야에 관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교수님도 자기 분야 외에선 무식할 수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알면서도 5.18을 북한 소행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 사회의 상식과 역사성, 그리고 정당성을 부정하는 몰상식한 시민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지만원 게시물은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너무 많아서(특정할 수 없어서) 죄가 성립하지 않을 뿐이다.
지만원 게시물은 명예훼손 행위에 해당한다. 하지만 피해자가 너무 많아서(특정할 수 없어서) 죄가 성립하지 않을 뿐이다.

각설하고, 판결문을 최대한 쉽게 정리해보겠습니다.

판결문 읽기

1. 지만원이 한 행위 = 명예훼손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검사는 지만원이 자신의 사이트에 올린 게시물(이하 ‘지만원 게시물’)로 인하여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들’과 당시 사망한 피해자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공소를 제기했다. (= 지만원을 벌줘야 한다고 판단했다)

지만원 게시물에는 직접 피해자 이름이나 5.18 유공자를 지목하는 표현이 없다. 하지만 지만원 게시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특수군이나 불순분자가 파견되어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 북한의 대남사업부 전문가 또는 좌익들이 그 살해범 누명을 출동한 군인에게 뒤집어씌우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지만원 게시물은 독자로 하여금 5.18 민주화운동을 잘못 이해하게 할 여지가 충분하다. 즉, 독자들은 5.18유공자나 5.18에 참여한 광주시민들(이하 ‘5.18 유공자와 광주시민’)을 북한의 선동에 놀아나 폭동에 참여하고, 유언비어에 편승해 대한민국의 국익을 해하는 잘못된 행동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지만원 게시물에는 직접 피해자 이름이나 5.18 유공자를 지목하는 표현이 없지만 5.18 민주유공자나 5.18운동 참가자들 전체의 사회적 평가에 관한 사실적 진술을 담고 있다. (= 명예훼손 행위 자체는 인정된다는 취지의 판결문 부분)

2. 지만원 게시물 = 집단표시 명예훼손

지만원 게시물은 5.18 유공자와 광주시민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는 사실적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지만원 게시물이 피해자 개개인을 이름으로 꼭 집어 냈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지만원 게시물은 피해자들이 속한 일정한 집단을 표시하는 명예훼손, 이른바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이하 ‘집단표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그런데 집단표시 명예훼손은 해당 집단에 속한 개개인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하기 어렵다. 또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그 집단의 개개 구성원에 이르러선 비난 정도가 희석된다. 그래서 집단표시 명예훼손은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집단표시 명예훼손은 집단구성원 개개인에 대해선 명예훼손이 성립하지 않음!)

다만 예외적으로 집단표시 명예훼손이라더라도 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판단되면 집단 구성원의 수가 적거나 명예훼손 표현과 주변 정황을 고려해 개개 구성원을 콕콕 집어낸 것으로 여겨질 때엔 집단 내 개개 구성원이 피해자로서 ‘특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단, 집단이 열나 적거나 하면 그 구성원 전부에 대해 명예훼손 성립!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

3. 그런데 5.18 유공자와 광주시민이 너무 많다

5.18 민주화유공자는 4,000명 이상이다. 5.18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지만원 게시물에 의한 비난이 개개인에 대한 것으로 여겨지기엔 그 수가 너무 많다. (즉, 피해자가 ‘특정’됐다고 볼 수 없어서 무죄라는 거다. 이게 핵심.)

다음과 같은 점들도 고려해서 검토했다.

  1. 지만원 게시물은 지만원이 5.18과 12.12에 관한 책을 내기로 하면서 머리말 일부로서 작성한 것이고, 실제로도 지만원은 2008년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책을 냈다.
  2. 위 4권으로 된 지만원 책은 그 목적이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비난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5.18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지만원의 시각으로 평가하는 데 있다고 보인다. (즉,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영역이라는 소리)
  3. 더욱이 5.18 민주화운동은 이미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라서 지만원 게시물이 5.18 민주유공자 등 개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정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

4. 따라서 검사는 지만원을 벌주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이 경우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해서 무죄를 선고한다.

[divide style=”2”]

대법원 2012. 12. 27. 선고 2012도10670 판결【가 .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 ( 명예훼손 ) 나 . 사자명예훼손】
지만원(피고인) vs. 대한민국 검사(상고인)
원심판결:  서울고법 2012.8.23.선고 2011노308 판결
대법원 판결선고: 2012.12.27.

판결문 전문은 2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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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1. 비슷한 사례라고 보기 힘들지만 과거 전여옥 표절 논란에서 좌파(가치중립적 표현입니다) 매체도 지만원 추종자들이 했던 오류를 범했던 적이 있죠.
    법원이 ‘표절 의혹 제기는 법적으로 문제없는 합리적 의심’이라고 판결한 것을 두고 ‘전여옥이 표절했다’라고 기사를 썼던 것입니다.
    이런 행태는 좌우 안 가리고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쉽게 정리한 글, 잘 읽었습니다.

  2. 음… 당시 ‘좌파 언론’만의 보도가 아닌, 중앙일보 등의 보도에서도 전여옥의 표절이 인정되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왔었습니다. 그냥 그 사건을 보도했던 언론들이 그런 식으로 기사를 썼다고 보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법 관계자들이 종종 하는 한탄이, 최근의 저널리즘은 법 관련 이슈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이 뿐만 아니라 전문지식이 필요한 기사 상당수가 그러한 것 같더군요)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죠.
    당시 기사를 스크랩해놓은지라 기억이 나서 여기 링크합니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789904

  3. 네 님의 말씀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괜히 좌파 매체 할 거 없이 그냥 언론계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현상 같네요. 지적 감사합니다 ㅎ

  4. 엘튼 존 노래 굿바이옐로우브릭로드에 나오는 ‘사회학의 개들’이란 표현을 참 좋아하는데, 저런 판사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되네여. 정의의 여신이 칼을 쥔 이유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판사는 고작 자신을 방어하는 것으로 밖에 쓰지 못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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