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토요일밤의 스팩터클, 대전 안전공업 화재 참사가 묻는 것.
3월 21일 토요일 밤, 유튜브 라이브로 MBC 뉴스데스크를 보다가 위화감이 들었다. 대전 공장 화재로 14명 사망,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위기, BTS 광화문 컴백 공연. 참사에서 전쟁으로, 전쟁에서 축제로. 슬픔, 불안, 들뜸.
뉴스가 끝나고 남은 것이 정보인가, 감정인가. 이 위화감의 정체가 뭔지 확인하고 싶어서 JTBC와 KBS를 일부러 찾아 시청했다. 세 방송사가 다루는 사건은 같았고, 순서도 대동소이했고, 시청 후의 감각도 같았다. 슬펐고, 불안했고, 살짝 들뜨다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세 방송사의 뉴스를 모두 본 뒤에도 나는 이 ‘대전화재 참사’의 구조를 알지 못했다.
채널을 돌려가며 깨달은 것은, 세 꼭지의 보도가 동일한 문법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공장,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노동자, 밤샘 수색의 긴박감, 시신이 발견되는 순간, 이것은 참사의 스펙터클이다.
M뉴스에서는 쿠웨이트 정유시설을 강습하는 이란의 자폭 드론과 중동으로 향하는 해병대 2,500명, J뉴스에서는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린 레바논 난민 100만 명, K뉴스에서는 나탄즈 핵시설 재공습. 전쟁의 스펙터클이었다. 광화문 10만 관중의 환호, 경복궁 폐관의 이례성, “케이팝의 황제들이 왕의 귀환을 선언했습니다”라는 K 앵커의 말, 이것은 축제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런데 이 슬픔과 불안과 들뜸은 내용의 차이이지 문법의 차이가 아니다. 세 방송사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전쟁을 보여주면서도 시청자가 경험하는 것은 결국 뽕 가득한 정동의 롤러코스터이며, 오르내리는 각 구간은 시각적 충격과 감정적 밀도로 채워져 있었다. 구조적 분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뒷뉴스인 BTS 10분이 참사 10분을 덮었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누웠다가 내 머리는 혼돈 그 자체가 되었다. 이 생각은 절반만 맞았던 것이다.
화재 보도에 20분을 배정해도, 그 20분이 스펙터클의 문법으로 채워지면 시청자가 얻는 것은 더 강렬한 슬픔이지 더 깊은 이해가 아니다. 문제는 BTS의 분량이 아니라 뉴스 전체의 문법이다. MBC 뉴스를 보면서 느꼈던 위화감은 BTS와 참사의 ‘대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참사 보도 자체가 이미 스펙터클이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대전 화재” 명명에서 지워진 것들
세 방송사 모두 이 사건을 “대전 공장 화재” 또는 “대전 자동차 부품 공장 화재”라고 불렀다. 기업 이름이 탈각되고 장소만 남는다. “대전에서 불이 났다.” 주어가 없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안전공업이라는 꽤 큰 회사다. 1953년 설립, 73년 역사의 엔진밸브 제조 기업. 2024년 매출 1,351억 원, 종업원 364명.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에 직접 납품하는 1차 협력사이고, 미국·일본 등 20여 개국에 수출하는 기업이다. 하이브리드 차량용 중공밸브를 국산화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이 기업의 이름은 세 방송사의 뉴스에서 거의 소환되지 않았다.
“안전공업”이 호명되어야 “이 기업의 납품처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 질문이 나와야 현대차그룹이 등장한다. 기업 이름을 지우면 공급 사슬 전체가 지워진다. 2024년 아리셀 화재에서 “아리셀 참사”라는 명명이 기업에 책임을 각인시키고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졌던 것과 대비된다.
방송 보도는 이 사건을 ‘재해’의 언어로 다룬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재해’는 법적 범주로서 유용하지만, 불가항력과 기술적 우연성을 함의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참사”는 다르다. 예방 가능했으나 예방되지 않은 죽음, 구조적 책임의 실패를 지시한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가 겨우 획득한 이 언어가, 보도 관행 속에서 다시 “재해”로 환원되고 있다. 이 사건은 “대전 안전공업 화재 참사”로 명명되어야 한다. 장소, 기업, 사건, 성격, 이 네 요소가 모두 들어 있어야 참사의 구체성이 유지된다.

JTBC의 아리셀 연결은 좋은 의도, 그러나 잘못된 비교
세 방송사 중 JTBC만이 이 참사를 아리셀 참사와 연결하고, 스프링클러 소급 적용 면제의 입법 연대기를 추적했다. “2년 전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라는 기자의 리포트는, 참사의 반복성을 지적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의도는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 비교는 내용적으로 엄밀하게 성립하기 어렵다. 아리셀은 리튬 전지의 연쇄 폭발이 40초 만에 제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든 사건이다. 사망자 23명 중 18명이 이주노동자였고, 불법 파견, 안전교육 전무, 비숙련 노동자 투입이 참사의 핵심이었다. 법원은 예측 불가능한 불운한 사고가 아니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예고된 인재라고 판시한 바 있다. 그러나 안전공업은 모든 층위에서 다르다. 금속 가공 공장이고, 매출 1,351억의 중견 기업이며, 사망자 14명은 전원 내국인이다.
두 참사를 ‘스프링클러 부재’라는 기술적 공통점으로 연결하면, 아리셀의 고유성인 위험의 이주화, 이주노동자 착취 구조도, 안전공업의 고유성인 산업 중심부에서의 안전 실패도 모두 희석된다. 남는 것은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면 된다”는 기술적 해법뿐이고, 이것은 참사를 설비의 문제로 축소하는 봉합으로 이어질 것이다.

기존 참사 서사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
이 참사 보도가 이상하게 불편한 이유는, 한국 산업참사 비판 담론의 익숙한 프레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셀까지의 참사 서사는 비교적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영세 하청, 불법 파견, 이주노동자, 안전교육 부재, 집단 사망. ‘위험의 외주화’가 ‘위험의 이주화’로 전이되는 경로다. 문제는 이 서사가 강력하지만, 참사를 산업 구조의 주변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위치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영세하니까, 하청이니까… 이 인과의 사슬은 참사를 체제의 예외적 결함으로 처리할 여지를 남긴다.
안전공업은 이 서사와 맞지 않다. 73년 역사, 현대차그룹 1차 협력사, 매출 1,351억, 은탑산업훈장, 사망자 전원 내국인. 산업 구조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이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이 기업은 2010년부터 2014년까지 수차례 무단 증축을 반복하고, 도면에도 없는 복층 공간에서 노동자들을 쉬게 했다. 절삭유 슬러지가 천장과 배관에 축적되어 있었고, 스프링클러는 3층 옥내 주차장에만 있었다. 연 1,351억을 수출하는 1티어 기업이 노동자 복지 공간을 합법적으로 건축하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자원 부족이 아니라 선택 아닌가?
보이지 않는 현대차그룹
흥미롭게도, 안전공업의 기업 정체성과 현대차그룹 협력사라는 사실을 보도한 것은 전국 방송이 아니라 일부 대전 소재 지역방송과 뉴스미디어였다. 그런데, 지역뉴스에서 현대차가 언급되는 대개 맥락은 “공급망 차질의 피해자”로서다. 납품처 공장이 불탔으니 완성차 생산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프레이밍이다. 14명이 죽은 공장의 원청으로서의 현대차가 아니라, 부품 공급이 끊길 수 있는 피해자로서의 현대차.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지역 기자는 대덕산업단지에서 73년간 운영된 이 기업을 잘 알고 있다. 전국 방송의 기자는 현장에 투입되어 스펙터클을 중계하는 것이 1차 임무이고, 기업의 정체성 추적은 그 문법에 포함되지 않는다.
더 근본적으로, 안전공업을 호명하면 납품처가 어디냐는 질문이 따라오고, 그 질문은 아마도 한국 방송산업에서 가장 큰 광고주 중 하나인 현대차그룹으로 향할 것이다. 의식적 자기검열인지 무의식적 회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동일한 것 아닐까. 지역 매체가 기업의 구체성을 보도하고, 전국 매체가 현장 스펙터클을 보도하며, 그 사이에서 원청 책임이라는 질문은 아무도 던지지 않은 채 사라진다.
완성차 대기업은 1차 협력사에 대해 품질 감사와 납기 관리를 체계적으로 행사한다. 현대차그룹의 협력사 관리는 업계에서 가장 엄격하기로 알려져 있고, 납품 단가 인하 압력도 가장 강하다. 품질은 감시하면서 안전은 감시하지 않는 구조가 있다면, 원청이 안전 투자를 단가에 반영하지 않으면서 안전 책임만 협력사에 전가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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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를 각별히 챙기는 정부에서도 참사가 반복된다는 것
가장 불편한 질문이 남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4년차, 아리셀 대표 징역 15년이라는 전례, “노동 존중”을 표방하는 정부. 그런데 14명이 또 죽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참사 이후의 처벌을 강화한 법이지, 참사 이전의 예방 체계를 전환한 것이 아니다. 안전공업에서 14명이 죽기 전에 무단 증축을 적발하고, 절삭유 축적을 시정하고, 스프링클러를 강제할 수 있는 사전 감독 체계는 어디에 있었는가. 소방 자체 점검의 마지막은 지난해 10월이었고, 이 점검은 민간 업체가 수행한 뒤 결과를 소방서에 통보하는 구조다. 법은 존재하고, 절차는 수행되었지만, 무허가 공간은 수년간 방치되었다.
이것은 단지 정권의 문제만은 아니라 한국 국가의 규제 역량 자체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발전국가’가 산업화를 위해 규제를 유예한 것이 과거의 논리였다면, 민주화 이후의 국가는 규제를 제정하되 집행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노동 존중과 보호의 관점에서 ‘산업 안전’을 위해 철저하게 규제를 집행해야 한다. 사람이 계속 죽어가는 나라에 기업(하기 좋은) 안전을 말하는 기업부터 먼저 철저하게 들여다보고 뭐든지 집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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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 너머
토요일 밤 세 방송사의 뉴스를 모두 보고 나서, 나는 14명의 이름을 하나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이, 근속 연수, 가족. 방송은 알려주지 않았다. 아직 파악되지 않아서 죽은 분들의 이름을 호명할 수 없겠지 생각하면서도, BTS 공연 때문에 올리브영 네 개 매장이 문을 닫고 스타벅스 두 곳이 휴장한다는 소식은 기자의 이름을 걸고 보도하는 뉴스를 생각하니 좀 답답하다.
세월호 이후 축적된 참사 언어, 즉 구조적 책임, 예방 가능한 죽음, 위험의 외주화가 매번 반복되면서도 죽음이 멈추지 않는다면, 참사 언어 자체가 의례적 애도로 경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또다시,” “결국,” “예고된 참사.” 이 표현들이 매번 뉴스에 동원된다는 사실 자체가 한계를 증명한다.
스펙터클 너머의 저널리즘이란, 감정을 더 강렬하게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름을 부르고, 공급 사슬을 추적하고, 누가 이 공간을 만들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안전공업이라는 이름, 현대차그룹이라는 원청, 도면에 없는 복층 헬스장을 수년간 운영한 선택,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감독의 부재. 이 구체적인 질문들이 공론장에 도달할 때, 14명의 죽음은 비로소 “대전에서 불이 났다”는 스펙터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14명이 죽은 헬스장은 도면에 없었다. 그 공간은 수년간 존재해왔다. 그 수년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침묵의 수년이 참사의 진짜 시간이다.
가슴 깊이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부상당한 60분, 진화 작업 중 다친 소방관 두 분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