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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예능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우리들의 발라드'(2025). (⌚6분)

오늘날 오디션 프로그램은 단순한 음악 경연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서사를 측정하고 분류하며, 점수화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우리들의 발라드'(SBS, 2025)는 이 흐름의 정점에 있다. 프로그램은 노래보다 ‘진심’을 강조하고, 경쟁보다 ‘공감’을 내세운다.

감정의 기획 ― 데이터가 되는 감정

하지만 그 공감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측정되고 조율된 감정의 포맷이다. ‘감정을 측량한다’는 이 아이러니는 2000년대 초 ‘슈퍼스타K’로부터 이어져 온 한국 오디션 예능의 계보에서 새롭게 등장한 양상이다. 그동안 오디션은 실력의 평가에서 스토리의 감동으로, 그리고 지금은 정동(affect: 감정의 원형, 재료)의 평가로 이동했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이 ‘정동의 시대’를 대표한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제목부터 감정의 공유를 약속한다. 참가자들은 노래로 경쟁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다. 제작진은 서사의 흐름을 감정의 단계별로 설계한다.

사연의 고백 → 무대의 울림 → 심사위원의 눈물 → 시청자의 감동.

이 과정은 감정의 형식화(formalisation of affect)’라고 부를 수 있다. 감정은 즉흥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편집 가능한 콘텐츠 단위로 분절된다. 예컨대 첫 회에서 한 참가자가 부모의 이혼과 생활고를 언급하자 카메라는 즉시 클로즈업으로 전환되고, 배경 음악은 발라드의 후렴구로 치솟는다. 감정은 기술적으로 증폭되고, 시청자는 그 장면을 ‘진심’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그 진심은 편집된 감정, 연출된 진정성이다.

‘감정’으로 본 오디션 예능의 계보

1. 슈퍼스타K: 실력의 감정화

‘슈퍼스타K'(Mnet, 2009–2016)는 한국 오디션의 원형이다. 당시만 해도 평가는 가창력 중심이었다. 그러나 시즌이 거듭될수록 참가자의 ‘인생 서사’가 중요해졌다. 제작진은 “노래 잘하는 사람”보다 “이야기가 있는 사람”을 선호했고, 감정은 점차 경쟁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슈퍼스타K’의 감정은 아직 ‘자연스러운 눈물’의 영역에 머물렀다. 참가자의 눈물은 카메라가 포착하는 ‘사건’이었지, 연출의 구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감정은 이미 콘텐츠화의 길에 들어섰다. 시청자는 단순히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소비’하는 시청 행위자가 되었다.

2. 팬텀싱어: 감정의 귀족화

‘팬텀싱어'(JTBC, 2016–)는 감정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클래식과 크로스오버의 결합 속에서 ‘고급스러운 감정’을 추구했다. 여기서 감정은 대중의 눈물보다 정제된 미감의 감정, 즉 품격 있는 울림으로 재정의된다.

‘우리들의 발라드’가 대중의 눈물을 수평적으로 공유한다면, ‘팬텀싱어’는 감정의 위계를 만들어낸다. 감정은 미학적 취향의 표식이 되고, 감정의 계급화가 발생한다. 이처럼 오디션 프로그램은 동일한 감정의 재료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감정이 여전히 상품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3. 싱어게인: 기억의 감정화

‘싱어게인'(JTBC, 2020–2022)은 무명 가수의 서사를 중심에 두었다. 여기서 감정은 개인의 실패와 재기의 드라마로 조직된다. 눈물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기억의 회복 장치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또한 감정의 포맷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싱어게인’은 과거의 상처를 ‘콘텐츠 자원’으로 재활용하며, 눈물을 정동 자본(affective capital)으로 전환한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싱어게인〉이 남긴 감정의 기억을 계승하면서도, 더 대중적이고 즉각적인 감정의 측량화를 시도한다. ‘가창력의 회복’에서 ‘감정의 측정’으로 초점이 이동한 것이다.

4. 보이스코리아: 기술과 감정의 이중주

‘보이스코리아'(Mnet, 2012–2020)는 청각적 평가를 강조한 포맷이었다. ‘보지 않고 듣는다’는 설정은 감정의 시각화를 배제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프로그램은 청각을 시각화하는 기술적 장치를 강화했다. 심사위원의 놀란 표정, 회전 의자의 순간 등은 감정의 반응을 시각적 데이터로 변환했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이 경향을 계승하되, 기술을 감정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카메라는 눈물샘을 기다리고, 배경음악은 감정의 상승선을 계산한다. 감정의 기술화가 완결된 셈이다.

감정 계량화의 귀결: ‘자기 착취적’ 감정노동

‘우리들의 발라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감정의 측량화가 기술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실시간 투표, ‘감동 포인트’ 자막, SNS 반응 그래프 등은 감정의 수치를 시각화한다. 예컨대 “감동 95점”, “눈물지수 87%” 같은 수치감정을 데이터화하는 언어다. 감정은 더 이상 내면의 상태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신호로 취급된다. 이 감정의 계량화는 플랫폼 시대의 ‘좋아요’ 문화와 동일한 구조를 가진다. 오디션의 감동은 유튜브의 조회수, 트위터의 해시태그와 같은 방식으로 유통된다. 감정은 ‘보이는 데이터’가 되어야 인정받는다.

감정을 측량하고 수치화해서 정형화할 수 있다면(통조림화할 수 있다면), 좀 더 쉽게 서로 교환(상거래)할 수 있다. 그런 자본주의적 욕망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일 것이다.

모든 오디션의 심사평에는 한 문장이 등장한다. “진심이 느껴졌다.” 이 문장은 오디션 감정 체계의 핵심 규칙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자주 반복될수록 그 ‘진심’은 가장 인위적이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심사위원의 눈물과 참가자의 고백을 교차편집 하며 ‘진정성의 연출’을 체계화한다. 감정은 표현의 결과가 아니라, 포맷의 결과물이다. 진심을 연기하는 법을 익히는 참가자들,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척하며 울어주는 심사위원들 — 이 관계는 감정의 상품화를 완성하는 장면이다. 그렇게 감정은 진심이 아니라, 진심처럼 보이는 것이 된다. 아니, 진심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라면 그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것이 된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감정노동의 무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참가자는 자신의 사연을 ‘콘텐츠 자원’으로 제공해야 하고, 그 감정의 진실성을 증명해야 한다. 이는 서비스업의 감정노동과 다르지 않다. 고객 대신 관객에게 감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평가를 얻는다. 하지만 이 노동은 언제나 자기 착취의 형태로 작동한다. “진심을 보여주세요”라는 주문은 곧 “진심을 연출하세요”라는 명령이다. 참가자는 자신을 감정적으로 탈진시켜야 ‘성공’할 수 있다. 감정노동은 이제 미덕이 되었다.

감정의 정치경제학: 공감의 시뮬라크르

‘우리들의 발라드’ 속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경제적 자원이다. 눈물이 많을수록 화제성이 높고, 화제성이 높을수록 자본의 흐름이 커진다. 감정은 이제 시장 가격이 붙는 상품이다. ‘슈퍼스타K’의 시대에는 노래가 팔렸다. 이제는 감동이 팔린다. 눈물은 스토리텔링의 연료이며, 프로그램은 그 눈물을 화폐처럼 유통한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함께 울기’로 끝난다. 참가자, 심사위원, 관객, 시청자—모두 함께 울어요!(all are crying together). 이 ‘집단적 감정의 동시성’은 감정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출된 공감의 시뮬라크르(Simulacre; 원본 없이 복제된 가상 세계 또는 그런 이미지, 가령 ‘디즈니랜드’)다.

그 공감과 감동의 원본은 예능 PD와 작가의 아이디어 회의 속에 존재한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집단 감정의 패턴을 예측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 편집한다. 시청자는 감동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시받는다’. 감정의 자유는 사라지고, 감정의 통제된 민주화가 등장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언제나 권력의 언어를 숨기 때문이다. 누가 공감받을 자격이 있는가? ‘우리들의 발라드’의 감정정치는 ‘누가 울 수 있는가’와 ‘누가 울어야 하는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감정(분노, 냉소, 불신)은 이 프로그램의 서사에서 배제된다. 그 대신 눈물과 헌신, 회복과 가족애가 감정의 표준으로 제시된다. 이것이 바로 감정의 정치경제학이다. 감정은 평등해 보이지만, 그 감정의 종류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유통할 수 있는 감정 상품을 중앙에서 통제하고 결정한다. ‘우리들의 발라드’의 감정 체계는 결국 ‘방송국 놈들'(권력)이 허락한 정상성의 감정만을 승인한다.

J.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 (1980)에서 디즈니랜드를 분석한다. 원본 없는 ‘꿈의 재현’으로서 디즈니랜드는 아무런 물적∙역사적 근거 없이 올랜도 허허벌판에 그 꿈을 이식한다. 그리고 긍정적이고 밝은 감정만을 선택하고 그렇게 편집한 꿈의 세계를 생산해 그 꿈의 상품들을 유통한다. 그리고 그 꿈의 상품들을 디즈니랜드 바깥에서 모방한다. 그리하여 아메리카(미국)라는 ‘악몽’을 디즈니랜드라는 ‘꿈’으로 위장하고 뒤덮는다. 원본 없는 본제, 시뮬라크르의 정치경제학.

울지 않는 자의 자리

발라드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감정의 중심 장르였다. 1990~2000년대 발라드는 상실과 사랑, 청춘의 슬픔을 대변했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이 시대의 정서를 다시 호출하며, 집단 감정 기억(collective affective memory)을 재활성화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재현된 기억이다.

‘그때 그 노래’는 향수가 아니라 상품이다. ‘싱어게인’이 무명 가수의 기억을, ‘팬텀싱어’가 장르의 기억을 상품화했다면, ‘우리들의 발라드’는 감정 그 자체의 기억을 상품화한다. 감정의 기억조차 이제는 데이터베이스의 한 챕터가 된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은 AI 기술을 도입해 음성 분석, 표정 인식, 실시간 반응 데이터를 활용한다. ‘우리들의 발라드’ 역시 감정 분석 자막 기능을 실험적으로 시도했다. 이것은 감정 측량의 기술적 완성이다. 그러나 감정의 자동화는 결국 감정의 비윤리적 소비를 심화한다. 감정은 더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자본 복합체가 조정하는 신체 반응이다.

이 공식화한 ‘주류’ 감정의 체계 속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배제된다. 냉정함, 거리두기, 침묵은 진정성이 없는 태도로 읽힌다. 그러나 바로 그 ‘울지 않는 감정’이야말로 오늘날 필요한 비평적 감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발라드’가 만든 세계에서 감정의 잔여자(remainder of emotion)는 시스템의 외부로 밀려난다. 하지만 그 잔여자야말로 감정의 진정한 정치적 가능성이다.

‘우리들의 발라드’는 ‘감정의 시대’를 완벽히 반영한다. 감정은 상품이 되었고, 눈물은 콘텐츠가 되었으며, 진심은 포맷이 되었다. ‘슈퍼스타K’가 실력을, ‘싱어게인’이 기억을, ‘팬텀싱어’가 품격을, ‘우리들의 발라드’는 감정을 측정한다. 이 프로그램은 감정의 진정성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감정의 통제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우리가 그 감동에 공명할수록, 우리의 감정은 더 정교하게 측정되고 소비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눈물이 아니라,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 감정, 즉 감정의 윤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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