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의 북라이딩] 노동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 미래를 결정하는 건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5분)

“혹 내가 품삯을 많이 준다고 해봅시다. 그리하면 이 일꾼의 의식주가 풍성해지지 않겠소. 먹고사는 게 편안해지니 여유도 생길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놈이 우리 양반에게 공손치 않게 될 것 아니겠소. 이들이 양반에게 따지고 덤비면서, 품삯 주는 양반 고마운 줄 모르면 어떡한단 말이오. 이 세상이 어려워질 것 아니오.”

[백범일지]에 나오는 일화란다. 김구 선생이 어느 양반의 야박한 행태에 한마디 했다가 들은 반박이다. 노동자 잘해주면 기어오른다는 논리다. 100년 전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일하는 삶의 경제학’에 집중한 이상헌 세계노동기구(ILO) 국장의 새 책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에는 노동에 대해 속고만 살아왔나 개탄할 에피소드가 여럿이다.
노동에 대한 가스라이팅?
1980년대 영국 대처 정부는 민영화와 자유화로 대량 실업과 임금 정체를 겪었다. 명분으로 삼았던 물가 안정에도 실패했다. 거칠게 몰아붙인 시장 근본주의 정책에 대해 대처의 경제 고문을 맡았던 앨런 버드는 후일 고백했다. 정책 효과에 대한 기대보다 실업을 늘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판단했단다. 실업이 늘어나 노동계급의 힘이 약해지는 것이 정부의 진짜 목적이었다는 얘기다. 20세기 초 김구 선생을 훈계했던 양반의 논리가 20세기 말 선진국에서도 강고했던 셈이다.
일자리는 단순히 노동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이고 자존감이다. 수요 공급 등 시장 논리로만 따지면 기업은 늘 일자리를 과소 공급하려 한다. 201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장 티롤은 “시장 경제는 노동자를 너무 자주 해고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노동자의 단합을 마뜩잖게 여기는 자본가들의 단합은 조용히 이뤄지며, 임금을 낮추기 위해 연합을 결성한다는 지적은 무려 애덤 스미스가 했다. 뭐든 노동자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부터 가스라이팅 아닐까?
“고임금은 경제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다. 배부른 노동자를 통제하기도 어렵고 생산성도 떨어진다는 생각이 늘 잠복해 있다. 노동자는 언제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결국 임금에 대한 인식은 야박해지기 마련이다. 천문학적 이윤을 올린 기업이 주주에게 넉넉한 배당을 하고 최고위급 임원들에게 성과급을 나눠주는 것은 극히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일반 노동자가 성과 배분을 말할 때는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라는 비난이 따르는 상황은 오늘날에도 친숙한 풍경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내가 공장에 가서 일한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노조 가입”이라고 대놓고 노조 가입을 선동했다. 노조를 꺼리고, 노란봉투법이 통과되면 큰 혼란이 올 것처럼 떠드는 이들과 사뭇 다르다.

노조는 실제 기업에 이롭다. 노르웨이 조사에서는 노조 조직률이 10% 늘어나면 기업 생산성이 약 1%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단체 협약이 추가 되면 기업 생산성은 무려 13.5% 상승했다.
현실에서 노조 조직률은 반토막 났다. 197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40%를 웃돌던 노조 조직률은 OECD 평균 15%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훨씬 커졌다. 기업 이윤은 지난 40년 동안 40% 이상 증가했다. 과거 미국의 물가 상승 요인 가운데 60% 정도가 노동 비용이 있다면 코로나 시기에는 10% 아래로 뚝 떨어졌다. 대신 물가 상승에서 기업 이윤 영향이 과거 10%에서 50%를 넘어섰다.
최저임금 효과도 온갖 부정적 호들갑에도 불구, 이미 검증됐다. 202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데이비드 카드와 앨런 크루거는 최저임금 덕분에 임금은 유의미하게 올랐는데, 고용에는 어떠한 유의미한 부정적 영향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심지어 고용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연구도 나왔다.
일자리 숫자의 함정
좋은 일자리를 위해서는 노동을 재정의해야 한다. 모든 정부는 일자리와 실업률 숫자에 연연하지만, 그것만으로 답할 수 없는 문제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3년 공식 정의에 따라 추정한 한국 실업자는 약 69만 명. 실업률 2.7%는 국제적으로 볼 때 아주 낮다. 그런데 주당 1시간 일해서 고용 상태로 간주하지만, 노동 시간을 늘리고 싶은 이들이 74만 명이다. 이들까지 합쳐서 실업률을 계산하면 5.2%, 선진국 평균에 가깝다. 여기에 잠재 구직자와 잠재 취업 가능자 122만 명까지 실업 범위를 확장하면 약 265만 명. 공식 실업보다 3.9배 크다. 어느 숫자에 장단을 맞출 것인가.
거래 대상이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유용한 필수 노동도 있다. ILO는 세계 공짜 돌봄노동이 연간 164억 시간, 약 20억 개 일자리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돌봄노동에 최저임금을 지불하면 GDP의 9%에 달한다.
‘숨은 노동’이라는 가사 노동은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에 직결되는데, 아직 멀었다. 한국 남성의 가사 노동 기여 비율은 이제 22.1%다(2019년 기준, 통계청 생활시간조사).

세금 내지 않고, 사회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은 비공식 노동도 전 세계 고용의 60%를 웃돈다. 이름은 비공식이지만 사실상 가장 흔한 고용 형태다. 심지어 ‘강제 노동’ 불법 이윤이 2360억 달러에 달하는 세상이다.
무엇보다 2022년 현재 전 세계 노동력의 4.7% 1억 6700만명은 이주노동자다. 노동시장 제도를 탄탄하게 운용하는 나라에서 이주노동자 효과가 긍정적이라는 프랑스 연구에 따르면 고용 보호가 체계적으로 잘 되어 있는 나라, 노조 가입률이 높은 나라, 임금협상이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이나 국가 단위에서 조율되는 나라가 이주노동의 혜택이 커진다.
자국 노동자가 생산성과 고용조건을 끊임없이 상향 조정할 수 있어 이주노동자와의 부당한 일자리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노동에 불친절한 나라일수록 갈등만 커질 수 있다.

K-노동의 미래
선진국 정부는 20세기 중반 완전 고용을 목표로 삼았다. 통화 관리와 물가 조정은 궁극적으로 고용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역할이었다. 정부가 최종 고용주가 되는 상상은 1930년 대공황 시절 공공 일자리 프로그램으로 구현됐다. 이후 대처 정부가 노골적으로 드러냈듯 실업률을 높여 노동자를 쥐어짜려는 움직임도 거세졌지만, 동시에 실업은 사회적 살인이라는 인식도 차곡차곡 쌓였다.
미국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와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는 ‘보편적 일자리 보장(Jobs Guarantee)’을 주창했다. 유엔인권위도 긍정적으로 평가, 적극 정책을 요청했는데 정부 기관, 지역자치단체, 공동체 등을 통해 일자리 수요를 체크하는 방식이다. 인력 필요성이 확인되면 당사자와 의논하여 일자리를 확정하고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에서 정부가 지급한다. 예산이 문제인데 미국의 경우 GDP 1.0~1.3%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됐다. 13%의 국방 예산을 약간만 줄여도? 참고로 디지털 시대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OECD 국가들은 2004년 GDP의 0.14%를 쓰다가 오히려 0.10% 이하로 줄였다.
인간을 제거한 경제학은 문제가 생기면 제도가 아니라 인간을 비난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노동시장’이라는 말 자체가 편향됐다는 것도 기억하자. 이상헌 국장은 최근 북살롱 오티움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K-노동의 새로운 방향이 필요하다고 했다. 산업재해는 말할 것도 없이 일자리 신입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AI 문제부터 대책 없이 늦어서 심각한 처지의 이주노동자 문제까지 첩첩산중인 상태.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부터 문화예술까지 어디서든 저력을 드러냈다.
노동 문제라고 불가능할까? 영국의 복지국가 틀을 만든 윌리엄 베버리지는 일자리 문제를 첫손 꼽으며 샬럿 브론테를 인용했다.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Misery generates hate), 일하는 삶 없이 무슨 일이 가능하겠나. 우리는 분열과 파국을 막기 위해서 시장 바깥에서 다르게 상상해야 한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시장 시스템의 미래’ 회의 오찬에서 꺼낸 와인 건배사(?)를 가져와 본다. 캐나다와 영국 중앙은행 총재 출신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자신의 책에 인용한 것을 이상헌 국장이 재인용했다.
“와인은 다양하고 화려하면서 풍부한 향을 갖고 있어서 음식과 잘 어울리지요. 게다가 마음을 활기차게 하는 알코올도 있습니다. 와인은 우리의 모든 감각을 풍요롭게 합니다. 식사 마지막에는 그라파가 나옵니다. 그라파는 오직 한 가지 알코올만 갖고 있습니다. 와인을 증류시켜 버린 것이 그라파입니다. 인간성에는 열정, 호기심, 합리성, 이타성, 창조성, 이기심과 같이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는 오직 한 가지 이기심만 있지요. 인간성이 증발해 버린 것이 시장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할 일은 그라파를 와인으로 돌려놓는 것, 시장을 인간성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의 문제이고 진실의 문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