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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 대통령 트럼프는 주한미군 기지 소유권을 원한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트럼프는 한국 대통령 이재명과 회담 중 ‘주한미군 감축을 고려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가진 큰 기지의 토지 소유권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한국은 ‘우리는 땅을 줬다’고 얘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은 땅을 빌려준 것”이라며 “우리는 임대차 계약(lease)을 없애고 엄청난 군을 두고 있는 땅의 소유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안보실장 위성락은 트럼프의 돌발 발언에 “(주한미군 기지는) 소유권을 주고받는 개념이 아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선을 그었다.

트럼프는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100% 소유할 것”이라며 군사 수단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보인 적 있고, 캐나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한미군 기지 소유권 발언에 ‘트럼프식 팽창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배경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동맹 면전서 “땅 내놓으라” 속내는.

  • 트럼프가 언급한 부지는 경기 평택 소재의 ‘캠프 험프리스’다. 기지 규모는 여의도 면적 5배(1467만㎡)다. 해외 주둔 미군의 단일 기지로 세계 최대 크기다. 건설과 주둔 비용 90% 이상을 한국이 부담했다.
  • 미군기지 소유권 이전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정부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근거해 주한미군에 기지 부지를 공여(供與)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미군에 사용료 없이 무상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권은 한국에, 사용권은 미국에 있다.
  • 실제 소유권을 검토하려면 SOFA 개정부터 해야 한다. 국회 비준이 필요하다. 선출 권력이 헌법에 명시된 영토 주권(제3조)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가는 거센 국민 여론에 의해 탄핵을 당할 수 있다.

트럼프, 아베한테도 “후텐마 기지, 주변 땅값 상승했나.”

  • 우리만 ‘땅 타령’을 들었던 건 아니다. 트럼프의 부동산 집착은 일본 총리를 지낸 고(故) ‘아베 신조 회고록’(2023)에도 잘 드러나 있다.
  • 아베는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주제나 대화 내용은 사전에 실무 차원에서 면밀하게 조율한 뒤 진행되는데,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은 대면이든 전화든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 그가 (실무 레벨에서 조율했던) 의견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료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며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 트럼프가 아베에게 갑자기 “아베 총리, 오키나와현 후텐마 비행장 주변 땅값은 오르고 있나요”라고 물었다는 것. 아베는 당시를 떠올리며 “그런 질문을 갑자기 받으면 바로 답하기가 어렵다. 외무성 관료들의 얼굴을 보니 모두 고개를 숙이더라”며 “트럼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후텐마 비행장은 미국 땅이라고 생각하고, 지역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면 반환하고 싶지 않다는 뜻 같았다. 후텐마 대신 받기로 한 오키나와 북부 헤노코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고 했다.
  • 트럼프 질문에 아베는 이렇게 답했다. “후텐마 기지는 원래 일본의 소유지이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은 미국과 상관없다.”
  • 후텐마 비행장은 일본 오키나와 중부 기노완시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군용 비행장이다. 여기도 미일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비행장 부지는 일본 영토이고 미군은 기지 사용권을 갖고 있다. 미일은 2006년 후텐마 기지를 북동부에 위치한 나고시 헤노코로 이전할 것을 결정한 바 있다.
아베는 2016년 11월 미 대선 직후 외국 정상 최초로 당선인 신분이던 트럼프와 단독 회담을 가졌다.
사진=일본 정부 공식 잡지 ‘토모다치’(Tomodachi) 제공.

트럼프 신뢰 쌓기 위한 빌드업.

  • 트럼프 1기 행정부(2017년 1월~2021년 1월) 기간 동안 아베는 트럼프와 가장 긴밀하게 소통한 정상이었다. 아베가 건강 문제로 2020년 9월 총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두 사람은 3년 8개월 동안 14차례 대면 정상회담과 37차례 공식 전화 통화를 했다.
  • 회고록은 ‘트럼프 사용법’이라고도 할 만큼 아베가 트럼프와 어떻게 신뢰를 쌓았는지 대미 외교 노하우를 기록한 대목이 적지 않다. 한국에는 지난해 2월 번역 출간됐다.
  • 2016년 미 대선 국면서 당시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 측은 아베를 만나고 싶다고 했고, 그해 9월 아베의 방미 때 양측 만남이 성사됐다.
  • 트럼프 캠프에서는 ‘아베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9월 방미 일정이 다가오자 아베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만약을 위해 트럼프도 일단 만나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총리 관저 내에 트럼프 회담이 불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베는 트럼프 캠프에 만남을 요청했다.
  • 대선 전 트럼프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대리인으로 최측근 변호사 윌버 로스를 만났다. 이듬해 로스는 트럼프 정권의 초대 상무장관이 됐다. 한국 언론은 “미 대선 앞두고 클린턴만 만난 아베”라고 보도했지만 일본은 양쪽을 함께 공략하고 있었다.

“오바마도 쿨한 사람이니까.”

  • 아베는 2016년 11월 대선 직후 외국 정상 최초로 당선인 신분이던 트럼프와 단독 회담을 가졌다.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미국 뉴욕의 ‘트럼프 타워’로 내달린 것이다.
  • 아베는 회고록에 “취임 전 차기 대통령과 회담하는 것은 현직 오바마 대통령에게 실례일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그것은 분리해서, 쿨하게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오바마도 쿨한 사람이니까”라고 밝혔다.
  • 이런 입장을 오바마 행정부에 전하자 “트럼프와 식사는 하지 말아 달라”, “취재진을 입장시켜 촬영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주문이 전달됐고, 아베는 오바마 측 요구를 따르며 트럼프를 만났다.
  • 이 회담에서 중국의 군비 증강에 맞서는 미·일 안보 동맹의 중요성,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 일본 기업의 노력, 그리고 골프 약속이 논의됐다. 회담을 계기로 트럼프와 아베는 전화 통화로 국제 정세 견해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아베 이용해 트럼프 생각 바꾸려 한 NSC.

  • 아베는 트럼프를 이렇게 설명한다.
  • “내가 접한 미국 지도자들은 ‘나는 서방 세계의 지도자’라는 인식과 책임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2차 내각(편집자 주 : 아베의 1차 집권은 2006년 9월부터 1년간, 2차 집권은 2012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에서 사귄 버락 오바마까지 모두 그런 입장을 인식하고 있었다. 반면 트럼프는 ‘왜 미국이 서방 국가들의 부담을 져야 하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중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국가가 대치하는 구도 속에서 미국이 서방을 어떻게 묶어 중·러의 행동을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생각은 별로 갖고 있지 않았다.”
  • 아베는 “통상과 무역 분야에서 자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지만 안전 보장 정책에서 미국이 자국 이익만 생각하고 국제사회 지도자 입장을 거두게 된다면 세계는 분쟁으로 가득 차게 되고 만다”며 “나는 ‘국제사회 안전은 미국의 존재로 유지된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거듭 말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구성원들과 나는 같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NSC 직원들은 나를 이용해 트럼프 생각을 어떻게든 개선해보려고도 했다”고 고백했다.
2017년 2월 당시 아베 일본 총리가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일본 정부 공식 잡지 ‘토모다치’(Tomodachi).

“무조건 보자”가 중요하다.

  • “정기 회담을 하자고 약속한 적은 없지만 서로가 같은 장소에 가면 무조건 보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정상 간 신뢰 쌓기 첫 단추는 자주 보기다.
  • 오바마와 전화 회담은 보통 15~30분 정도로 짧았다. 반면 트럼프는 아무렇게나 1시간 또는 그 이상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다. 아베는 “애인과 전화면 몰라도, 이렇게 긴 통화는 좀체 있을 수 없다. 정말 이례적인 대통령”이라고 평했다. 물론 “본론은 전반 15분 만에 끝나고 나머지 70~80%는 골프 이야기나 다른 나라 정상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졌다.
  • “나는 내 생각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트럼프도 많은 문제에 대한 속내를 내게 말해줬다.”

‘불리한 단어’ 꺼내지 않게 하는 법.

  • 2017년 2월 트럼프와 아베의 첫 정상회담 에피소드도 특기할 만하다. 당시 트럼프는 일본이 엔화 약세를 유도하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던 상황.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날선 발언이 나오면 일본 정부는 난감해진다. 아베는 회견장에 가기 전 오벌 오피스(집무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이렇게 이야기했다.
  • “특정 기업 이름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것은 그만둬 주셨으면 한다. 이건 해당 기업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된다. 만약 그런 비판을 그만둔다면 일본 기업도 미국에 투자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다.”
  • 아베는 환율에 관해서도 “환율이 불안정해지면 미국 경제에도 마이너스”라며 발언 자제를 요청했다. 아베는 회고록에 “트럼프는 이후 4년간 기업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비판하지 않았고, 환율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신뢰 관계를 지켜준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12월 24일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제8차 한일중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문재인 정부 청와대. 

돈 계산하는 트럼프 안보에 대응하려면.

  • 아베는 트럼프 안보관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사업가이기 때문에 돈이 드는 것에 신중했다. 돈을 계산해가며 외교·안보를 생각한다.”
  • 미군이 2017년 동해 일대에 항공모함 전단을 파견했을 때 트럼프는 아베에게 “항공모함 한 척을 이동시키는 데 얼마가 드는지 알고 있느냐.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항공모함은 군항에 두는 편이 낫다”고 했다.
  • 트럼프는 2018년 6월 북한 김정은과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아베 말에 귀를 닫았다. 문재인 정부가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흐름에 트럼프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몰입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 “나는 핵무기뿐만 아니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의 영어 약자)과 중거리 미사일, 생화학 무기도 모두 폐기시켜야 한다고 트럼프에게 말했지만 트럼프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게 외교는 새로운 분야이고 북한 문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생각이었던 트럼프를 미 국무부, 백악관 안보팀, 그리고 나도 막을 수 없었다.”
  • “(2018년 4월 미일 정상회담 전에) 미국 NSC 멤버들로부터 ‘트럼프 대통령에게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를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해 달라’는 요청을 수차례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쪽으로 기울어 있었기 때문에 미 안보팀 주장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때 회담에서 트럼프는 내 말에 ‘알았다’고 답하지 않았다. 큰 협상을 앞두고 있는데 본인 등에 짐을 싣지 말라는 느낌이었다.”

욕 먹는 것을 두려워 말자.

  • 이재명 정부는 ‘실용 외교’를 표방하고 있다. 지난달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일 연대’를 강조했고, 일본 언론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동원 문제에 관해 기존 합의를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 국내 비판을 감수한 외교적 행보다. 한일 회담 직후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인 정의기억연대는 “‘실용 외교’라는 명분에 역사 정의가 가려진 정상회담”이라고 혹평했다. 지지층보다 국익을 먼저 생각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 일본 보수·극우를 대변하는 아베는 군국주의 회귀를 꿈꾸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정치인으로 국내에서 평가돼 왔다. 그런 그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국익 우선’이었다는 점이다.
  • “현실적으로 봤을 때, 만약 일본이 트럼프 대통령의 표적이 된다면 나라 전체가 어려운 상황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중략) 뉴욕타임스로부터 ‘아베는 트럼프에게 아부만 하니 한심하다’고 꽤 얻어맞았다. 하지만 ‘당신 참 대단하다’고 구두로 칭찬함으로써 모든 것이 잘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이다. 최전선에서 ‘미국 정책은 잘못됐다’고 불평해봐야 미일 관계가 어려워지면 일본에는 어떤 이익도 되지 않는다.”
  • 한미 정상회담에서 화제가 된 이재명의 ‘피스메이커–페이스메이커’ 발언이 국익 중심 외교의 초석이 될지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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