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일요일 오후 9시, 서울 대림동 H빌라에 사는 20대 청년 10명이 한데 모였다. H빌라 임차인 대표 안산하(28)가 물었다. “지난 일주일 어떻게 사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 “전 따로 뭐 크게 한 건 없고, 그냥 출근하고 퇴근했던 것 같아요.”
  • “친구 중 법무관이 있어서 그 친구와 우리집 문제로 간단하게 밥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왔습니다.”
  • “원래 계획한 여행을 갔다 오자마자 변호사 상담을 하나 했어요. 거기서 약간 멘탈이 흔들렸지만 친구 전화를 받고 다시 다잡은 상태입니다.”
  • “일주일 열심히 일을 했고,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스포츠팀 경기를 봤는데 져서…. 네 그렇습니다.”
  • “저는 아까 맛있는 닭갈비를 먹고 소화가 덜 된 것 같아요.(일동 폭소)”

‘실무팀’ 입주민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소소하고도 고단했던 지난 일주일 에피소드를 꺼내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밝아졌다. 일상을 공유하는 순서가 끝나고, 본론이 이어졌다. 안건은 변호사 선임. 입주민들은 로펌 상담 내용과 선임 비용을 비교 분석한 프레젠테이션 자료에 집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월세 보증금 20억 원을 먹고 튄 H빌라 소유주이자 임대인 김소희(가명·29)를 잡기 위한 자리다. ‘전세 사기’ 피해자로 내몰린 이들은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탄 김소희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H빌라 임차인 대표 안산하가 물었다. “지난 일주일 어떻게 사셨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사진=김도연 기자.

이게 왜 중요한가 : 당신도 당할 수 있다.

  • ‘김소희 사건’은 전세 사기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단지 20대인 피해자들이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라서, 기성 세대보다 꼼꼼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의 코도 베어가는 게 전세 사기다. 허술한 임대차 제도와 무분별한 전세 대출과 보증, 부실한 임대업자 관리 감독이 빚은 사회적 참사다.
  • H빌라 305호 정씨(25) 이야기다. “건물을 보러 다닐 때 세무사와 함께 문서를 떼어가며 꼼꼼하게 살피고 살폈어요. 이 정도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계약한 건데…. 전문가도 문서로는 문제를 찾지 못했을 정도인데, 우리 같은 일반인은 더더욱 정보를 알 수 없죠.”
  • 이들의 공통점은 정부 정책인 중소기업 취업청년 전월세 보증금 대출(중기청 대출)을 받고 H빌라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사회 초년생에게 저금리 혜택을 주는 중기청 대출 제도는 1억 원 한도 내에서 보증금의 80%~100%까지 대출을 해준다. 내 집 마련을 목표로 목돈을 모으는 청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정책이다. 물론 집주인으로부터 전세 보증금을 제때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 2023년 12월 입주한 305호도 중기청 대출로 마련한 1억 원과 자기 돈 3500만 원으로 전세 보증금을 만들었다. 3500만 원은 20세부터 미용 일을 해 만든 돈이었다. “지금 계약하지 않으면 중기청 대출이 곧 마무리된다는 소문이 공인중개사 사이에 엄청 돌았어요. 중기청 대출이 마감되면, 앞으로 전세로 들어가는 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계약을 결심했죠.”(305호, 25세)
  • 올 1월 입주한 안산하도 중기청 대출로 보증금 1억 2500만 원을 마련했다. “중기청 대출은 연소득 3500만 원 이하인 34세 미만 청년이 대상이에요. 서울 월세가 너무 비싸니 청년에게는 너무 좋은 제도죠. 한편으로는 나라가 그만큼 쉽게 돈을 푼다는 이야기예요. 이미 이 제도는 시장에서 부동산 투기꾼, 사기꾼들의 표적이 되고 있어요.”
총 23세대가 살고 있는 서울 대림동 H빌라. 대다수가 20대 청년들이다. 사진=김도연 기자.

파산 예고하고 잠수탄 김소희.

  • 김소희는 만 29세 여성이다. 대림동 H빌라 외에도 ‘○○시아’, ‘☆☆시아’라는 빌라 2채를 소유하고 있다. ○○시아, ☆☆시아는 2019년에 지었다. H빌라는 2023년 지은 신축이다.
  • ○○시아에 걸린 근저당(채권최고액)은 5억 3400만 원이다. ☆☆시아의 근저당은 5억 4000만 원이다. 김소희가 ○○시아와 ☆☆시아를 담보로 은행에서 10억여 원을 빌려 두 건물을 올렸다는 의미다. H빌라의 경우 13억 8000만 원이 근저당으로 설정돼 있다.
  • 김소희가 대출금을 못 갚으면 채권자인 은행이 집을 경매에 넘길 수 있다는 뜻이다. 경매 낙찰 시 은행은 낙찰 대금에서 우선적으로 채권최고액을 가져간다. 즉, 집 시세에서 채권최고액을 뺀 금액이 임차인들의 보증금보다 작다면 전세금을 다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 올 2월, 전세 계약이 끝나는 ○○시아 입주민이 보증금을 돌려달라 하자 김소희는 문자로 파산 신청을 예고했다.
  • “사실 전세 사기가 시작되면서 세입자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나가신다는 분들만 계시고 들어오시는 분이 없어 모아둔 자본을 모두 사용해서 지금 돌려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안 될 것 같아요. 너무 죄송한 말씀이지만 돌려드릴 돈이 없어 못 돌려드리게 됐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가 앞으로 임대업을 지속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 김소희의 파산 신청 예고는 H빌라 입주가 완료되고 불과 한 달 반 만의 일이다. H빌라 입주민들이 김소희의 파산 계획을 알게 된 시점은 ‘전세 사기’를 감지한 뒤 세 건물 피해자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서다. 정작 김소희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 H빌라에도 수상한 조짐은 있었다. 3월 말 건물 청소 관리자가 “임대인(김소희)과 연락이 되느냐”고 물은 뒤 임금 미지급으로 청소를 중단했다. 4월 초에는 수도사업소가 요금이 체납됐다며 수돗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예고했다. H빌라가 지어진 지 불과 2개월 후부터 지난 2월까지 쌓인 수도 요금 체납액은 모두 91만 원.
  • 403호 홍씨(27) 증언이다. “4월 2일 비가 와서 복도 바닥에 빗물이 찰랑거렸어요. 김소희에게 조치가 필요할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수리 기사를 불렀다’고 답하더라고요. 그때도 파산 신청 이야기는 전혀 없었어요.”
  • 파산 신청 소식에 ○○시아, ☆☆시아, H빌라 입주민들이 모여 건물 현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모색했다. 빠른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대림동 H빌라는 날림 시공이 의심되는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위법 건축물’이다. 사진=김도연 기자.

‘위법 건축물’ 최대 수익 빼먹기.

  • 날림 시공이 의심되는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건물들이다. 건축물대장을 보면, ☆☆시아와 H빌라는 판넬을 사용해 옥상을 개조한 ‘위법 건축물’이다.
  • 또 다른 문제도 확인된다. 세 곳 모두 ‘근린생활시설’(사무소)과 ‘다중주택’이 혼재돼 있는 건물이다. 단독주택 종류 가운데 하나인 다중주택은 학생이나 직장인 등이 장기간 거주할 수 있는 ‘기숙사형 원룸’으로 하숙집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각 호별로 욕실은 설치할 수 있지만 취사 시설은 설치하면 안 된다. 공용 취사 시설만 인정한다. 하지만 ○○시아, ☆☆시아, H빌라 모두 각 호별로 취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 다중주택은 한 건물에 19세대 이하만 거주할 수 있다. H빌라에는 23세대가 살고 있다. 용도 변경 없이 불법적으로 다가구주택처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가구주택은 단독주택의 또 다른 유형이다.
  • 다중주택은 다가구주택보다 주차장 규제가 느슨하다. 감시를 피해 근생 시설을 주거 공간으로 불법 개조하는 일도 다반사다. 좁은 땅에 최대한 많은 임차인을 들일 수 있다. 다중주택을 불법 개조할 유인이 생기는 것.
  • 다중주택이나 다가구주택 같은 단독 주택은 소유자가 1명인 건물에 세를 들어사는 것이다. 101호, 202호 등 호수별로 개별 등기가 가능한 다세대주택(공동주택)과 다른 점이다. 등기로는 나보다 앞서 계약한 ‘선순위 임차인’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이 어렵다.
  • 만약 김소희 파산으로 H빌라가 경매에 넘어간다면, 근저당권자인 은행이 1순위로 채권최고액을 가져가고, 확정일자(법적으로 공증 받은 임대차 계약 날짜)에 따라 순번이 매겨진다. H빌라를 보면, 계약이 제일 늦었던 안산하는 임차인 중 확정일자가 맨 마지막이다.
김소희가 전월세 세입자들에게 보낸 문자 화면 갈무리.

무너진 꿈, “꼴 보기 싫은 집, 회사로 도피한다.”

  • 청천벽력 같은 파산 예고에 H빌라 입주 청년들은 인생 계획과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 “시골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내 평생 꿈은 서울에 살면서 직장을 다니는 것이다. 그 꿈을 이번에 반 정도 잃은 것이다. 갑자기 전세 사기를 당하면서 1억 3500만 원이라는 큰 빚이 생겼다. 이 돈을 다 갚았을 때 나는 몇 살일까? 모든 게 막막해 처음에는 죽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306호 백씨, 26세)
  • “예비군 훈련을 갔다 와서 엘레베이터에 탔는데 종이가 붙어 있었다. 집주인과 연락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좀 멍했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전혀 몰랐다. 오는 9월 집 계약이 끝나는데 누나가 사는 집이 괜찮아 대출을 끼고 매입할 생각이었다. 최종적으로 그 집으로 이사 가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부모님과도 얘기해봤다. 많이 당황하셨고 많이 슬퍼하셨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301호 장씨, 27세)
  • “본가도 영등포다. 안 나와 살아도 됐는데, 혼자 살아본 적 없어서 큰 결심을 하고 독립하게 됐다. 전세로 2년 살고 나면, 그즈음 결혼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하며 들어왔다. 자책을 하게 된다. 집도 가까운데 괜히 나와서…. 괜히 나대서 이런 벌을 받나 싶다.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302호 김씨, 28세)
  • “아직 어리기 때문에 몇 년 걸려도 빚은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가 많이 힘들어 하신다. 내 손을 잡고 ‘내가 은퇴할 나이지만 우리가 무슨 일이든 같이 하면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다시 엄마의 짐 덩어리가 된 느낌이었다. 분가도 더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엄마를 해방시켜드리는 느낌으로 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짐이 되어 엄마에게 돌아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니 자괴감이 너무 들었다. 며칠은 안 좋은 생각도 많이 했다. 내게 집은 더 이상 편히 쉬는 곳은 아니다. 집에서 도피하는 느낌으로 출근한다.”(305호 정씨, 25세)
4월 27일 오후 9시 대림동 H빌라에 사는 20대 청년 10명이 모였다. 전월세 보증금 20억 원을 갖고 튄 H빌라 김소희를 잡기 위해서다. 사진=김도연 기자.

그럼에도 살민 살아진다, 살아야 한다.

  • 안산하는 학생 운동권이다. 몇 년 전에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규탄하며 삭발 투쟁을 했다. 28세인 그가 아직도 대학생인 이유이기도 하다. 소위 ‘투쟁’할 줄도 알고, 사람을 챙길 줄도 안다. 김소희 사건 대응 모임 때 일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일상을 묻고 듣는 이유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확실한 건, 혼자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일의 파이가 훨씬 크다는 사실이에요. 이길 가능성도 높아지고요. 같이 밥 먹자 했을 때 진짜 같이 밥 먹어주는 사람이 있고, ‘정말 미안한데 밤 11시에 회의하자’고 했을 때 진짜 밤 11시에 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도 못 쉬겠어요. 같이 할 수 있어서 일단 여기까지 온 것이고요. 이왕 하는 거 정말 끝까지 해서 김소희가 먹튀한 우리 돈 제대로 받아내야죠.”
  • H빌라 주민들은 강고한 연대 울타리를 구축했다. 대응팀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전기·수도 요금을 내기 위해 관리비를 직접 모으는 총무팀,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각종 문서를 취합하는 서기팀, 변호사 선임이나 언론 대응을 맡는 대외협력팀이다. 생업이 있지만 자신들의 시간을 쪼개 사건 해결에 직접 나서고 있다.
  • 402호 이씨(27) 말이다. “각자 모두 일하고 있고, 힘도 많이 들고 3~4년까지 갈 수 있는 문제예요. 한없이 우울해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해요. 그래도 이웃끼리 맨날 같이 보는 이유는 이래야 같이 사는 느낌을 받아서예요. 대표님과도 이야기 많이 해요. 힘들면 서로 얘기하고 밥도 같이 먹고, 배드민턴 동아리라도 만들자고. 가만히 앉아 우울해하지 말고 몸이라도 써서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자는 거죠. 이렇게 떠들다가도 돌아가면, 집이 꼴도 보기 싫단 말이죠. 난 사회 초년생이고 집도 사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차도 사야 하는데, 김소희 때문에 다 묶여 있다는 생각…. 반지하부터 시작해서 한 층, 한 층 올라와 비로소 건조기 있는 4층 집에서 살게 됐는데 갑자기 전세 사기를 당하다니…. 혼자 있으면 무너질 테니 서로 의지하며 버티자, 그런 말을 하고 싶어요.”
H빌라 입주민들은 30일 국회 토론회에서 “전세 사기에 대한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 등의 손피켓을 들고 관심을 촉구했다. 사진=김도연 기자.

김소희 수사가 관건…국회에도 호소.

  • 이들은 김소희를 사기죄 혐의로 고소할 생각이다. 지난 15일 신고 차 경찰을 찾았던 403호가 한마디했다.
  • “일단 급한 마음에 신고라도 하려고 H빌라 입주민과 함께 경찰서를 찾았어요. 경찰은 ‘여기는 그런 업무를 하는 곳이 아니다. 고소장을 써와라. 우리가 고소장 양식을 뽑아줄 수는 없다. 인터넷에 찾으면 양식이 다 나온다’는 식으로 성의 없이 대하더라고요. 10분 만에 경찰서를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경찰 스스로 전세 사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 401호 김씨(25)도 맞장구를 쳤다. “고소장이 없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반복했죠. 전세 사기 대응 매뉴얼이나 신고 절차에 대한 설명은 없었어요. 연차까지 쓰면서 방문했는데, 참 많이 속상했죠.”
  • 안산하는 30일 오후 청년 문제 토론자로 국회를 찾아 “우리는 국가와 은행이 보금자리라고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전셋집에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묫자리였다”며 “국가가 임차인에게 선제적으로 변제하고 향후 임대인을 일괄적으로 추심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H빌라 입주민들도 “전세 사기에 대한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의 손을 잡아주세요”라는 손피켓을 들고 관심을 촉구했다. 대림동이 지역구인 ‘친명 실세’ 민주당 의원 김민석도 이날 토론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살고 있다”는 호소가 어떤 울림을 가져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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