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호 칼럼] ‘어쩌면, 사회주택’의 저자 최경호가 생각하는 남태령 대첩. 호미와 응원봉이 만난 그 자리에서 흩어져 각자의 동네로 돌아오더라도 지금이 바로 우리의 헌법과 선거제도를 투명인간이었던 우리의 다양한 표정들로 만들어야 갈 때. (⌚9분)ff
1991년 봄, 대한민국의 거리는 뜨거웠다.
거리 열기와 투표함의 냉기
4월26일 시위 도중 경찰의 폭행으로 강경대 씨가 숨지자, 정권에 맞서 많은 이들이 분신했고 의문사로 죽기도 했다. 그러나 6월의 지방선거는 노태우 민자당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68년의 프랑스도 어마어마하게 뜨거웠다. 하지만 그해 6월의 총선은 우파 연합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이들에 대해서는 너무 과격해진 분위기 때문에 중도층이 돌아서 우파를 지지했다는 분석이 있다.
1991년 한국, 1968 프랑스 선거
1991년 광역 의원 의석수는 민자당 5644 : 신 민주연합당 1655 : 민주당 21, 득표율은 39.8% : 21.5% : 14%
1968년 프랑스 우파 연합 396 : 좌파 연합 91, 결선투표 있었음
허탈한 역사가 2025년 한국에서도 반복될 수도 있으니 우선 힘을 합치자는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몇 달 전보다 훨씬 많아 보여도,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한다. 각자의 사연을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도, 집에 있는 이들도 행사하는 한 표가 모이는 것이 선거라는 말도 하고 싶다. 하지만 이것도 서론의 서론에 불과하다.
광장을 넘어, 의회와 제도와 생활세계로 가려면
여성, 장애인과 퀴어 등 소수자에게 ‘나중에’는 2024년 12월의 광장에서도 잠시 반복된 듯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라져서,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12월 7일에는 ‘왜 휠체어를 타고 이런 데를 오냐’고 말하는 분위기였고 일종의 혐오 발언이 연단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12월 21일에는 바로 그 당사자가 집회에서 발언할 기회를 가질 정도에 이르렀다(이장규).’
집회에서 나온 시민 발언들의 내용은 주옥같았다. 바야흐로 남태령 대첩에서는 보석 같은 사연들과 이야기가 ‘지금 바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민,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우리들 앞에 “인간의 마을에 피어나는 꽃”처럼 펼쳐졌으며 ‘이것은 한 개의 나락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이상 강광석)’.
거대한 변화요, 의미 깊은 진전이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그리고 본격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세입자’, 그밖에 많은 투명 인간의 목소리가 광장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미 주인이다. 그러나 광장을 넘어, 의회에도, 제도에서도, 나아가 집이 있는 동네에서도 온당한 주인의 몫을 차지할 수 있을까?
정체성이자 계급인 ‘세입자’에 대해서는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남태령의 영웅들은 높은 확률로 젊은 1인 가구일 것이다. 애초에 대한민국에서 1인 가구의 비중이 가장 크니 확률적으로도 그럴 것이고, 고루한 논리이겠으나 전통적인 가족 구성은 20대 여성이 철야 투쟁을 하기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긴 할 것이다.
2023년 기준 1인 가구 비중은 전체 가구의 35.5%이고, 이들의 51.8%가 단독(아마도 대부분은 다중주택 또는 다가구주택)/연립/다세대에 살고 있다. 전체 가구의 주택 소유율은 56.4%인데 1인 가구의 주택 소유율은 31.3%에 머무른다(2024통계로 보는 1인 가구, 통계청).
이들의 주거권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현재는 대부분 원룸에 세입자로 살고 있을 이들에게 이런저런 말 잔치와 약속은 많다. 그러나 결국 뼈대는 ‘나중에’, ‘결혼하면’, ‘아파트를’, ‘분양받아’ 해결하라는 것이다. 다른 권리들은 어떨까?
뿌린 대로 거두리라? 뿌린 밭에 와야 거두지.
어느 선거를 앞두고 한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어느 정당에 ‘항의 방문’을 간 적이 있다. 후퇴하는 주택-부동산 정책에 대해 따지러 가는 자리였다. 교수님들, 소장 학자들, 변호사들과 함께였다. 당에서는 의원 몇 분이 나왔다. 욕받이 하러 나온 것이지. (경청했다는 알리바이를 위해 나온 것일지언정, 당장은 곤혹스러운 자리를 감당하러 나온 이들에게 드려 마땅한 모든 존중과 함께)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그들의 표정은 인상적이었다. 나도 안다. 나도 적어도 그날 나온 이들의 진심은 믿는다. 당선되면 당연히 할 건데, 당장 표가 되지 않는 주장을 대놓고 하라고 하면 어떡하냐. 우리를 믿어 달라. 당선되면 추진할 것이다. 내가 외려 미안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게 아닌데.
그 자리에서 그간 나의 불만과 고민은 수확과 파종이라는 키워드로 정리되었다. 현장의 우리는 파종하는 이들이라면, 저들은 선거철을 맞아 수확에 나선 이들이다. 그런데 아뿔싸. 우린 벼를 베느라 바쁜 집에 찾아가서, 왜 배추는 안 거두냐고 따지는 격이었다. 백날 천날 이야기해 봤자, 벼가 자란 논에서(만) 추수에 나서는 그들에게 배추 수확은, 기대하는 쪽도 바보가 될 뿐이었다. 문제는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라, 뿌리는 장소와 거두는 장소가 다른 것이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믿고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뿌렸어도, 그리고 그들이 설령 ‘밭을 탓하지 않는’ 성실한 농부였어도, 우리 밭의 소출이 그들의 실적에 포함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들 중 용기 있는 누군가가 배추를 거두겠다고 나온다 한들, 그이는 다음 선거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남태령 백번 넘어도 ‘나중에’는 계속된다, 선거제도 안 바꾸면!
대부분의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가거주율은 60% 근방이다. 대략 6:4의 비율로 소유자와 세입자가 나뉘는 셈이다. 열 명 중 6명에게는 집값이 오르는 것이 더 이익이다. 더구나 4명의 세입자 중 1명 정도는 곧 6의 세계에 들어설 듯 말 듯 한 이들이다. 그러니 세입자의 권리에 대한 당장의 관심은 7:3 정도로 불리해지게 된다. “복지국가는 자가 소유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세입자가 마음 편하게 살아서 복지국가”라거나, “세입자가 마음 편히 살아야 내 집 마련도 수월해진다”(이상 최경호, ‘어쩌면, 사회주택’, 2024.)는 명제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심지어 많은 ‘진보’ 정치인들의 해법도 그동안은 ’40 여러분, 여러분도 빨리 60의 세계에 들어오시도록 해드릴게요’에 머물렀다. 세입자는 벗어나야 하는 것, 비정상인 것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다수결의 정치가 세입자에게 유리할 수 없는 것은, 성소수자나 장애인이나 여성의 처지와 다를 게 없다. 민주주의가 그렇다(그랬다).
‘너희들 이야기는 나중에 해. 지금 그 이야기 하면 내가 곤란해져. 그나마 나 아니면 너희 이야기를 누가 들어주니. 내가 당선되면 어련히 알아서 잘할 거야. 그러니 나를 믿고 지금은 넣어둬‘
선거는 지방선거와 총선이 번갈아 가며 2년마다 계속 또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차별 금지나 장애인 이동권이나 세입자 주거권의 실현을 2~4년 안에 완수할 수는 없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또 지역구에서 힘깨나 쓴다는 이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1명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에서는 같은 노래가 반복될 것이다.
‘아 미안해. 저들의 잔당이 남았어. 한 번만 더 참아줘. 그 이야긴 나중에 하자‘
사람들은, 2030 여성들은, 이번에 새로운 계기로, 여의도로, 광화문으로, 남태령으로 모였다. 무슨 지령이 없어도, 마치 눈덩이가 구르듯, 농민들이 고립되었다는 소식에 연대하러 간 이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을 보고, 무슨 약속도 없이 그저 모여들었다. 이런 연대가 가능하다니!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는 경탄의 눈초리가 휘둥그레하다.
모인 이들은 실제로 아름다웠고, 실제로 힘이 셌다. 트랙터는 남태령을 넘어 한강을 건넜다. 게다가 다음 선거는 ‘모두의 표가 한데 모이는’ 대통령 선거가 될 것 같다. 분위기도 이러하니, 이번 선거에서는 용케 남태령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라는 말을 덜 듣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해서 또 모일 것이지만, 그러나 항상 모여있을 순 없다. 잠을 자려면 집으로, 각자의 동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각자의 동네로 흩어진 이후에도, 다음 선거에서도, ‘나중에’ 소리를 덜 듣게 될까? 승리의 경험을 만끽한 이들은 추억과 용기를 간직하고, 저마다의 밭에 또 열심히 씨를 뿌릴 거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흩어져 있을 때도 우리가 뿌린 씨들이 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밭을 합쳐라. 지금 바로.
우리의 밭도 밭이다. 선거제도를 그렇게 바꿔야 한다. 사실 우리는 훨씬 많이 모였다. “1년 후면 다 찍어주더라”며, 탄핵의 민심을 우습게 본 어느 정치인이 있다. 엊그제엔 심지어 “트랙터에는 몽둥이가 답이다”라는 말로, 적반하장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가 지역구에서 받은 표는 46,493표다. 그보다 여의도의 우리가 훨씬 많이 모였다. 그러나 흩어지면 우리는 다시 작아진다.
‘세입자’의 권리도, ‘장애인’의 권리도, ‘젊은 여성’의 권리도, 쪼개지고 흩어진 작은 선거구에서 아슬아슬하게 당선되는 1등 앞에 무릎을 꿇는다(2020년 무소속 윤상현 40.59%, 더불어민주당 남영희 40.44%, 미래통합당 안상수 15.57%, 정의당 정수영 2.81%). 소선거구제로 흩어지면 우리는 다시 투명 인간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 위해 참아야 한다.
집에 왔다가 다시 또 투명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 표의 비례성을 제대로 높여야 한다. 뭉쳤을 때 힘 그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밭을 합쳐야 한다. 선거제도를 바꾸자. 전체 정원을 늘릴 수 있다면 지역구 250명에 비례대표 250 명 하는 식으로 비례 의석을 늘리는 방법도 좋겠다. 또는 지금처럼 작은 선거구에서 1명을 뽑는 게 아니라, 더 큰 선거구에서 5~10명 이상을 뽑는 방법도 좋겠다. (생활권 단위로 한 20명씩 뽑는다면, 권역별 비례대표제나 대선거구제나 사실상 그게 그거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다른 어떤 방법도 좋다. 남태령도 국회가 될 수만 있다면.
대통령제 대신 내각제를 하자는 이야기와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내각제를 하더라도 가까운 어느 나라와 같은 1.5당 체제라면 우리의 다양한 표정이 살아있는 국회가 되긴 어려울 것이다. 더 많은 표정이 ‘나중’으로 미뤄지지 않기 위해서는, 대통령 없이 총리를 국회에서 뽑고 당끼리 협의해서 장관을 누굴 시킬지가 아니라(내각제), 대통령을 4년마다 뽑을지 5년마다 뽑을지가 아니라(중임제 개헌), 혹은 둘을 절묘하게 합치는 방식이 아니라(이원집정부제?), 아니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국회에 더 많은 표정이 생생하게 들어가느냐가 관건이다.
남태령의 힘이 작은 선거구로 조각조각 흩어지지 않도록, 표의 비례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편하는 것. 개헌을 한다면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내각제냐 대통령 중임제냐는 어쩌면 그다음 문제다. 각 정당이 평소에도 더 많은 표정을 받들게도 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개헌과 무관하게 항상 해야 할 일이다.)
‘(가칭)더 많은 표정을 위한 개헌 추진 시민위원회’ 같은 걸 만들자.
헌재의 판결과 각 정당의 대선 준비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보여줘야 한다. 잠시 흩어지더라도 수시로 다시 모여야 한다. 내란의 불씨를 제대로 끄는지 지켜보는 눈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나중에’로 미루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의 숫자도 아주 많다고 계속해서 보여줘야 한다.
그 방편 중 하나로, ‘더 많은 표정을 위한 개헌 추진 시민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보자. 약칭은 ‘더 많은 표정 시민위원회’? 우리도 충분히 큰 숫자임을 보여주면서,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만들고 싶은 헌법의 내용을 채우는 위원회다. 선거제도 개혁은 필요조건일 뿐, 더 많은 목소리, 더 많은 표정을 담는 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니까.
그리하여 저 가련한 정치인들을 계속해서 어르고, 또 달래야 한다. 내란 동조 세력의 눈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들의 동네에서 영향력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무서워할 것은 우리고, 또 우리 덕에 안심해도 된다고 말이다. 누가 누굴 안심시켜야 할지 좀 웃기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또 그런 것 같다.
우리의 밭에도 수확할 작물이 많다고, 여기에 추수하러 와도 굶지 않을 거라고 그들이 안심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열심히 뿌리고 가꾸는 것을 넘어) 우리의 밭도 그들이 추수할 목록에 포함해야 한다. 우리의 표가 사표가 되지 않아야 한다.
서로 위성정당을 만들게 되는 지금의 이상한 변종 연동제는 ‘도로 양당제’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로 바뀌어야 한다. 1위 독식의 소선거구제가 아니라, 2, 3, 4위가 차지한 표만큼도, 그런 표정들도 마땅한 만큼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번에 헌법도 바뀔지 모른다고 한다. 좋은 기회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출범할 제7공화국은 남태령의 목소리가 온전히 국회에 들어가는 공화국이어야 한다. 하지만 맡겨만 놓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될 수도 있다. 어쩐지 저 안에선 4년제냐 5년제냐, 아니면 내각제냐 대통령제냐 하는 이야기만 나온다. 남태령의 정신으로 밀어붙여 보자. 이보세요. 남태령도 국회입니다. 문제는 더 많은 표정입니다.
농민들은 트랙터에 ‘농민 헌법’이라고 써 붙이고 나왔더라. 그런 위원회가 만들어진다면, 나는 ‘세입자헌법’ 같은 걸 만들겠다며 참여하고 싶다.
그러고보니 영웅(英雄)의 ‘웅’이 수컷 ‘웅’이네요. ‘영자英雌’라고 고쳐야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