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언론 못 믿겠다지만···저널리즘 살려야 극우 막는다. (김서중/성공회대학교 미디어콘텐츠융합학부 교수) (⌚7분)
2024년 12월 3일 이후 4개월여 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비상계엄·내란 상황은 헌재가 전원일치 판정으로 대통령 파면을 선고함으로써 외견상 일단락됐다. 하지만 파면으로 위기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극우화라는 위기는 지속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극우 세력은 계엄 선포 이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우파와 결합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의 선동, 극우 세력과 탄핵 반대 우파의 결합, 유튜버와 일부 매체의 허위조작 정보 유포 등으로 계엄선포 직후 급전직하했던 대통령 지지율이 반등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지지율 상승이 헌재의 탄핵 기각으로 이어질 거라는 우려가 팽배하기까지 했다.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극우 세력은 한·미동맹 지지, 윤석열 지지,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등등 정치 사회 인식에서 많은 부분 일치하는 국민의힘과 결합력이 강해졌다. 외려 보수 정당(국민의힘)이 극우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극우 세력 확장으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한국의 상황은 다양한 측면에서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미디어 역시 중요한 변수다. 미디어의 중심이 신문, 방송 등 소위 언론이라 불리던 전통적 매체에서 유튜브를 비롯한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동하면서 극우 세력 준동의 기반인 허위조작 정보가 만연하고, 극단적인 주장이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기존 언론의 책임도 크다. 휘트니 필립스는 자신의 책에서 트럼프 등장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공격하는 허위조작 정보를 과도하게 기사화(상품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전달하여 극우 세력의 확장에 결과적으로 동조한 언론의 책임을 지적했다. 전광훈 등 거리 극우 세력의 허위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전달한 한국 언론의 행태 또한 이와 유사하다.

기존 언론을 믿을 수 없게 된 이유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위기로 부각하는 극우 세력의 확장 또는 보수 세력 극우화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인 미디어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필요도 있다.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주권자인 시민이 주인으로서 권한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올바로 행사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은 민주주의 체제 유지와 작동의 필수적인 요소다. 시민의 능력은 올바른 판단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고, 언론은 바로 시민의 판단에 기본이 되는 정확하고 진실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는 민주주의 기제(Mechanism)이다. 이것이 저널리즘 기능이다.
기존 언론의 쇠퇴는 산업의 쇠퇴만이 아니라 저널리즘 기능의 쇠퇴를 의미한다. 새로운 플랫폼에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저널리즘 원칙이 정립되고 구현된다면 기존 언론의 쇠퇴는 언론산업의 문제일 뿐 사회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 새로운 플랫폼에서 저널리즘 기능이 구현됐다고 볼 수 없다. 저널리즘 구현을 위한 성찰의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허위조작 정보 생산의 기지가 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면서 허위조작 정보로 세력을 구축해온 극우세력의 확장이 야기할 위기를 극복하려면 기존 언론이든, 새로운 플랫폼이든 저널리즘 기능의 회복 또는 형성이 필요하다.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리라고 사회가 오랫동안 기대하고 요구했던 대상은 기존 언론이다. 하지만 언론은 쇠퇴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기존 언론의 쇠퇴는 신뢰도 저하라는 언론 내부 요인과 기술 변화로 인한 소통 중심의 이동이라는 외부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다.
혹자는 얘기한다. 기존 언론을 믿을 수 없다고. 일정 부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기존 언론의 신뢰도가 낮은 근본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지속된 반민주·독재 체제로 인해 언론으로서 전문적 능력과 저널리즘적 가치를 내재화하여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용자 관점에서 보면 언론의 존재 필요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의 기회가 적었다는 의미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점진적으로 독립성을 확보하며 성숙의 길을 모색하던 한국 언론은 외려 신뢰성이 더욱 하락하는 불행을 경험했다. 정파성이 강한 보수 언론의 왜곡보도가 시민사회의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반면 나름 독립성을 확보하여 신뢰를 얻어가던 공영방송 역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침탈과 이에 따른 정파적 왜곡보도로 신뢰성을 상실했다. 공영방송 침탈이 이뤄지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 ‘국경 없는 기자회’의 언론 자유지수는 30~40위권에서 70위로 급전직하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야 간신히 40위권으로 회복했다. 프리덤하우스의 언론 자유지수 추이도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언론 자유지수는 정치 변동을 통해 그나마 회복했지만 한번 추락한 신뢰는 쉽사리 회복하지 못했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신뢰도 지수는 문재인 정부 초기까지 조사 대상국 중 꼴찌를 기록하다, 2022년 몇 계단 올랐을 뿐이다. 수용자들의 불신, 즉 한번 형성된 인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보다 내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 선호
신뢰, 즉 경쟁력을 상실한 기존 언론의 자리는 유튜브를 비롯한 새로운 플랫폼들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매체는 수용자의 선택 가능성과 휴대성이라는 편의성, 상호작용성에서 기존 매체를 압도했다. 시간, 장소의 제약이 사라진 플랫폼에서 수많은 생산자들이 생산한 무한한 콘텐츠와 기존 언론이 경쟁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기존 매체에도 기회는 있었다. DTV(디지털TV) 도입 시 휴대성을 높일 기회가 있었지만 정책 당국의 거부로 실패했고, 뒤늦게 도입한 UHD(초고화질 해상도)는 상호작용 기술을 포함하지만 정책 무관심으로 보급이 지체됐다. 정책은 부재했고, 방송에서 기술 변화에 대응할 인력과 자원은 부당한 권력의 침투에 저항하는 데 소모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신문의 가구 구독률은 한 자리 수로 떨어졌다. TV 역시 자체 OTT(인터넷을 통해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로 대응해봤지만 넷플릭스의 시장 장악이 거세다.

선택 가능성을 높인 새로운 플랫폼에서 이용자가 일부 양질의 콘텐츠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치적이거나 상업적인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유튜버들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의 범람이다. 특히 현실에 관한 정보 제공 측면에서 오염은 심각하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이를 강화한다. 필터 버블, 에코 챔버, 확증 편향은 새로운 플랫폼에서 이용자들이 보이는 행태를 압축하는 표현이다.
그 여파는 양질의 언론이 시장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널리즘에 반하는 현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탈진실(Post-Truth)’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허위조작 정보에 대한 애초의 우려가 ‘과연 진실이 존재 가능한가’라는 회의적인 인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100% 진실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99%의 진실과 50%의 진실이 동등할까?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행태가 동등할까?

저널리즘 가치가 부정당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진실보다는 내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를 더 선호한다. 우리는 이렇게 저널리즘 기능이 붕괴된 사회가 초래할 위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언론을 살리자는 게 아니라 저널리즘 기능을 지키는 게 본질이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중요하다는 것이다.
EU 집행위원회는 매년 언론을 지원하는 정책 논의를 지속해왔다. 언론사를 살리기 위함일까? 아니다. 정치적인 보도를 하는 언론이 형성하는 공론장의 중요성 때문이다. 지금 EU의 정책은 언론사보다는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는 언론인 지원 쪽으로 바뀌고 있지만 그 방향성은 처음부터 일관적인 것이다.
언론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한국의 미디어 정책은 어땠을까? 노무현 정부는 언론 다양성을 강조했다. 작지만 건강한 언론을 지원함으로써 언론의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고 질적 성장을 지향했다. 하지만 그 정책은 기성 언론, 특히 시장지배적 위치에 있던 보수 언론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명박 정부는 공영방송을 침탈하고, 정파적이고 정치를 희화화하는 종편을 도입해 언론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문재인 정부는 부작위의 오류를 범했다. 최소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에 침탈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저널리즘 위기 극복 위한 세 가지 해법
이런 저널리즘의 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은 쉽지 않다.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조속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과제다. 그 방향은 첫째, 매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저널리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저널리즘 구현의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다.
1만여 개로 늘어난 기존 매체 전체를 대상으로 저널리즘 회복 또는 강화를 가능케 하는 해법은 없다. 시장의 저항도 완강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의 논리 관점에서 볼 때 공공선을 구현하는 언론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즉 선도 언론을 지원하는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저널리즘 기능을 구현하는 언론이 생존력은 물론 시장 선도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선도력은 경영상의 경쟁력만이 아니라 콘텐츠 경쟁력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공영방송 정책의 수립이 매우 중요하다. 미국식의 상업 모델에서 해법을 찾을 수도 있지만, 막강한 사회적 지원(재원 마련)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의 공영방송 모델이 더욱 유용하다.

양질의 저널리즘 콘텐츠 수용 경험이 건강한 시민, 건전한 공론장을 형성한다. 이를 위해 방송의 독립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외부 압력을 배제하는 제도 못지않게 언론인들의 내적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공영방송만이 아니라 전 언론의 언론인에게 부여하는 권리여야 한다. 또 방송이나 언론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 기구의 독립성 확보도 중요하다.
더불어 언론사, 언론인을 구별하지 않고 좋은 콘텐츠에 자원을 제공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특정 세력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저널리즘 가치의 실현이 현실적인 보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그것은 새로운 플랫폼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체 건강과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사회 건강성을 회복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두 번째는 매우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진실에 근거한 공론장’의 회복이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인정하는 사회문화적 인식의 확산과 정착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한 운동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공염불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이념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가치는 애초 소수들만의 메아리에 불과했지만 운동으로 보편화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진실(성)’의 회복은 시대적 요구다.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공교육 과정에서 미디어교육의 필수화다. 어릴 때부터 비판적 사고를 통해 진실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을 배운 건강한 시민이 민주주의 공론장의 중심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지금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에서 언론, 저널리즘 기능의 회복은 사회적 합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언론운동 진영과 시민운동 진영은 2019년부터 (가칭) 미디어개혁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합의 기구를 통해 미디어 과제를 논의하고 합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제도 개혁의 방향은 그 해법 모색만이 아니라 그 해법을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운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실과 진실을 전달하는 저널리즘 기능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확산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