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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사회다.

광범한 사회적 합의 하지만 ‘진행형’ 문제

그럼에도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역사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한국사회의 합의는 광범위하고, 단단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완료형이 아니다. 일제 청산이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인 문제라는 걸 상기하게 하는 살아 숨쉬는 역사적 존재가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하 ‘위안부’)다.

이 문제는 최근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검증 과정에서 불거졌고, 아베 정부가 고노 담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증폭했다. 특히 국내에선 작년 발간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출판과 판매, 광고 등을 금지해달라는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 등 9명의 가처분 신청과 명예훼손 고소 등으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box type=”info” head=”고노 담화”]1993년 8월 4일에 일본의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이 1년 8개월 동안 조사해 발표한 위안부 관련 담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했고, 일본 정부가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인정한 점에서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 이는 현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box]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국가가 개인을 성노예로 유린했다면, 그런 국가는 그 야만의 역사를 반성해야 한다. 더불어 그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어떤 이견이 생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미 다들 알고 있듯, 이 문제는 여러 이견 속에 수십 년 동안 여전히 의미 있는 결실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일제 식민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기 위해선 어떤 괴리를 넘어서야 하는지, 특히 일제 강점기 ‘위안부’ 논란의 맥락은 무엇이고, 이 문제를 둘러싼 주요 주체들 사이에서 왜 서로 다른 견해가 생겨나는 것인지, 관련 논점들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군 위안부, ‘성노동’ 아닌 ‘인권’ 문제인 이유

먼저, 일제시기 전쟁지역 ‘위안부’는 어떤 존재였는지 간단히 짚어보자.

2차대전 일본군은 전쟁지역에 위안부를 동원했다. 이는 당대 일본이 운용하던 공창제의 변형처럼 기획된 것이었는데, 명목상으로는 종군 매춘업이다. 여기에 간호, 정서적 위안 등 여성 일반의 ‘역할분담’까지 부과하려는 기획도 존재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가 운용한 ‘위안부’가 일반적 의미의 성노동 담론을 훌쩍 넘어 ‘성노예’라는 차원으로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위안부에 대한 조직적이고, 일상적인 인권 유린이 각종 증언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 첫째, 전시동원 체제의 비정상적 모집
  • 둘째, 식민병합국 국민의 차별적 위치
  • 셋째, 2차대전 일본제국군에서 극명하게 발현된 정신력 만능 사상 및 전체주의적 광기 등이 작용한 결과다.
강덕경 위안부 할머니
“라바울 위안소”, 고 강덕경(1929년~1997년) 할머니의 그림

두 갈래: 위안부는 어떻게 끌려왔고, 어떻게 대우받았나

그런 인권 문제는 크게 두 차원에서 발생했다. 이는 일제에 의해 위안부가 ‘끌려온 방식’과 일제가 위안부를 ‘대우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어떻게 끌려왔는가

먼저 끌려온 방식을 보자. 이론적으로 동원 방식은 다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1. 동원된 사람(=위안부)이 일의 성격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뜻으로 오는 경우
  2. 일의 성격에 관한 지식은 없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자의로 오는 경우 (예: 사기)
  3. 지식이 있으나 타의로 끌려온 경우 (예: 인신매매)
  4. 지식도 없고 타의로 끌려온 경우 (예: 납치)

그런데 당대의 가부장적 문화와 식민지 현실에서, 유일하게 동원의 인권침해가 상대적으로 적은 일의 성격에 관해 충분히 지식이 있고, 이를 알면서도 자의로 온 경우의 비중을 유의미하게 잡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나머지 세 가지 방법이 대부분임을 넉넉하게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동원은 누가 어떻게 한 것인가.

  1. 일본군: 변종(예를 들어, 폐업권이 없음) 공창제를 기획하여, 무모한 동원을 종용
  2. 지역 기관들: 충원이라는 실무를 맡기에, 목표 인원 채우기 등에로 무리수를 일으키는 위치
  3. 포주들: 기관을 등에 업은 포주들이 직접 사람을 끌어오고, 그에 따른 직접적 인권범죄 발생

이렇게 동원한 주체들이 상호 협력적인 분업 관계였기 때문에, 그 책임소재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 피해자 측: 일본군을 최종 주범으로 보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 일본정부 측: 일본군은 제도를 운용했을 뿐이니(납치를 했든 사기를 쳤든 각 동네 사정이고) 도의적 책임에 한정한다.

어떻게 대우했는가

일제가 위안부를 끌고 와서 어떻게 대우했는지의 문제도 비슷하다.

우선 ‘위안부’는 전선에서 성과 기타 노동을 제공하고, 부분적으로는 결과적 협력의 모양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금전 보상 문제, 일반복지(검진, 휴식보장 등)의 미비, 거부권과 해지권 등의 부재를 포함하여 민간인으로서의 전시 생존권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침해가 이뤄졌다. 설상가상으로 본국 ‘위안부’에 못 미치는 식민국민의 차별적 대우도 기본이었다.

그 결과, 평가가 엇갈린다.

  •   피해자 측: 각종 인권침해를 기준으로, ‘위안부’를 성노예라는 노예제도로 규정한다.
  •   일본정부 측: 민간업자에게 계약된 노동자 직원으로 규정한다(군이 직접 운영한 사례도 존재함에 대한 고발이 나오고 있지만).

위안부 문제를 보는 네 가지 시선

위에서 살펴본 각 행위 주체마다 다른 인식과 그동안의 대처 방식, 그리고 한일 양국의 일반적인 대중의식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종군위안부 피해자(위안부)의 입장은 국가 차원에서의 조치를 통한 법적 배상과 책임자 처벌을 원하고, 사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해 철저하게 기록할 것을 주장한다. 반면 일본 정부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영역에선 사안은 이미 완료했으며, 이를 초월한 국가 차원의 조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한다.

한국 대중은 사안 자체에 관한 세부적인 관심보다는 일제청산과 권선징악이 실현하기를 바란다. 일본 대중은 전반적으로 사안 자체에 무관심하고, 한국(대중)의 반응에만 조건반사처럼 덤덤하게 대응할 따름이다. 끝으로 한국 정부는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이 활동하기 전까지는 방치 혹은 무시로 일관하다가 그 이후는 점차 피해자와 한국 대중 사이의 어디쯤에서 여론 향배에 따라서 대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피해자도, 정부도, 대중도 단일한 집합은 아니고 위의 도식화 전반적 추세를 단순화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 차이로 인해 관련 정보 기록이나 일부분의 보상/배상이 자구 노력과 민간기금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다소 진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해결은 오랜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

절충적 해결은 가능한가

위안부 문제 해결이 계속 공회전하면서 해결방식의 괴리는 더욱 깊어진다.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사안을 감정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생겨나는 한편으로 객관이라는 미명하에 사안을 극단적인 실증주의로 접근하려는 경향도 생겨나고, 이런 형식적 객관성의 추구는 한국 특유의 태생적 극우주의와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절충적 시각을 제시하기도 한다. 과연 절충적 접근은 가능할까?

절충적 접근은 자칫하면 부주의한 개념화나 현실 인식의 안일함으로 여론의 역풍을 낳는 위험도 있다. 최근 대표적 사례로 부각된 것이 바로 박유하 교수의 연구다. 소송당한 책이 상대적으로 자료 중심이라면, 최근 발표 논문은 박유하의 입장을 더 선명하게 부각한다.

박 교수의 연구는 납치되고 유린당한 소녀의 원한으로 이미지화된 것보다는 더 복잡한 양상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포스트식민주의적 접근에 기반한다. 엇갈리는 시각들에 대한 이해의 기초, 한국군 매춘 문제 청산 등 확장할만한 미덕이 있는 연구 성과인 셈이다.

박유하의 한계, [제국의 위안부]를 넘어서

그러나 박유하는 이런 시각을 풀어나가고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것에 있어서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노출했다.

첫째, 몇몇 전복적 키워드(“매춘”, “동지적 관계” 등)를 도발적으로 강조하면서 일반적 인식의 전복을 목표하다 보니, 예외적 사례와 전반적 침해 현실의 경중을 왜곡할 수 있다.

둘째, 제국주의, 가부장제 같은 추상성에 대한 의존이 지나쳐서 그 개념의 실제 행위자(agent)들에 대한 책임을 희석하는 문제가 있다. 즉 복잡한 양상이니까, 더 섬세하게 케이스 단위로 따져가며 일본정부는 물론이고 여러 연루자들을 모두 꿇어 앉히자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충하니까 그냥 대충 먼저 용서하자로 가버리는 실천적 오류가 발생한다. 절차가 끝났다고 보이는 것은 그냥 끝난 것으로 하자는 식으로 해결책의 방향성이 기본적으로 일본정부 입장과 동일한 것도 심각하다.

셋째, 정대협의 비타협적 자세에 대한 비판에 바빠서(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 개개인의 의지를 왜곡한다고 간주한다) 그들의 요구사항들이 실제 결국 필요한 지향이라는 (성취하기 어렵다 한들) 간단한 사실마저 흐려버린다.

이런 여러 문제점의 결과, 정작 피해자들이 등 돌리게 만들고, 일련의 유의미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관심이 다시금 모일수록, 원래 계속 해왔고 해야 하는 것을 챙길 타이밍이다. 실제로 피해자들이 당한 피해를 중심으로 그런 짓들이 가능했던 맥락들을 집요하게 끄집어내고 각자의 책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책임 인정을 요구하는 것 말이다. 여론으로, 법정에서, 대중문화로, 학술연구로 모든 것을 동시에 더 집요하게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과 사이트

  •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JPNews, 2010.04.22) / 구 일본군 군속의 위안소 실태 고발
  •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식 홈페이지
  • FIGHT FOR JUSTICE (일본군 ‘위안부’ 문제 웹사이트 제작위원회)
  • 위안부”리포트 연재 페이지 (정경아 / 오마이뉴스)
  • 박유하 교수 페이스북 / 관련 입장, 토론 등이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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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일리 있는 반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다시 약간 보론을 하자면,

    – 첫째: 이 부분을 문제점으로 꼽은 것은, 결국 피해자와 주변 사회에는 대한 키워드로서의 규정이 가장 강한 임팩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백퍼센트 저항만 하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동지적 관계’라는 개념화를 했으나, 조작적 정의의 틀이 아니라 실제 사회적 언어관습에서라면 ‘동지’를 나타낼 뿐입니다. ‘협력을 학습당한 인질 관계’ 같은 더 엄밀하게 구체적 방식이 바람직했겠죠.

    – 둘째: ‘최근’ 논문이라는 표현은 확실히 에러군요. 논란이 되는 이 분의 지금 입장을 잘 나타내준다는 생각이 앞서는 바람에;; // 논문에서 드러났던 문제는, 용서와 사죄의 순서를 해체하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그 ‘조건부 교환논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문제를 경시하는 것이죠. 박유하 교수는 현재도 “총체적 사죄의 마음을 인정하자”로 스스로의 논지를 요약하고 계시기에 당시 논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 셋째: 현 정대협의 행보가 고노담화와 기금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자는 국회가 아닌 특정 내각정부의 발표고, 후자는 정부가 명시적으로 주체로 나선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형식이기에 미흡하다고 보는 것일 따름이죠.

    – 피해자들이 등돌렸다는 것은 실제 등을 돌리신 분들의 현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일 따름입니다. 물론 단일 개체가 아니니, 그 안에서 개인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겠죠.

  2. 전체적으로 잘 정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박 교수의 책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선 이런저런 반론이 있을수 있겠습니다.

    첫째에서 지적하신 현실 왜곡 우려에 대해서는, 몇몇 키워드를 ‘도발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임팩트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현실 인식의 전환을 목적으로 한 부분이니만큼 상대적으로 예외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보이는 것은 어쩔수 없는 측면이 있어서 이점을 심각한 문제점으로 보는 것은 약간 가혹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러한 독해의 가능성을 박 교수도 인지하고 있어서 이것들이 피해를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적인 우려와는 달리 이 부분은 오히려 위안부 부정론에 대한 반론으로 적절한 반론으로 기능할 것으로 보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위안부 부정론자들이 이러한 일부 사례를 들어 반론한다 해도, 그런 사실이 있다 해도 위안부가 받은 피해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시점과 논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둘째에서 지적하신 책임 희석 문제에 관해서는, 추상성에 의존한 부분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당사자(포주)에 대한 책임을 묻는 면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쪽에 집중한 것이 더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즉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을 먼저 묻게되면, 현재에 와서는 이러한 개인들을 특정하기가 어려우니 결과적으로 흐지부지된다는 것이죠. 다만 이 책에서는 그렇게 개인책임을 묻기 어려우니 포괄적인 사과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먼저 대충 용서하자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링크하신 논문(최근이 아니라 2006년입니다)에서 먼저 용서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신 모양입니다만, 여기서는 일본 정부의 새로운 사과가 필요하다고 적고 있고 박노자 교수에 대한 반론글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저 논문은 ‘화해를 위해서’의 문맥에서 집필된 것인듯 한데, 이것도 사실 적절한 사죄는 받아들일수 있도록 하자는 정신적인 측면의 이야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에서 지적하신 정대협의 요구사항의 타당성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을수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지향점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그리고 재발 방지라 할 수 있을텐데, 이것들에 관해서는 90년대의 일본정부가 고노담화와 기금 등을 통해 어느정도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이런 노력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완전히 무시한 현재의 운동은 과연 완전히 타당하다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박 교수도 운동의 지향 자체에는 공감하지만 방법론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것들이 위안부 할머니들 개개인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었는지가 의문인 상황인데, 이런점은 당사자주의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이 피해자들을 등돌리게 만들었다고 적으셨는데, 과연 피해자들이 이 책을 직접 읽고 주체적으로 독해하여 그렇게 된 것인지에 대해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영훈 교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경우에는 사과 요구가 먼저 있을법 한데 갑자기 소송으로 가게 된 점에서 지원단체의 입김이 작용했을 수도 있어 보이는 상황에서 너무 단정적으로 적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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