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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에르도안이었나: 2. 케말이 쏘아 올린 6개의 화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881년 5월 19일 현재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가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또 청년튀르크당에 합류할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그가 ‘터키인의 아버지’인 아타튀르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유능하기는 했으나 국가를 운영하는 위치와는 거리가 전혀 멀었던 장교에 불과했다.

케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 5월 19일~1938년 11월 10일, 향년 57세)

1917년 갈리폴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사람들은 그를 ‘케말 파샤’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똑같이 ‘파샤’(지도자)라고 불리웠어도 당시 국가 지도자였던 엔베르 파샤, 제말 파샤, 탈라트 파샤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1918년쯤 되자 오스만 제국의 전선이 사실상 붕괴하게 되면서 아타튀르크를 위한 무대들도 갖춰지기 시작했다.

갈피폴리 전투에서 전선을 시찰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15)

갈피폴리 전투에서 전선을 시찰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915)

갈갈이 찢겨진 오스만 제국

1918년 10월 30일,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무드로스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말이 정전 협정이었지 항복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이스탄불에 연합군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아랍 지역에 대한 통제권은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600년 제국의 역사가 이제 정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1919년에 마침내 연합군 모두를 벌벌 떨게 했던 독일 제국마저 굴복하자, 오스만 제국은 전리품이 되어 테이블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연합국들은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 가담한 것을 처벌하고 다시는 반항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분할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 기준은 연합국 자신들의 이익과 세력권이었다. 이는 1920년 7월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에서 명문화 되었다. 합의된 분할안에 따라서, 서남부 아나톨리아는 이탈리아가, 시리아와 인접한 지역은 프랑스가, 이라크와 인접한 지역은 영국이, 발칸 반도 영토는 그리스가, 동부는 신생 아르메니아가 차지하게될 것이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술탄 메흐메드 6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연합군의 요구안을 묵묵히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세브르 조약에 따른 아나톨리아의 분할 판도

세브르 조약에 따른 아나톨리아의 분할 판도

수많은 오스만인은 자국이 갈갈이 찢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몇 장교단은 정부 방침에 반항하기로 결정했다. 아타튀르크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아나톨리아 각 지역의 저항세력들을 결집해 외국 간섭자들과 국내 부역자들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이미 1920년 4월, 앙카라에서 터키 대국민의회가 소집되었다. 지도자로 선출된 사람은 당연히 아타튀르크였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당연히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을 뒤집고 새판을 짜는 일이 되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가 아니라 신생 터키 공화국의 지도자로서 맡아야하는 임무였다.

우선 아타튀르크는 소련과 힘을 합쳐 동쪽의 아르메니아를 다시 짓밟았다. 그리고 서쪽으로 눈을 돌려 그리스군, 프랑스군, 영국군 등과 전투를 개시했다. 서방 연합군들의 경우 이미 오랜 기간 전쟁으로 피로도가 잔뜩 쌓였기 때문에 터키에서의 계속되는 전쟁에 버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1921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앙카라 정부를 인정하고 후퇴했다. 그리스는 자국의 핵심적 이익이 걸려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해안에서 더 오래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도 터키 공화국군의 분전에 결국 패배하고 에게헤 서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남은 열강인 영국도 슬슬 앙카라 정부를 인정하고 협상에 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터키 공화국의 탄생 

마지막으로 아타튀르크에게 남은 것은 이스탄불이었다. 여기에는 아직 유약한 오스만 황실이 버티고 있었다. 영국 측도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독립된 정부가 하나씩 있는 것에 대해 교통정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아타튀르크의 해법은 간단했다. 메흐메드 6세를 술탄에서 폐위하고, 오스만 왕조를 터키에서 영원히 축출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오스만 제국은 터키의 전근대성과 구태의연함, 동양적 후진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왕실은 외국 침략자들에게 놀아나면서 다수 터키 민족을 배반하기까지 했다.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의 대부분과 발칸 반도의 이스탄불을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정부는 ‘터키 공화국’이 되었다. 1922년 터키 공화국은 다시 연합국들과의 협상에 착수했고, 1923년에 로잔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로잔 조약을 통해 터키 공화국은 마침내 국제적으로 최종적인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국내 정책에 대한 완전한 자주권도 회복할 수 있었다.

로잔 조약(1923)에 의해 결정된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의 국경선. 이 조약으로 1920년 오스만 당국과 연합군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뒤엎고, 현재의 터키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로잔 조약(1923)에 의해 결정된 터키, 그리스, 불가리아의 국경선. 로잔 조약으로 1920년 오스만 당국과 연합군이 체결한 세브르 조약을 뒤엎고, 현재의 터키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아타튀르크가 착수한 것은 대대적인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터키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서는 근대 국가로 재탄생해야했다. 그래서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재정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과거 이슬람 제국으로서 오스만 제국은 이제 ‘아나톨리아에 있는 튀르크족의 국가’로서 터키로 완전히 넘어갔다.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배경이기도 했던 청년튀르크당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케말리즘: 6개의 화살 

튀르크 민족성의 강조는 아타튀르크가 추진한 서구화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이러한 아타튀르크의 정치적 노선은 ‘케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되어 터키 공화국의 국시가 되었다. 그는 케말리즘의 구성요소를 ‘6개의 화살’로 개념화했는데 각 화살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아타튀르크가 창립한 공화인민당 (1923년 9월 9일 인민당으로 시작해 1924년 10월 공화인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함. 당연히 터키 최장수 정당)

아타튀르크가 창립한 공화인민당 (1923년 9월 9일 인민당으로 시작해 1924년 10월 공화인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함. 당연히 터키 최장수 정당)

  1. 공화주의
  2. 인민주의
  3. 세속주의
  4. 개혁주의
  5. 민족주의
  6. 국가개입주의(etatism)

아타튀르크는 각 화살의 이상을 실제 정책으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우선 공화주의에 따라서 아타튀르크는 군에서 물러나 공화인민당을 통한 문민통치를 시작하였고, 남녀에게 모두 투표권을 부여하였다. 개혁주의는 비폭력적인, 그러나 전면적인 아타튀르크의 서구화 개혁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인민주의는 국가가 사회의 최말단까지 파고들어 사회를 선도, 계몽하는 사업들을 개시할 때 근거로 활용되었다.

물론 이 중 대내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것은 세속주의였다. 아타튀르크는 프랑스가 혁명 이후에 도입한 가장 적극적인 세속주의 정책인 ‘라이시테'(laïcité)를 도입하여 터키에 강제했다. 요점은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공적 영역에 개입,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슬람교에 근거한 수많은 전통과 관례들이 정부의 명령에 의해 사라졌다. 가장 상징적인 차원에서 632년 아부 바크르부터 1,300여년을 이어오던 칼리프 직위는 1924년에 폐지되었다. 샤리아(شَرِيعَة; 이슬람교의 율법과 규법체계)는 스위스식 민법으로 대체되었다. 샤리아에서 4명까지 허용하던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었다. 형법과 상법은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례들을 참고했다.

라이시테

그 밖에도 금지 혹은 폐지가 세속주의 정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종교를 담당하던 직위인 셰이훌이슬람은 폐지되고, 종교부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공적 장소에서 히잡을 착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중절모를 본따 공식화한 모자인 페즈(Fez)도 금지되었다. 세속주의 정부는 과거의 빈자리에 새로운 것을 도입하기도 했다. 우선 태음력인 이슬람 달력을 세계 표준인 그레고리안 달력으로 교체했다. 또한 아랍어로만 쓰게 하고 번역조차 금지했던 코란을 터키어로 번역시켰다. 그리고 아랍어로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외치는 전통인 아잔을 터키어로 외치도록 강제했다.

공적 영역에서 이슬람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민족, 즉 튀르크였다. 아타튀르크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의 ‘순수한 튀르크’에 집착했다. 과거 돌궐인부터 시작되는 튀르크 민족의 계보가 새삼 강조되기 시작했다. 언어와 문자개혁 프로그램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튀르크어를 표기하기에 부적절한 아랍문자를 라틴문자로 교체했고,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은 어휘들을 ‘순수 터키어’ 낱말로 교체했다. 적절한 낱말을 찾을 수 없다면 이미 사멸한 단어에서 찾기도 했고, 고대 튀르크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며 창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부터 몽골, 헝가리까지 포함하는 ‘범 투란 민족’들과의 유대를 강조하면서 아랍, 페르시아와의 연계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터키 문자를 시연하는 아타튀르크 (1928)

새로운 터키 문자를 시연하는 아타튀르크 (1928)

과거 오스만 시대의 개혁을 일정부분 계승, 부정하면서도 훨씬 고강도로 진행된 아타튀르크의 개혁은 금새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교육 면에서 가장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났다. 일단 아랍문자에서 라틴문자로, 오스만어에서 터키어로의 개혁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교육의 기회는 여성에게도 주어졌고, 그럼으로써 여성이 사회에서 맡는 역할도 더욱 많아졌다. 정치권, 법조계 등에 여성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 시절 보였던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성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923년부터 1940년까지 학교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났고 학생의 수도 300% 가깝게 늘어났다. 대외적으로도 터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터키 스스로도 자신들의 세속주의적 서구화 프로그램을 널리 홍보했다. 1932년에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에 참가한 케리만 할리스(Keriman Halis)는 터키의 서구화를 상징하는 대표나 다름 없었다. 1934년에는 아랍식 이름 대신 서구식 이름과 성씨 체계를 도입했다. ‘아타튀르크’라는 성도 이 때 나온 것이었다.

터키 공화국의 '세속주의'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상징이 된 '미스 유니버스' 케리만 할리스(1913년 2월 16일 ~ 2012년 1월 28일)

미스 유니버스에 터키 대표로 출전해 터키의 ‘세속주의’를 전 세계에 알린 케리만 할리스(1913년 2월 16일 ~ 2012년 1월 28일)

농민 대중과 갈라진 엘리트 

하지만 아타튀르크의 이와 같은 유산은 그림자 또한 만들어냈다. 첫째로 그의 개혁 프로그램들이 사회의 풀뿌리까지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시행되긴 했어도 여전히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사실 터키는 행정력이 너무 부족하여 드넓은 국토의 구석구석까지 정책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다양한 세속주의 프로그램들은 이스탄불, 앙카라 같은 중요 도시나 서부 해안지대에서나 엄격히 적용되었다.

남한 면적의 8배 가까이 달하는 광대한 아나톨리아(Anatolia;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터키의 넓은 고원 지대)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질서가 온존했다. 아타튀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아무리 고대 돌궐 제국의 유산을 강조해도 국민 대다수는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를 썼던 이슬람의 위인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토지개혁도 실패해 지주들, 울라마(종교지도자)들은 여전히 지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최소 600년 간 뿌리내렸던 전통을 미약한 행정력을 지닌 신생 국가가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그렇게 다수 농민 대중과 세속주의 엘리트들은 이제 과거의 유대관계를 상실하고 각자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Sam Greenhalgh, Anatolia, CC BY https://flic.kr/p/K3HKW

Sam Greenhalgh, “Anatolia”, CC BY

오래된 악몽: 쿠르드 문제 

이슬람을 지우고 부자연스럽게 이식한 튀르크 민족 정체성은 또 다른 그림자도 만들어냈다. 동부 산악지대에 주로 거주하던 쿠르드인이 터키 공화국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 오스만 제국은 ‘튀르크인의 제국’을 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쿠르드인은 일정 수준 자치를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 정체성의 핵심은 터키어에 있다고 생각한 아타튀르크가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쿠르드인들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일찍이 아르메니아인들도 분쇄한 그였다. 아타튀르크는 쿠르드인들을 ‘산악 튀르크인’이라고 규정하고 쿠르드인의 존재를 애초부터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저 ‘산에 사는 터키인’이었다. 쿠르드어나 쿠르드 민족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쿠르드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을 빼앗기고 새로이 터키 공화국의 행정 질서를 이식하려는 움직임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쿠르드 민족주의 정서는 공화국 정부가 강제하려고 했던 세속주의에 대한 반감과 결합했다. 이런 이유들로 터키 공화국 건국 직후부터 동부의 쿠르드 지역을 중심으로 잦은 소요 사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AK 복제품인 56-1식 소총으로 무장한 쿠르드족 병사.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서 흩어져 사는 이란계 산악 민족이다. 하지만 케말에게는 그저 '산에 사는 터키인'일 뿐이었다.

AK 복제품인 56-1식 소총으로 무장한 쿠르드족 병사.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서 흩어져 사는 이란계 산악 민족이다. 하지만 케말에게는 그저 ‘산에 사는 터키인’일 뿐이었다.

1934년에 제정된 재정착법(Iskan Kanunu)은 쿠르드인들의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 터키어의 “이질적 방언”인 쿠르드어를 쓰는 인구를 분산 배치해서 터키인들에게 동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정책들에 대한 반감이 겹쳐 일어난 데르심 반란을 아타튀르크는 철권으로 진압했다. 최소 1만 명에서 최대 4만 명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인들이 터키군에 의해 죽었다.

이런 강경책은 아타튀르크와 터키 정부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당시 야전에서 폭격 작전을 지휘했던 아타튀르크의 수양딸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은 이후 터키 정부에 의해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었다(지금도 이스탄불에는 그의 이름을 딴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이 있다).

터키 최초의 여성 공군 비행사로 쿠르드 폭격에 참여한 사비하 괵첸(1913년~2001년). 그의 이름을 딴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이 이스탄불에 있다.

터키 최초의 여성 공군 비행사로 쿠르드족 공중 폭격을 지휘한 사비하 괵첸(1913년~2001년). 그의 이름을 딴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이 이스탄불에 있다.

계획경제의 실패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제 문제가 있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국가개입주의(etatism), 혹은 국가사회주의가 문제였다.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이 자본을 유럽 열강에 의존했기에 결국 멸망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자본들이 오스만 제국 각지의 소수민족들과 연을 맺고 관세 없이 들어와 제국을 헤집었다.

1838년 영국과 체결한 관세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관세를 부과할 수도 없었다. 관세를 폐지한 결과 오스만 제국의 농업과 산업 모두 세계경제에 통합되며 번창할 수는 있었지만, 경제적 자주권을 빼앗겼다는 불만은 점점 깊어져 갔다.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같이 열강을 등에 업은 소수민족들에 대한 분노도 점차 쌓여가고 있었다.

국가개입주의는 이러한 오스만 제국 시절의 경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관세장벽과 무역장벽을 통해 터키의 산업과 재정을 다시는 외국에 넘기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30년대에 개입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대공황(1929)과 소련의 인민경제 5개년 계획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서방 국가들은 대공황에 대한 대응으로 무역장벽을 쌓으며 터키의 수출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는데, 소련은 국가 개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아타튀르크도 소련을 모방하여 자체적인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국가 주도로 자본을 동원하여 공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제철소, 유리 공장, 시멘트 공장 등이 야심차게 건설되었다.

소련 국민경제 5개년 계획. "계획은 - 법, 할당량 달성은 - 의무, 할당량 초과는 - 영광!"

소련 인민경제 5개년 계획.
“계획은 – 법,
할당량 달성은 – 의무,
할당량 초과는 – 영광!”

하지만 그 성과는 전혀 좋지 못했다. 물론 인상적인 성장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30년대를 거치면서 터키는 근대적 성장을 위한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래도 터키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썼다고 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먼저 중공업을 우선하는 국가개입주의로는 아나톨리아의 광활한 땅에 잠들어 있는 농업 잠재력을 전혀 활용할 수 없었다. 마치 세속주의 정책이 동부와 내륙 아나톨리아를 그저 뒤에 버려놓고 진행된 것처럼, 경제정책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대다수 농촌 지역은 여전히 과거 오스만 시절의 전근대적인 모습, 노동집약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프로그램도 입안, 집행되었지만 지주들의 기득권은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아타튀르크는 자체적인 공업 기반을 만들기 위해 농업에서 얼마 안 되는 자원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자본의 진출을 차단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키 관료들의 미숙한 경제운영으로 자원은 비효율적으로 배분되었다. 다른 수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진 ‘수입대체산업화’를 둘러싼 낭비는 터키라고 전혀 예외가 아니었다.

터키 노인 고독 슬픔 외로움

터키의 국부, 현대화의 기수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국부이자 현대화의 기수라고 평가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비슷한 크기와 위상을 가진 중동의 다른 두 국민국가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랬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는 아타튀르크를 모방한 근대화 프로젝트를 실시했으나, 터키의 프로젝트보다 훨씬 미약한 수준에서 진행되었고 반발은 더욱 거셌다. 이집트의 파루크 왕도 사정은 비슷했다. 두 나라에서는 누구도 아타튀르크만큼 국내의 반대자들을 제압할 강력한 권위를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정당에 기초한 입헌주의를 정착시키고 국민교육을 확대할만한 비전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터키 공화국의 성과는 오스만 제국이 19세기에 진행한 근대화 프로그램의 유산을 아타튀르크가 착실히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카자르 왕조나 메흐메드 알리 왕조의 이집트에서는 그런 유산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타튀르크 개인의 카리스마는 확실히 터키를 중동, 이슬람권에서 가장 현대화된 국가로 거듭나게끔 했다.

1938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서구화 개혁의 상징인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눈을 감았다. 아타튀르크는 독립전쟁의 지도자로 부상한 1920년부터 1938년까지 약 20년에 걸친 세월 동안 터키의 국부이자 지도자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터키는 놀랍도록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말년 모습.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말년 모습.

터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변하지 않은 것도 너무나 많았다.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는 많은 것이 변했지만 내륙의 토카트, 시바스, 디야르바르크 같은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에서는 800년에 가까운 이슬람 전통이 여전히 살아숨쉬었다. 또 그는 과거의 문제를 풀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풀어놓았다. 그는 터키어를 쓰는 터키 민족이 주도하는 강력한 국가를 원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쿠르드인이 신생 정부에 엄청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자주적인 경제를 만들기 위한 관료집단의 야심은 오히려 활력없는 계획경제로 돌아왔다.

아타튀르크의 유산은 그의 사후 80년 간 터키 정치를 규정해왔다. 거기에 아타튀르크의 후계자들은 곧이어 발발할 제2차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환경에도 적응해야만 했다. 이러한 대내외적 요소들이 합쳐져 현대 터키의 가장 기초적인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 도전을 처음 감당해야할 사람은 독립전쟁 시 아타튀르크의 전우였던 제2대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였다.

무스타파 이스메트 이뇌뉘(터키어: Mustafa İsmet İnönü, 1884년 9월 24일 ~ 1973년 12월 25일)

무스타파 이스메트 이뇌뉘(터키어: Mustafa İsmet İnönü, 1884년 9월 24일 ~ 1973년 12월 25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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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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