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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에서 이어집니다. 

이번 글에선 크라센(Krashen)의 인풋 가설 중 두 번째 하위 가설인 ‘자연 순서 가설’에 관해 알아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크라센의 언어습득론은 크게 다섯 가지 하위 가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습득-학습 구분 가설 (The acquisition-learning distinction)
  2. 자연 순서 가설 (The natural order hypothesis) 오늘 주제!  
  3. 모니터 가설 (The Monitor hypothesis)
  4. 인풋 가설 (The input hypothesis)
  5. 정의적 필터 가설 (The Affective Filter hypothesis)
외국어 습득은 계단을 오르듯 '자연스러운 순서'가 있다?
외국어 습득은 계단을 오르듯 ‘자연스러운 순서’가 있다?

외국어 습득에는 자연스러운 순서가 있다 

그의 두 번째 가설은 “자연 순서 가설(the natural order hypothesis)”입니다. ‘교육과 같은 특별한 개입이 없을 때 습득하는 순서’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데요. 1970년대 제2언어 습득 연구의 큰 흐름을 이루었던 문법형태소(grammatical morphemes) 습득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제시된 가설입니다.

이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법형태소’가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살짝 돌아가지만, 크라센이 주장하는 근거를 살피기 위해서는 필요한 단계입니다(형태소 개념에 익숙하신 분들은 건너뛰셔도 좋겠습니다.).

형태소란 의미를 가진 최소의 언어 단위를 말합니다. 영어의 예를 들어 볼까요? 영어에서 /k/ 소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한국어에서 /ㄱ/ (기역 소리)는 무슨 뜻인가요?

이들 질문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그런 게 무슨 뜻이 있어?’라고 반응하셨다면 형태소의 의미를 정확히 짚으신 겁니다. 사실 /k/ 소리나 /ㄱ/ 소리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없죠.

“Okay”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어죠. 그래서 ‘1 형태소 = 1 단어’가 성립합니다.

그럼 형태소는 단어일까요? 이 또한 좋은 질문입니다. 단어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당연히 형태소를 포함하고 있지요. 하지만 다음 예들을 통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 (한국어에서 ‘강조’를 표현) 개- 예: 날씨 개좋아, 그 배우 얼굴 개잘생김.
  • (한국어에서 ‘반대’를 표현) 반- 예: 반사회적, 반문화적
  • (한국어 단어) 도시락, 소풍, 자동차
  • (영어에서 ‘반대’를 표현) un- 예: undo(컴퓨터에서 방금 한 행동을 취소할 때 쓰는 메뉴 이름), uncover (발견하다)
  • (영어에서 ‘복수’를 표현) -s 예: girl-girls, pencil-pencils
  • (영어 단어) tree, car, ice
  • (영어 단어) reviewer

이런 표현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습니다. 이들 중 ‘자동차’처럼 혼자 쓰일 수 있는 단어도 있고, ‘un-’처럼 독립적으로 쓰일 수 없는 표현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들에겐 뜻이 있다는 겁니다. 즉, 온전한 단어가 하나의 형태소로 이루어져 있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 제시한 ‘reviewer’와 같이 복수의 형태소가 모여 하나의 단어를 이룰 수도 있는 것(re+view+er)입니다. 이상의 예에서와 같이 뜻을 가진 최소의 단위를 형태소(morpheme)이라고 부릅니다.

형태소는 한 단어일 수도 있고, 한 단어의 부분일 수도 있다. 형태소는 '뜻'을 가진 최소한의 단위다.
형태소는 한 단어일 수도 있고, 한 단어의 부분일 수도 있다. 형태소는 ‘뜻’을 가진 최소한의 단위다.

문법형태소

형태소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문법형태소(grammatical morpheme)’의 뜻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형태소 중에서 문법과 관련된 기능을 하는 부류를 말하죠.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 -s (명사의 복수를 나타내는 s)
  • -s (동사의 3인칭 단수를 나타내는 s)
  • -ing (동사의 현재 진형형에 붙는 -ing)
  • -ed (동사의 과거형 및 과거분사형에 붙는 -ed)

복수, 3인칭, 현재 진행, 과거 등이 문법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표현해 주는 형태소들을 ‘문법형태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Tree’나 ‘car’와 같은 일반적인 단어들과는 다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footnote]형태소에 관해 더 알고 싶은 ‘위키백과 – 형태소’를 참고하세요. [/footnote]

로저 브라운의 형태소 연구

1970년대 문법형태소 연구의 물꼬를 튼 학자는 로저 브라운(Roger Brown)이었습니다. 이후 연구자들은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사람들이 그들의 모국어와 관련 없이 비슷한 순서로 문법 형태소를 습득한다는 점을 밝혀냅니다. 여러 연구들에서 도출된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번이 가장 먼저 습득되고 이후 순서대로 습득되며, 같은 번호 안에서는 순서가 뒤바뀔 수 있습니다.)

  1. 현재 진행형 ~ing / 복수형 / be 동사 중 “He is rich.”와 같은 쓰임.
  2. 현재 진행형을 만드는 조동사 역할의 be 동사. 예를 들어 “He is running.”에서 is 동사.
  3. 관사 a와 the
  4. 동사의 불규칙 과거형
로저 브라운(Roger Brown, 1925-1997). 1962년에서 1994년까지 하버드 대학의 사회심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언어습득 순서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로 족적을 남겼다. (출처: nap.edu/) https://www.nap.edu/read/9681/chapter/3
로저 브라운(Roger Brown, 1925-1997). 1962년에서 1994년까지 하버드 대학의 사회심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언어습득 순서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로 족적을 남겼다. (출처: nap.edu)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

크라센이 기존 연구에 기반하여 주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 연구 대부분이 영어를 일상으로 사용하는 제2언어 상황(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ESL”과 “EFL”이라는 기본 용어 두 가지를 살펴봅시다.

  • 제2언어(second language): 일상생활에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영어를 배웠다면 영어는 제2언어(English as a Second Language; ESL)가 된다.
  • 외국어(foreign language): 일상생활에서 해당 언어를 사용하지 않 환경. 한국 상황에서 영어는 외국어(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EFL)가 된다.

즉, 크라센의 주장은 대개 영어를 제2언어(second language)로 배우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 이민을 가서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소통하며 영어를 배운다면 브라운의 연구가 말하는 순서대로 영어를 습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어떨까요? 한국에서도 3~4세부터 영어를 배우는 사람과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시작하는 사람의 습득 순서가 같을까요? 지금은 거의 모든 국민이 영어를 배우지만, 그렇지 않았던 세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놀이와 애니메이션으로 영어를 꾸준히 접한 학습자와 문법서의 단원을 하나하나 ‘클리어’한 학습자가 같은 습득 과정을 거칠까요? 그렇다고 보긴 힘들 겁니다.

예를 들어 관사의 습득을 생각해 봅시다. 크라센에 따르면 관사 ‘a/the’는 동사의 불규칙형 이전에 습득됩니다. 정말 그런가요? 여러 연구자들은 한국인이 끝까지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는 문법 요소로 관사 체계를 듭니다. 이에 비해 동사의 불규칙형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배우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이번 생에 관사를 마스터하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아무리 공부해도 이번 생에 관사를 마스터하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결론적으로 ‘누가 배우든지 영어를 습득하는 순서는 같다. 이는 문법형태소의 습득에 관한 연구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다.’는 크라센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이 교육이 아닌 습득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소통을 통해 영어를 배울 경우를 한국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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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영어공부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성찰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는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²

  1. 외국어를 배우는 두 가지 목적
  2.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3. 영어는 인풋? – 2.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
  4. 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5. 필사, 영작문에 도움이 되나요?
  6. 영어는 인풋? – 4. 외국어 습득엔 ‘순서’가 있다?
  7. 영어 이름, 꼭 따로 필요할까?
  8. 한국식 영어 발음, 꼭 고쳐야 할까요?
  9. 영어교육과 홍익인간의 관계
  10. 쓰기의 마법: 생각과 글쓰기의 관계
  11. 언어는 습득하는 게 아니라고?
  1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3. 영어는 인풋? – 5. 인풋 가설의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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