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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침묵: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 논란에 관하여

“최근 숙명여대에 성전환자 수험생이 합격한 일을 둘러싸고 교내외 여성주의 단체가 앞다퉈 찬·반 견해를 내놓고 있다. 성전환자의 입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과 환영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며 갈등이 커지는 형국이다.”

-중앙일보, 숙대 성전환 합격자에 두쪽난 여대…”女권리위협” vs “환영” (오원석, 2020. 2. 4.)

나는 숙명여대를 “두쪽난 여대”라고 표현한 기사 제목에 동의할 수 없다. 기사에서 동의할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식적이고 경험적인 추론을 동원해 ‘가정’해서 기사 제목을 썼더라도 나는 그 기사 제목의  틀짓기(프레임)를 우려한다. 그 제목은 마치 성전환자의 입학이 ‘찬반 토론’이 가능한 ‘정책적 선택’, ‘철학적 판단’의 문제인 것처럼 설정해(“여 권리위협” vs “환영”)1 마치 ‘혐오’를 선택가능한 철학적이거나 정책적인 ‘입장’인 것처럼 독자가 착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그 제목은 ‘혐오(세력)’를 과잉대표하는 효과를 만들어 그런 혐오가 널리 사회적으로 세력을 가진 것처럼, 그리하여 그런 혐오집단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런 혐오가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Steven Depolo, CC BY https://flic.kr/p/6Z3LfZ

항상 ‘혐오(세력)’은 과잉대표된다. (출처: Steven Depolo, CC BY)

과잉대표되는 ‘혐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트랜스젠더를 반대한다’는 문장은 비문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성립가능한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내용으로서는 성립할 수 없는, 성립해서는 안 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즉, 트랜스젠더는 서로 입장을 두고 토론해야 하는 철학적이거나 정책적인 판단 문제가 아니다. ‘트랜스젠더 반대’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혐오와 증오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에게는 부끄럽고, 쪽팔린 일이며, 그런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래야 한다.

왜 그런가. 왜 저들의 반대는 철학이나 정책이 아니라 그저 혐오인가.

성적 지향(性的指向, Sexual orientation)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2 성적 지향은 어떤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극소수이지만, 과잉대표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래디컬’ 페미니즘 단체의 무지에 바탕한 ‘징징거림’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미 의학적으로는 논란이 종식된 문제로 대다수 정신의학 단체와 심리학 단체의 ‘공식 입장’이다. 더불어 이런 과학적(의학적) 결론은 사회적인 제도로서 다수 판례로 표현되고 있고, 차별금지법과 같은 포괄적인 인권법의 형태로 제정되는 과정에 있다(업데이트: 엄밀하게 말해서 ‘트랜스젠더’는 성적 지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성정체성의 문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래 ‘업데이트’ 박스에서 후술한다).

“‘성적 지향’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특정한 성적 지향의 발달에 관한 메커니즘은 아직 불불명하다. 하지만 현재 이 분야 논문과 학자 대부분은 성적 지향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개인은 동성애자 또는 이성애자를 선택하지 않는다.(2004, 미국 소아과학회)3

위 입장과 궤를 함께 하며 성적 지향을 ‘개인의 특징’으로 볼 수 없다고 발표한 영미의 대표적인 정신의학 단체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개인의 특징’은 그 개인이 스스로 자기 책임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적 의미를 내포한다.

  • 미국심리학회(2006)
  • 미국정신의학회(2006)
  • 미국립사회사업가협회(2006)
  • 영국왕립정신과협회(2007)
성적 지향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적 지향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그 메커니즘은 아직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성적 지향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성적 지향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적 지향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그 메커니즘은 아직 과헉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성적 지향이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그것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보고 그 개인들을 비난하는 혐오집단이 있다.

그런데도 그 혐오를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는 그 혐오에 역사성과 사회성,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혐오가 마치 ‘페미니즘’의 폼나는 첨단인 것처럼 포장한다. 무지의 극치고, 오만의 극치다. 페미니즘의 드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관용적으로 포용해야 하더라도, ‘혐오’를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혐오는 혐오다. 그 혐오에 어떤 역사적 정당성도 정책적 여지도 인정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다수 언론이 그 혐오를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인정하고, 홍보하며, ‘클릭 저널리즘’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트랜스젠더를 반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어떤 개인과 집단이 있고, 그런 개인과 집단이 스스로 자신이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역사적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런 조직의 주장을 사회 구성원에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전달하는 언론이 있다. 그야말로 블랙코미디다.

침묵하는 학생 대표 ‘모두’ 

내가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한 소셜미디어에서 ‘이상한 성명서’를 봤다. 트랜스젠더 입학생을 비둘기로 비유하면서 조롱하는 더할 수 없이 추잡한 글(‘인간은 비둘기가 될 수 없다’, 클릭은 비추)이었다. 이게 뭐지? 비둘기? 궁금해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니 숙명여대 트렌스젠더 입학생 문제더라. 이런 정신나간 성명서는 이것말고도 여럿 있는데 굳이 언급하고 싶진 않다.

이런 무가치한 혐오에 일말이라도 관심을 유도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런 몰상식한 증오가 ‘조롱’이라는 가장 악질적인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고, 앞서 우려한 것처럼 이런 증오와 혐오는 필요 이상으로 과잉대표되는 경향성을 가진다. 적어도 학교 바깥에서 기사화까지 된 마당에 학내에서는 마땅히 이런 저런 ‘소동’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숙명여대 학생들의 대표 집단인 총학생회의 반응이 궁금했다. 당연히 의연하고, 엄중하게 이 문제에 관해 총학생회의 입장을 밝혔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명여대 총학생회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았다. 하지만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신입생 입학 관련 기사에 대한 총학생회 입장문]

안녕하세요. 전진숙명 제52대 총학생회 ‘모두’입니다. 31일 3시 36분 경 총학생회 공식 메일 창구로 “기사 관련해서 총학생회 입장 올려주세요”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해당 메일은 트랜스젠더 신입생 입학과 중앙일보 관련 기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을 게시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에 총학생회 ‘모두’는 관련 입장문을 게시합니다. 이하 메일 전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숙명여대의 한 재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중앙일보 기사에서 총학생회 ‘모두’가 정례회의를 통해 조만간 입장 발표한다고 하셨는데 이 회의엔 누가 들어오고 무슨 자격으로 논하는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현재 학교의 학생들은 트랜스젠더인 남성의 입학에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분노하는 상황인데도 총학생회에서는 이런 학생들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대변하는 건가요? 이에 대해 총학생회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총학생회는 1월 31일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해당 기사가 나게 된 경위를 파악하였습니다. 그 결과, 30일 16시 20분 경 중앙일보의 모 기자4로부터 트랜스젠더 신입생 입학 관련 총학생회 입장을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았고, 해당 시간에 상근을 하고 있던 한 총학생회 중앙집행국원이 해당 전화를 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담당자가 아니기 때문에 답변 드리기 어렵다. 메일 주소 알려드릴 테니 공식 이메일로 문의 달라.”는 중앙집행국원의 답변에 해당 기자는 “이메일에 대한 답은 회의를 통해 결정 되느냐, 안건으로 상정되어 논의하는 거냐”고 했고, 중앙집행국원은 “이메일은 회의를 통해 논의되는 경우도 있지만 답변 사항 없는 이메일은 회신하지 않는다.”는 평소 총학생회 전화 업무 매뉴얼을 전달하였습니다. 특히 ‘정례회의’와 같은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한 답변을 전달한 적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총학생회는 현재 논란이 불거진 기사 내용이었던 ‘정례회의를 통한 입장 발표 예정’이 사실이 아님을 밝힙니다. 현재 총학생회는 해당 기사를 보도한 중앙일보 기자에게 정정보도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오늘 오전 총학생회는 사태 파악을 위해 입학처와 커뮤니케이션팀에 문의하였습니다. 그 결과 두 부처 또한 관련 기사를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하였으며, 등록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입학 관련 답변이 어려운 상태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총학생회는 신입생의 입학 및 재적 여부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절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학우분들께 공유되지 않은 사항이 기사로 보도가 된 사실과 그로 인해 상처를 받으셨을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현재 총학생회 차원에서 인터뷰, 기자회견, 공식 성명이나 관련 발표 등은 예정되어 있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총학생회 ‘모두’는 모든 숙명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 01. 31.

전진숙명 제52대 총학생회 ‘모두’

게시물 담당자: 총학생회장 임지혜

(출처: 숙명여자대학교 총학생회 페이스북)

(참고로, 메일 직접 인용 표시와 강조 및 익명 기자 표시 기사의 링크 표시와 가독성을 고려한 문단 나눔은 편집자)

우리는 현재 우리가 도달한 과학적 지식, 그 지식의 극히 일부로서 널리 통용되는 상식, 그 상식의 경계에서 서로 다르게 형성된 지역의 역사적 관습과 거기에 영향받은 문화, 더불어 그것마저도 흐트러뜨리는 개인적 경험의 한계라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제한적인 토대에서 어떤 사물을, 어떤 현상을 판단한다. 그 당연한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성전환자가 자신의 성별을 마치 좋아하는 시계를 수집하듯이 멋진 구두나 지갑을 고르듯이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혐오집단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다.

각설하고, 대학의 총학생회가 “신입생의 입학 및 재적 여부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일절 없”기 때문에 침묵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주 실망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내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두 댓글이 그 성명서 게시물에 있더라.

메일의 내용을 읽어보니 입장 밝힘과 주어를 보니 확실히 숙명여대 재학생임이 틀림없네요. 15학번 졸업생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공학이 아닌 여대라는 타이틀을 , ‘여성 우월, 여성만을 위한 학교가 여대’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숙명여대는 적어도 제가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현재 타대학원에서도 자랑스러히 여기는 부분은 “여성우월”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평등한 여성”입니다.

그러나 가장 하위적인 가름의 기준인, 성별을 논하여 새 입학생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 입학생, 그 또한 사람입니다. 성별로 왈가왈부하며 우리가 배제해야 할 대상이 아닌, 성별이기 전에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는, 타인에게 환영을 받을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총학에게 메일을 보낸 그에게 한마디 올린다면, 당신은 여성의 조건과 평등을 논하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가지고 계신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보편적 일반화적 주장을 내세우는 당신이 과연 우리 숙명여대의 재학생임에 당당한지 생각해보십시오.

졸업생으로서 굉장히 부끄러운 후배를 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김수연)

특정 사회적 소수자 개인에 대해 학내에서 집단적인 괴롭힘이 이어지는 상황인데, 이 상황에 관하여 최소한의 올바름도 주장할 수 없는 ‘총학생회’의 ‘공식적인’ 존재 이유는 뭘까요? 학우들 거수기 노릇 할거면 학생대표자는 굳이 존재할 이유가 있나요? 총학생회 왜 하세요?” (Kang *****)5

부끄러운 날 

하지만 무엇이 숙명여대 학생들의 대표자인 ‘모두’를 이토록 겁쟁이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내 개인적인 체험에 빗대면, 어떤 맹목적인 증오는 사람을 질리게 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 말처럼 요즘의 무기력한 나에게 와닿는 말은 없다. 나도 누구못지 않은 겁쟁이니까.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그런 심정. 그래 그냥 니들끼리 그렇게 치고받고 그렇게 살다가 가라. 난 빠질란다. 그렇게 방관자가 되고, 그렇게 겁쟁이가 된다. 그렇게 침묵한다. 당신을 비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다.

증오를 자라게 하는 가장 비옥한 토양, '침묵'

증오를 자라게 하는 가장 비옥한 토양, ‘침묵’

그래서 난 숙대 총학을 대단히 예외적이고, 일탈적인 존재로 여겨 그 비겁함을, 그 무책임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숙명여대 총학만 겁쟁이라서 그런 무책임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숙명여대 학생들 일부에게 눈먼 증오를 자라나게 한 숙주가 대한민국의 자극적이고, 성찰 없는, 돈과 권력이 유일한 목표인 의미 유통 시스템이라면, 숙명여대 총학의 비겁함과 무책임은 눈부신 학생운동의 영광과 함께 양극화와 차별을 한국적 특수성과 역사성으로 축적한 우리시대의 설계자 586의 산물이기도 하다.

나무가 있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곰팡이가 자라려면 숙주가 있어야 한다. 비겁한 겁쟁이를 키우고, 눈먼 증오자를 자라게 한 숙주, 그리고 그 숙주를 무럭무럭 키워온 ‘꼰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혐오가 사회를 어떻게 망칠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혐오를 정치적인 유불리에 따라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정치과 한푼의 ‘클릭’으로 조장하는 언론에 그 책임이 있고, 차별을 당연시하는 온갖 제도적 관습적 폭력과 특권을 오히려 ‘선망’하게 한 이른바 성공한 ‘지도층’에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러니 자신의 출세를 위해 그 이율배반의 사회를 조장하고 거기에 편승한 ‘내로남불’의 꼰대들, 그리고 무의미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혹은 귀찮아서 알면서도 거기에 침묵한 나 같이 비겁한 꼰대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여성(남성)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정체성의 짝패로 남성(여성)을 타자화하고, 그 타자를 절대적으로 악마화하며,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부 개인과 그 집단을 더는 묵인해선 안 된다. 나는 그런 개인과 집단에게는 예외 없는 불관용이 원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그 혐오와 증오를 ‘선택 가능한’ 어떤 것으로 여기는 일체의 행위와 해석을 불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제도(차별금지법)가 되어야 하고, 그런 행위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문화와 상식이 자리해야 한다.

그리고 방금 전 소식,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생이 등록을 포기했단다.

기쁜가.
슬프다.
미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끄럽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발터 벤야민)6
 

숙대 등록 포기에 부쳐

내게도 일상은 있다.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특별하지 않은 삶을 견뎌낸다. 꿈이 있고, 삶의 목표가 있으며, 희망이 있다. 그러니 내 삶은 남들에게 확인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가고자 하는 당연한 목표, 그 속의 꿈 조차 누군가에게는 의심의 대상이고, 조사의 대상에 불과하다. 또한, 내 삶은 다른 사람의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무시되고, ‘반대’를 당한다. 그렇게 나는 일상을 영위할 당연함마저 빼앗겼다.

얼마 전 서점을 다녀왔다. 더는 볼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수험서를 다시금 뒤적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다시금 수험서를 사러 와야만 했던 이유는, 올해 수능 점수에 불만족 해서도 아니고, 법전원을 진학하기 위해서는 법전원이 설치된 대학 학부로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다던 말을 들어서도 아닌, 작금의 사태가 무서워서였다. 내 몇 안 되는 희망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언행을 보면서 두려웠다.

서점을 가는 길에는 전철을 탔었다. 전철역의 계단 앞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나는 사회적 다수자였고, 다양한 색으로 도배된 지하철 노선도 앞에서, 세 가지 색각을 전형적으로 지닌 나는 다수자였다.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일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항상 소수자인 것은 아니다. 사람 모두는 소수인 측면과 다수인 측면을 다층적으로 쌓아나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자신을 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약자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을 늘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면에서는 강자일 수도 있음을 잊고, 다른 약자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혐오만 재생산될 뿐이다.

나는 서점 나들이를 정말 좋아한다. 그 다양한 의견의 각축장을 통하여, 보다 나은 의견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 근거를 갖는지를 찾아보는 행위가 재미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과 상대방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숙한 사람에게 있어서,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이 되어야지, 무자비한 혐오여서는 안된다. 이러한 혐오는 진정한 문제를 가리고, 다층적인 해석을 일차원적인 논의로 한정시킨다. 이러한 무지를 멈추었을 때만,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을 이해하고,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이 사회가, 모든 사람의 일상을 보호해 주기를, 다양한 가치를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그런 길 만이 우리 사회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제 바람에 공감해주시고 지지를 보내주신 여러 개인, 단체에 감사를 표한다. 만약 그분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연약한 개인은 쉬이 지치고야 말았을 것이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살아주시는 여러 사람들께 감사를 표한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일상은 일상일 수 있다. 나는 비록 여기에서 멈추지만, 앞으로 다른 분들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또 감사한다.

2020. 02. 07.

하나의 날갯짓이 커다란 폭풍이 되었음을 바라보며.

PS. 저를 지지해 주신 여러분께 일일이 감사의 말씀 전하지 못하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연대의 정신 잊지 않고, 또 다른 곳에서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재인용 출처: 한겨레, ‘숙대 트랜스젠더 합격생 결국 입학 포기 “신상유출 등 무서움 컸다”, 권지담 강재구, 2020. 2. 7.)

성적 지향 ≠ 성적 정체성 ≠ 성정체성 (업데이트) 

엄밀하게 말해서 ‘트랜스젠더’는 성적 지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성정체성의 문제다. 이 점에 관한 독자의 지적이 있었고, 그 지적을 수용해 이 점을 업데이트한다. 즉,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과 성정체성(性正體性, gender identity)과 성적 정체성(性的 正體性, sexual identity)은 서로 다른 개념의 용어로 맥락에 따라 구별해서 써야 한다. 각각의 개념과 주의해야 할 용례는 아래와 같다.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

  •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무성애 등을 말한다. 다만 이들 구분은 이끌림과 행동 경향 및 강도가 다양해 그 분류로 행위나 성향을 포섭할 수 없고, 젠더퀴어나 간성에게는 동성과 이성의 판단이 모호할 수 있으므로 엄밀한 구별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런 용어의 불명료함이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 그런 맥락에서 트랜스젠더의 이성애가 동성애로 오해받기도 한다. 즉 스스로 자신의 젠더를 여성으로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남성이 남성에게 끌리는 경우에 트랜스젠더 입장에서는 명백히 이성애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를 동성애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성적 지향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는 게 현대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결론이다.

성적 정체성(性的 正體性, sexual identity)

  • 성적 정체성은 ‘성적 지향에 관한 정체성’을 의미한다(‘성적 지향 정체성’).
  • 따라서 성적 지향과 매우 큰 관련성을 가지지만, 성적 정체성은 자기 자신이 상대에게 느끼는 성적 끌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성적 지향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성적 지향이 양성애인데 사회적인 억압 등의 이유로 그런 성적 지향을 인정하지 않고 이성애자로 자기 자신을 정체화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성적 정체성은 성적 지향보다 어떤 개인이 행하는 성적 행위에 더 일치하는 경향을 가진다.

성정체성(性正體性, gender identity)

  • 성정체성은 젠더(사회적 성, 심리적 성, 정신적 성)에 대한 자각과 자의식을 말한다. 젠더 자의식은 ‘생물학적 성'(지정성별)과 일치할 수도 있고(시스젠더; Cisgender),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트랜스젠더; Transgender), 기존 사회의 분류에서 벗어난 성정체성을 가진 경우(젠더퀴어; Genderqueer)도 있다.
  • 트랜스젠더가 반드시 성전환자인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전환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가 있다. 트랜스젠더의 성적 지향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무성애 등 다양할 수 있다. 즉, 트랜스젠더라는 성정체성이 성적 지향을 암시하거나 규정하지는 않는다. 
  • 젠더퀴어는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성 정체성을 지칭하기 위해 고안됐다. 젠더퀴어에는 1) 안드로진(Androgyne): 중성적·양성적 정체성 2) 바이젠더(Bigender): 남성·여성의 개별적인 정체성 3) 트라이젠더(Trigender): 남성, 여성, 제3의 성 4) 에이젠더(Agender)·젠더리스(Genderless)·뉴트로이스(Neutrois):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고 느끼는 정체성 5)젠더플루이드(Genderfluid): 여러 가지 다양한 젠더를 오가는 젠더 정체성 등이 있다.

이상 ‘위키백과-성적 지향, 성적 정체성, 성정체성 및 나무위키-성적 정체성 등 참조’. (업데이트 마감: 2020. 2. 8. 오전 4:38) 


  1. 참고로 ‘성전환자’의 입학 여부는 당대의 법제도와 대학의 자율성에 바탕해 차이를 가질 수 있는 정책적인 선택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의학적 성취와 사회제도적 기준에서 보건대 그 입학을 반대할 그 어떤 과학적 사회적 역사적 정당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2. ‘성적 지향’에서 ‘지향’이라는 표현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정향’이라고 써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충분히 고민해볼 만한 문제로 생각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좀 더 널리 쓰이는  ‘지향’으로 쓰도록 한다.

  3. The 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2004): “The mechanisms for the development of a particular sexual orientation remain unclear, but the current literature and most scholars in the field state that one’s sexual orientation is not a choice; that is, individuals do not choose to be homosexual or heterosexual.”

  4. 아마도 강하게 추정건대 해당 기사는 정은혜 기자의 “성전환 20대 숙명여대 법학과 합격…학내 커뮤니티 시끌시끌”(2020. 1. 30.)인 것으로 보인다.

  5. 현재는 삭제된 댓글로 보인다. 그 취지만 보존하기 위해 그 본문은 여기에 옮기고, 글쓴이는 일부만 표시해 익명화한다.

  6. H. 마르쿠제가 그의 책 [일차원적 인간]의 마지막에 인용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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