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드라마 ‘송곳’이 아쉬움을 남기며 종영되었다. ‘송곳’은 상업적인 기획이 바탕에 있었지만 웹툰 ‘송곳’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움이 크게 무뎌지지 않은 괜찮은 드라마였다. 하지만 기대보다는 저조한 시청률로 마무리된 ‘송곳’은 ‘미생’ 열풍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다시금 돌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송곳’들에 얽힌 여러 가지 구설들(jtbc에서의 방영이나, 출연료 미지급등) 역시도 ‘송곳’ 이라는 텍스트에 잘 어울리는 우연 혹은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슬로우뉴스 – JTBC 드라마 [송곳] 보이콧을 생각하며 (손아람, 2015. 11. 9.)
송곳의 자리, 의미를 그려보기 위해서는 우선 미생 현상에서 출발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송곳을 보게 된 계기는 미생에 대한 미심쩍음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생 현상의 불편함
만화 ‘미생’은 따뜻한 마음으로 잘 만들어진 좋은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미생에 대한 한국사회의 열광을 보며 꺼림직했던 부분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부심(자부심) 자극 이야기에 묘하게 모든 사람들이 이끌려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미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바로 이야기의 구조에 있다는 말이다.
미생은 대기업 화이트칼라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을 집어넣기에 무척 편리하고 유용한 서사였다. 장그래라는 존재할 수 없는 고졸 비정규직을 극 속에 집어넣고 공감하고 배려함으로써 도덕적 부담감을 덜면서도, 일의 치열함을 박진감있게 그림으로써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상 장그래가 아니라 오 과장이라는 사실이다. 장그래는 사랑방 손님의 옥희이고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관찰자 혹은 존재할 수 없는 자로서의 어색한 지위를 무마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서 장그래의 채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장그래의 모든 통찰력과 끈기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성립되지 않을 판타지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합상사 속의 오 과장은 어떠한가? 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에 도덕률을 입힌 사람이다. 오 과장은 한 가족의 책임감 있는 가장이며 사내 정치보다는 일의 실질을 추구해 나가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야기의 사회적 의미는 오 과장의 도덕적 우위가 현저하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서 있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바뀌는 거야
이런 맥락에서 드라마 ‘송곳’의 미덕은 바로 서 있는 자리를 훌쩍 이동하게 했다는 것에 있다. ‘송곳’은 판타지를 기본으로 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드라마이다.
물론 다른 드라마들에서도 ‘대형 마트’와 같은 비정규직 일자리가 등장하고는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일터는 계층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지표 같은 것으로 이용된다. 그 지표는 주로 다른 인물과의 격차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 간극이야 말로 신파이든, 권력게임이든, 신데렐라 스토리이든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원천인 것이다. ‘송곳’의 고유함은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인 대형 마트라는 공간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선망이 없는 직종 자체를 핵심 소재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많은 직장드라마를 떠올려 보았지만, 대기업 사무직이나 전문직종이 아닌 일터를 주소재로 하는 드라마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송곳’은 대중들을 소망하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그곳’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드라마라 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송곳’은 사실상 tv드라마라는 대중적 기획이 실현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곳에서 찾아낸 강렬한 드라마에도 있었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사회의 노동환경이 열악해졌고, 대중들이 그 변화를 절감하고 있다고 제작사가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생’이 대성공했다면 한 발짝 더 나간 ‘송곳’도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소재주의를 넘어서
하지만 ‘송곳’이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훌륭하다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어떤 텍스트이든 특정한 소재를 다루는 것으로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최근 ‘부러진 화살’이나 ‘또 하나의 가족’과 같은 사회 정의와 관련된 소재(특히 실화)를 다루는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공중파에서 고의적으로 버려진 시사 보도 영역이 영화로 비집고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사회성이 강한 영화들을 보다 보면 대다수가 왠지 느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왠지 실화 자체의 사건성으로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에 사건을 이어나가는 정도의 극화만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플롯도, 표현양식도 새로운 문제의식도 볼 수 없는 유사 시사 프로그램 같은 작품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정의’에 대한 열망에 호소하는 것 이상의 치열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작품적인 면에서도 사회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도 모두 긍정적이지 않아 보였다. 때로는 그것을 보는 것이 ‘정의’라는 식의 마케팅을 보면 왠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같은 정의를 전달하더라도 영화는 영화로서의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볼 치열함이 필요해 보였다.
오만한 정의
그리고 정의로운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서 상당한 문제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부러진 화살’은 익히 알려진 ‘석궁테러’ 사건을 다루는 법정물이다. 다른 사회성 위주의 작품에 비해서는 적당한 극화-이를테면 캐릭터의 구성이나, 서사의 핵심을 두 남성의 자기극복과정으로 재구성했다든지- 과 이루어졌고 사건 역시도 비교적 리듬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불편했던 부분은 김경호 교수(안성기 분)가 교도소에서 다른 남성 재소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영화였기에 우선 실화 여부를 찾아보았더니 그런 일은 없었고 교정 당국에 의해 이루어진 신체검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성추행에 가까운 모욕적인 일을 겪었다는 교수의 인터뷰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아마 이 부분을 좀 더 강렬하게 극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말했듯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가 사실에 반드시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설정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강간을 설정함으로써 교수의 희생자성이 높아지고 그를 통해 자기극복이라는 서사 역시도 더욱 강렬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사건 자체로서 교수는 충분히 희생자였고 다른 권력 작동 방식으로도 사법부에 의한 폭력을 충분히 그려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강간을 그린 감독의 선택에는 은연중에 도덕을 손에 쥔 자로서 어떤 선택을 해도 된다는 가벼운 오만함이 엿보였다. 너무 쉬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재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던 부유층 여성 유정(이나영 분)이 가난한 집안 출신 사형수 윤수(강동원 분)와의 만남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는 한편 사형제도의 폭력성을 그려내는 영화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들었던 불쾌함은 부유층 여성의 자기극복을 위해 사형수의 죽음이 동원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분명히 ‘데드맨 워킹’을 참고로 한 영화로 보인다.
하지만 ‘우행시’는 사형제도의 폭력성에 집중하기보다는 이상하게 가난한 사형수에게 위로받는 상류층 여성의 자기치유에 무게가 쏠려 버리는 느낌이었다. 강간피해 경험과 사형집행이라는 강력한 폭력들 앞에서 유정을 앞세운 작가의 자기극복 과정에 대한 윤리적 접근은 왠지 서사적으로 원천봉쇄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강간의 상처에 대해서 누가 함부로 입을 열 수 있다는 말인가? 왠지 사형수는 가난했고 곧 죽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생 현상- 눈먼 선의의 확대 재생산
‘미생’에 대한 불편함 역시 소재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생이 비정규직 문제나 여성 노동자의 고충을 그리는 방식은 소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생’에는 분명 비정규직이 만연한 사회와 장그래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지만, 서사의 중심은 엄연히 일을 하는 사람들의 치열함에 가 있기 때문이다.
‘미생’의 뛰어난 성취는 ‘송곳’과 마찬가지로 취재를 통해 얻은 일의 디테일과 치열함에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미생’은 대기업 종합상사 직원의 치열한 일의 세계에 비정규직 장그래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덧입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생 현상’이 유통되는 방식은 비정규직 청년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무게가 가 있다. 이런 간극은 작가가 지금의 주류 세력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일하고 가정에 충실한 산업역군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투표를 어느 당에 하더라도, 아무리 비정규직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더라도 지금 현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후려칠 상상력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능력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라는 것은 현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내적 긍정이다. 그런데 미생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장그래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여성 노동자의 고충을 그린 부분만으로 너무 관대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정이 가지고 있는 역설이자 간교함이다. ‘비정규직 청년’을 언급해 준 것만으로도 사회가 너무 감격해 버린 그런 구도가 되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감격은 청년세대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기성세대의 셀프 감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펜을 든 사람들도, 정규직에 앉아 구매력을 가진 사람들도 모두 그들이기에 ‘미생’은 일거에 열풍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장그래가 오 과장을 존경하게 됨으로써 장그래와 비슷한 사람들 모두가 이야기로 끌려 들어와 자발적으로 오 과장의 입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송곳의 날카로움
송곳이 소재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부분은 치밀한 취재와 인간에 대한 차가운 이해에서 시작한다. ‘송곳’은 성공의 사례가 드물었던 대형 마트의 노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파업에 이르는지를 추적한다. 송곳의 드라마로서의 성취는 기본적으로 싸움의 디테일에 대한 집요한 취재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사측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들이 노동자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조직화하는지 마치 사건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그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논리와 의지를 가지고 행위하는 사람들의 처지와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다.
‘송곳’이 여느 대중문화 텍스트보다 멀리 나간 부분은 인간의 저열함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보이는 부분에 있다고 본다.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쉽게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그 속에서 때로는 의리를 지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약해지고 자신의 안위와 자존심만을 지키려는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격렬한 싸움 속에서 작가가 본 것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려는 기업의 차갑고 집요한 공작이기도 했지만, 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약하고 그래서 약은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금 나은 처지의 마트 직원들이 판매업체에서 파견 나온 직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약자들의 모습임을 작가는 놓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권위와 싸우면서도 육사 출신과 같은 작은 권위에 한없이 약하고, 옳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좋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처럼 비논리적이다. 해고의 위협을 겪고 노동조합에 가입한 후에도 조합원 교육에 나와서는 “애들 다 크고 심심해서 용돈이나 벌려고 여기 나오는 거지. 여기 그런 사람 없어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현재 처지를 부정하려고도 한다.
그렇기에 구고선은 원칙주의자 이수인에게 말한다. 우리는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고. 싸움을 피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지만, 자신들의 싸움이 결코 순결한 것도 완벽한 것도 아니라는 구고선의 말은 오랜 경험을 통해 얻어낸 싸움의 질서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싸움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싸움에 지는 것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싸우는 것이 낫다는 현실론이다.
그렇기에 너무 위대해지지 말자고 한다. 위대한 이야기의 세계에서 벗어난 현실의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완벽하고 순결한 승리는 없으며 힘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조차 없다. 사람을 모으는 것은 힘들지만 갈라져서 싸우는 것은 마치 엄마 뱃속에서 배워 나온 것처럼 알아서들 잘한다고도 한다. 결국 ‘송곳’에 등장하는 수많은 명언은 작가의 통찰일 수도 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관찰을 그저 외면하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
‘미생’의 대성공과 ‘송곳’의 실패는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가 바로 ‘미생’의 그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생’은 우리 사회에서 힘을 가진 소수의 주류 집단을 크게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음으로 힘을 가진 집단의 자긍심을 한껏 북돋아 준다. 그리고 그들이 공모하여 만든 세상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무하고 포섭함으로써 일어나야 할 싸움을 멈추게 하고 그들의 내적 논리를 인정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이 ‘송곳’의 드라마화를 보며 기대를 했던 이유 역시도 ‘미생’이 열풍이었다면 ‘송곳’은 다음이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열풍은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따뜻한 마음과 눈먼 선의가 바로 이 지점에서 위험해 지는 것이다. 인간은 실제이든 상상이든 가리지 않고 언제나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송곳’은 노조가 없는 삼성 계열 미디어 회사 jtbc에서 방영되었고 이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다소 지나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삼성의 미디어 전략 자체를 긍정적으로 볼 이유 역시도 없는 것이다. ‘송곳’이 방영될 수 있는 방송사가 jtbc 하나라는 것도 한국사회의 중요한 헤게모니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jtbc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방영하는 것이 방영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동의할만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한편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용한다고 생각하며 이용당하는 것 말고 다른 어떤 선택이 있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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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중 일부 문단은 필자가 이왕에 발표한 글에서 발췌하여 개작했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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