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쟁이 시작됐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전쟁의 서막이었고, 친일인명사전 문제는 작은 교전에 불과했다면 이제 두 번째 큰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촉발될지는 모르지만, 모든 전쟁이 그렇듯 시간이 걸리고, 결국 승패가 갈려야 이 전쟁은 끝난다.
- 슬로우뉴스 – ‘역사 전쟁’의 서막: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무엇이 문제인가 (이재빈, 2013. 9. 26.)
예상해보자. 그리고 그 시나리오대로 사태가 진행되지 않도록 방책을 마련해보자.
1단계 – 정부가 사고를 친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다. 혹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마음대로 처리해버린다. 국민, 시민사회단체, 야당까지 급격한 분노를 쏟아내며 반대 의견이 폭팔적으로 분출된다.
2단계 – 반대의견 일축하기
김무성 대표가 직접 나서거나 새누리당의 모 의원이 나서서 반대 의견을 무시한다. 보수 언론도 지원 사격한다.
-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 이 정도면 대단한 것이니 대승적으로 이해해 달라.
-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마라.
- 유언비어가 난무하는데 자제를 해달라.
진보 성향 언론과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교수, 지식인 그리고 시민들의 각종 높낮이를 자랑하는 언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좋아요’가 수백~수천 개씩 쌓이고, 비판 여론은 더더욱 들끓어 오를 것이다. 심층 기사도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에 대한 여당의 논리적 반박이나 설득력 있는 주장은 조금도 없을 것이다.
3단계 – 여론 조작과 왜곡
극우단체들은 언제든지 준비돼 있다. 어떤 형태로든지 막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쌔고 쌨다. 거리에 나와서 강경 집회를 한다든지, 특정 인사를 향한 1인시위나 피켓시위 같은 것을 시도할 수도 있다.
기성 언론은 소위 ‘애국 보수’ 인사의 주장을 대서특필할 것이고, 이는 종편에서 재편집, 가공될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식당에서, 어르신 대부분이, 대부분 지역에서 소셜 미디어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이들의 주장을 듣게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지상파 방송이나 보수 언론은 점잖게 여론을 구조화할 것이다.
- 여론조사 하니 위안부 협상 찬성의견이 더 많다.
- 국정교과서 문제 보혁대결.
- 위안부 문제 좌우 대결.
- 여야 이번에도 정쟁으로 치닫는가.
- 민생은 외면하고 걸핏하면 이념 공세. 지긋지긋한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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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삽화로 표시한 SBS 여론조사 보도에 관해선 아래 기사를 참고할 것. (편집자)
- 미디어오늘- “위안부 합의 잘했다” SBS의 튀는 여론조사 (차현아,2016. 1. 4) 여론조사 결과 찬성 다수… “찬성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설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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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주장의 본의는 사라지고, 막말이 난무하고, 잘못된 인식이 정상적인 인식인 것처럼 유통된다.
- 우리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의식을 주입시킬 수는 없다.
- 종북 교과서를 하나로 통일해서 올바른 역사교과서로 바꾸어야 한다.
- 한일 관계가 중요하고, 북한 문제도 고려해야 하니까 할머니들이 양보해야지.
- 한 명당 2억? 기존에 받는 돈도 있는데 문재인이 100억 모아주기로 했으니까 할머니들 장사 제대로 하셨네~!
사람들은 막말에 기가 찰 것이며, 일부는 막말로 대응할 것이고, 어느새 시나브로 길거리나 직장 같은 오프라인에서는 고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애도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왜 아직도 노란 리본 메고 다니느냐.
4단계 – 시위: 거리로 나오시라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라!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부가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수요 집회는 당분간 번성할 것이고, 일부는 창의적으로 세종대왕 동상이나 일본 대사관에서 기습 시위를 감행할 것이다. 그리고 전교조와 민주노총 등에서는 행동 결의에 돌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결정적인 때 사람들은 수천에서 수만으로, 적어도 하루라도 거리에 집결할 것이다. 깃발이 나부낄 것이고, 확성기에 덤프트럭에, 민중가요와 함께 집회가 열릴 것이다. 10대들도 함께할 것이고, 유모차 부대와 촛불 그리고 양식 있는 연예인들도 함께할 것이다.
경찰이 대응한다. 차벽이든 캡사이신이든 통제되지 않는 현실 가운데 우발적이던 계획적이건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누군가는 충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폭도로 변한 시위대, 경찰 버스가 불에 탔다.
- 폭력 시위 언제까지 용납할 것인가
- 미국에서는 폴리스라인을 넘어가면 총으로 쏜다. 강경 대응이 해답이다.
경찰의 채증이나 약식기소로 인한 피해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갈 것이고, 그만큼 여권과 보수언론은 강경한 태도로 일관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몇 번 더 모일 것이다.
5단계 – 종결: 결국 정부 의지는 관철된다
교과서도 국정화가 되었듯 위안부 합의도 정부 뜻대로 종결될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시민들은 야당을 욕할 것이다.
- 이 난국에 야당은 대체 무엇을 했던가.
- 문재인은 왜 그렇게 모질지 못한가.
- 안철수와 김한길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 새로운 대안 정당이 필요하다.
- 시민들이여 집결하라!
신기하게도 야당 혐오 정서만 강해질 것이고 대통령 지지율은 다시 50%를 향해 올라갈 것이며, 새누리당 지지도 40%에서 고착될 것이다. 그리고 곧 다른 이슈가 세상을 뒤덮고 나면? 그렇게 한 이슈는 묻히고 사라지게 된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도, 조직화된 대응이라는 야심 찬 계획도, 국민적 관심 그 자체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정치 권력은 또다시 승리를 거두고, 그들은 나날이 교만해질 것이고, 현실은 처참하게 우그러들 것이다.
진짜 정치: 무엇을 할 것인가
시민단체의 활약, 낙선 운동, 노무현 열풍, 소셜 미디어의 힘.
10년이 넘어버린 이야기들이다. 거기서 딱 멈추었다. 그리고 권력은 현실을 넘어 역사마저 장악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지속해서 발생하는 이유는 몇 가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 첫째, 감정에 대해 감정으로 맞서는 태도
- 둘째, 거대한 공적 의제는 결국 나와는 무관하다는 태도.
- 셋째, 구체성이 결여된 의제, 잡화점 같은 시민 사회.
어느 순간부터 반복적으로 ‘투표에 참여하자’, ‘총선과 대선으로 응답하자’ 식의 얘기들이 강조된다.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어찌 보면 소극적이고 순진한 발상이다. 권력이 역사까지 건드리려는 것은 특정한 이해관계와 구체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날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생활 현실과 깊은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나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정치적 성향과 방식으로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니 중간에 있는 모호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라고 주장하면 ‘아니다, 이승만은 학살자다’라고 되받아친다. 감정적으로 억울한 사정이야 이해가 되지만, 소수 진영이 분기탱천하는 것만큼 설득력은 쉽사리 떨어져 버린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매춘부다’라고 주장하면 ‘아니다’에서 멈추지 말고, 그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방향성까지 제시해야 한다. 자극적인 혹은 직접적인 정치적 언술과 해박한 분석은 있다. 하지만 결론에 가서는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이 삶의 정치 철학으로 수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인식의 지점이 필요하다. 감정은 논리를 뒷받침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절제되어야 마땅하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기억하라.
비록 고시가 통과되면서 국정화가 확정이 되었지만, 이만큼 격렬한 저항과 의미 있는 성과를 냈던 활동도 없다. 초기에 국정화 찬성여론은 반대여론 못지 않게 높았다. 하지만 역사학계가 반대하고, 역사교육계가 반대하고, 시민과 학생이 반대하니 그 여론이 확실히 바뀌었다. 교육부는 몰래 예산을 끌어다가 어마어마한 광고비를 쏟아붓고, 유관순 누나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만큼은 조금도 뒤집지 못했다.
왜 그런가?
탄탄한 학문적 연구 성과, 그리고 튼실하고 유의미한 네트워크, 마지막으로 충분한 공감대와 자발적이고 광범위한 관심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역사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역사의 새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협의의 정치’에만 의지하지 말고, 감정을 절제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지식, 새로운 컨텐츠, 새로운 얼개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것이 진짜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