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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6. 어머니

나는 집에서 무언가 강요받아 본 기억이 드물다. 내 부모님은 좋게 말하면 ‘신뢰’로, 남들이 보기엔 ‘방임’으로 남매를 키우셨다. 학교에서 받아 온 가정통신문 장래희망란에 무언가 적을 때도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씀하셨고, 부모님 의견란에는 “자녀의 의견을 존중합니다.”라고 쓰셨다.

심지어는 대학에 갈 때도 “어느 대학에 가면 좋을까요?”하고 여쭙자 “네가 가고 싶은 학교와 과를 정하고 우리에게 말해주렴.”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나는 아무 고민 없이 점수에 맞춰 원하는 대학, 원하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다.

János Csongor Kerekes, CC BY ND https://flic.kr/p/kUQYsU
János Csongor Kerekes, CC BY ND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난 후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셨다. 아버지는 많지 않은 외벌이로, 하지만 어머니께 꼬박꼬박 네 식구를 건사할 월급을 가져다주셨다. 내 어머니는 그것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 온 날이면 집안에 삼겹살 굽는 냄새나 돈가스 튀기는 냄새가 퍼졌다.

구김살없이 행복한 가정이었다.

“직장 의료보험 되니?”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직장 의료보험이 되는지 물으셨다.

퇴임 후 두 분을 내게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좋은 대답을 드릴 수 없었다. 한평생 한 가정을 훌륭하게 먹여 살린 내 아버지가 퇴임을 앞두고 계신데, 다음 세대인 나는 부모님을 ‘부양’할 아무런 능력이 없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피부양’ 상태이며, 내 부모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점차 측은하게 여기셨다. 그러한 분위기가 감지될 때마다 나는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당신에게 태어나서 정말 미안해요’하는 마음이었다. 서로 실망과 죄송스러움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안쓰러운 배려가 계속되었다.

Ted & Dani Percival, CC BY  https://flic.kr/p/73TGEX
Ted & Dani Percival, CC BY

“휴, 이 할 일 없는 놈” 

자연스레 나는 공부를 핑계로 집에 잘 올라가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박사 2기 크리스마스 때였다. 나는 오래된 친구 몇과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고등학교 시절 천리안의 취미 동호회에서 만나 10년 넘게 모임을 가져오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가끔 밤늦게 이 친구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기꺼이 따뜻한 밥을 지어주시곤 했다. S는 은행 정규직이 되었고, Y는 디자인 회사에서 자리를 잡았으며, T는 벤처 회사에서 계속 살아남았고, D는 사법연수원에 있었다. 내 어머니는 친구들의 권유로 맥주를 몇 잔 드셨다.

어머니는 일어나며 내게 “휴, 이 할 일 없는 놈… 여기서 혼자 할 일 없는 놈” 하셨다. 내 어머니께 나는 “할 일 없는 놈”으로 규정되었다.

Alex, CC BY https://flic.kr/p/84ThFe
Alex, CC BY

점점 더 멀어지는 집

박사 3기에 접어든 나는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아니면 본가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버스터미널에서 차가 끊겼다. 지하철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충분히 서울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강변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7시간 정도만 버티면 터미널에서 첫차를 탈 수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문 닫습니다, 이제 나오셔야 해요.”

막차가 끊기면 지하철 화장실도 폐쇄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갈 곳을 찾지 못하다가 24시간 영업하는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그저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었다.

Danielle Scott, CC BY SA https://flic.kr/p/6aqctK
Danielle Scott, CC BY SA

“친구 자식들은 다 좋은 기업 가던데…” 

며칠 전 어머니께서 내 자취방에 오셨다. 반찬을 조금 가져오셨고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아시안게임을 함께 보았다. 맥주를 한 캔씩 나누며 나는 왜 그랬는지, 이런 말을 꺼냈다.

“요즘 다들 많이 힘들다네요. 주변 친구들도 아직 자리 잡은 친구들이 별로 없고…”

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렇게 답하셨다.

“아닌데… 엄마 친구 자식들은 다 좋은 기업 가던데…”

정말이지 괜한 말을 했다. 내 어머니는 58년 개띠, 그저 평범한 베이비붐 세대의 한 사람이다. 아들 세대의 대부분이 아프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프니까 청춘’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께는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감당하겠지만, 내 어머니를 사회적으로 부양하지 못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sixtwelve, CC BY https://flic.kr/p/iwbvoY
sixtwelve, CC BY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책에 빠져 살던 어린 시절,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원하면 언제까지나 공부할 수 있게 해줄게. 집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해줄게. 넌 공부만 하렴.”

나는 지금도 그 목소리를 사랑스럽던 마음, 질감 그대로 기억한다.

하지만 용돈을 못 드릴망정 더 이상의 희생을 강요할 염치는 없어서, 일그러진 얼굴로 “저는 잘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7. 할머니 

내 할머니는 96세까지 사셨다.

Kristina Alexanderson, CC BY https://flic.kr/p/dGVhQY
Kristina Alexanderson, CC BY

나를 예뻐해 나만 보면 사촌 누나들 몰래 용돈을 몇만 원씩 주머니에 욱여넣곤 하셨다. 내가 석사학위를 받아 왔을 때는 이렇게 물으셨다.

“이제 우리  OO가 선상님이 된 거냐, 그런 거냐?”
“저는 아직 학생이에요”

박사과정을 수료했을 때도 할머니는 “언제 선상님이 되는 거냐?” 힘겹게 물으셨다. 나는 “곧 될 거예요.”하고 어렵게 답했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너 그러다 늙겠구나…” 하셨다. 그때 이미 귀가 어두워 몇 번이고 크게 반복해 말해야 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와의 거의 마지막 대화였다.

마지막 선물 

할머니는 유일하게 예뻐했던 손자에게 용돈 한 번 못 받아 보고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병원에서 차게 식은 할머니를 붙들고 “미안해 할머니” 하고 엉엉 울었다. 무엇보다도, ‘선상님’이 되어 만 원짜리 한 장 드린 바가 없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강의를 시작하기는 했으나 학자금 대출을 갚는 것조차 버거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저도 손자 노릇할게요.” 했던 것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할머니의 첫 성묘를 가는 길에 국화를 사 꽃잎을 뿌려 드렸다.

그것이 내가 할머니께 드린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다. (계속) 

liz west, CC BY https://flic.kr/p/b3PMNr
liz west,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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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댓글

  1.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려고 공부했음 된 것 아닌가요? 대가가 부족하다고 푸념하는 소리일뿐. 더 힘들게 살며 보람을 찾는 사람을 보시라. 당장 학교 그만두고 다른 일 하길

  2. 돈 되는 일만 하는 대한민국은 언제나 3류를 벗어나긴 어렵죠… 글쓰는 이는 적어도 현재 대학 시간 강사의 현실에 대해 정확히 표현할려고 노력하지 푸념이라고 보이진 않네요

  3.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된 거 아니냐- 그걸 ‘열정 페이’라고 합니다. 대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거면 개인의 문제가 되지만 절대적을 부족하면 사회 문제가 되지요.

  4. 지방대 나와서 내세울것 하나 없이 시간강사하고 있다면 글쓴이 본인에게 배우는 학생도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간강사 하는 것 말고, 본인 스스로 이룬게 뭔가요. 인문학자라면 그에 걸맞게 책을 쓰시던가, 관련 업무로 본인 포트폴리오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몸값이 오르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남들 다 거쳐가는, 돈만 있으면 하는 석박 루트로 뭔가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욕심 아닙니까? 대학원 졸업하는 거 말고, 뭘 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만. 인문학자가 꼭 누군가를 가르치고 교수가 되어야만 하는건가요? 본인 스스로에게 왜 인문학 하는지, 무얼 하고싶은지 물어본 것 맞는지 궁금하네요. 솔직히 나는 시간강사다 시리즈 읽을 때마다(페북에 자꾸 뜨니까 읽습니다만) 그래서 뭐? 라는 질문만 머리속에 맴돕니다. 말구디님 말씀처럼 본인 선택에 남들 취업전선 뛰어들 때 그거 외면하고 하고 싶은 공부 했고(석사도 아니고 박사까지) 그래서 본인이 성과가 없으면 책임을 본인이 짊어져야지요.

  5. 힘내세요. 하지만 연민하지도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말라죽는 것도 그대의 선택일테니까요. 그대도 저도 더 많이 혼나야 될 사람인거 같아요. 저는 받은 사랑에 책임질줄 몰랐거든요.

    (시간이 지나 덧붙입니다) 우린 우울한 우리 모습을 잘 알기에 어머님 할머님께 미안했던걸테니까요.

  6. 포인트를 잘못 파악하고 계신 것 같네요. 지금 이 글의 필자분께서 여러회에 걸쳐 연재하고 계시는 글의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는 시간강사의 삶이 결코 개인의 의지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좁게는 대학 내에서 대학원생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시급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거든요. 대학원생의 삶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네요. 이 글의 필자분께서 만약 ‘인문학자라면’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처럼 성과 이루고 포트폴리오 열심히 만들었더라면,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리고 취업전선에 모든 사람이 뛰어들어야 한다면 대학은 취업 전 필요한 교육을 가르치는 취업교육기관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열심히 하지 않은 너 개인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순간 더 큰 구조적인 문제를 놓치게 될 것 같네요..

  7. 진짜 이 시리즈에만 정신나간 놈들이 댓글다는 것인지, 다른 뉴스 댓글과는 사뭇 태도가 다름.

  8. 아니 태도의 문제가 아니고 독해능력이나 지적수준이 떨어지는건가? 이 글이 그냥 자기푸념이나 징징대는 소리로만 읽혀진다는건데 말이야

  9. 본인들 삶에 비추어 반감, 반박하고 평가 할 마음이 아닌 글 자체로만 읽는게 어떨까요?

  10.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이 당신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니 한국 기초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거죠. 사학계의 경우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연구를 제대로 하지 홋하고 있죠. 조선왕조실록은 번역자 구하기 어려워서 재번역 속도가 느리고요. 이공계 전공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소연씨가 미국으로 먹튀한것도 결국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 크죠. 미래를 보지 못하고 ‘당장 학교 그만두고 다른 일 하라’ 말하는 멍청이들 때문에 기초학문 전공자들이 공학이나 서비스업으로 진로를 바꾸는 겁니다.

  11. 기초학문이 무슨 공장미싱 같은건줄 아시나? 이런 분야는 단순 노동이 아니에요. 논에 모심고 물건 조립하는 거야 눈앞에 주어진 걸 하면 되는 거지만(물론 그 반복작업은 숭고한 일입니다), 이 분야는 수십년 걸려도 업적 하나 이룰까 말까한 분야입니다.

  12. 외국인에게, 한국에 살면서 이해되지 않는 점이 뭐예요? 뭐가 문제점인 것 같아요? 라고 물었을 때 질문에 맞춰 자신의 생각을 대답하면 그러는 니네 나라는 그렇게 잘나서 이렇고 저렇냐… 우리 나라는 이런 구조적 이유 때문에 이럴 수 밖에 없는 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지 말아라 하는 식이고 한국 사람이 우리 나라의 문제점은 이렇고 뭐가 잘못됐고 의식 수준이 이렇다 얘길 하면 그렇게 싫으면 다른 나라 가서 살지 왜 여기서 사냐… 너만 힘든 줄 아냐 나도 힘들고 원래 다 그런 건데 니가 제대로 못하니까 불만이 생기는 거다… 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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