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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좋은 계절에 돌아가셨다.
아직은 제사를 지낼 때 농담 같은 거 별로 하지 않는다. 제사가 원래, 옛 이야기하며 웃는 날인데, 우리에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다. 어른들은 좀 다르다. 나이가 들면 모든 감정의 기저에는 쓸쓸함이 자리하는 것 같다. 슬픔도 그저 쓸쓸함일 뿐이다. 쓸쓸함을 배경으로 어른들은 내내 옛날이야기를 한다.
어려서부터 나는 제사 때마다 영화로웠던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삶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어른들을 보면서 자랐다. 어른들에게 제사는 그 즐거움을 가장 여유 있게 만끽하는 날이다. 자라는 사이 어느새 어른들의 기억은 나(와 동생들)의 기억이 되기도 했고, 그 기억으로 나(와 동생들)는 조금 과장된 자의식을 가지고 자랐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막내는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부잣집 딸인 줄 알았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살면서 셋이 그렇게 완벽한 일치를 보인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서 그냥 깔깔거렸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우리 셋밖에 모른다. 그건 단순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는 의미가 아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만보면 우리의 유년은 그저 궁핍하지 않은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생각이 가능했던 건 우리가 가진 현실적 조건이나 환경, 그리고 보잘 것 없는 능력을 커버하고도 남는 지지를 어른들로부터 끊임없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물론 자부심이기도 했고, 부담이기도 했다. 그 결과 부잣집 딸이라는 과장된 자의식을 벗어내는데 우리는 각자 만만치 않은 기운을 써야 했다(지금도 쓰고 있다). 실제로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먼저 직감적으로 떠오른 말은, ‘이제 나의 유년이 끝났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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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의 또 다른 한 마디.
“우린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산거야?”
이 말에 담긴 의미를 안다. 약지도 못하고, 강하지도 못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규범적이기까지 해서 불편하기만 하고, 자존심은 있어서 막살지도 못하고. 막내는 이번 제사에 내려와서는 아이를 강하게 막 키워야 한다는 말을 적어도 세 번 이상은 했다.
남들에게 최선인 사안이 우리에게는 기본이라고 말하던 애다. 맞아, 맞아. 이 말을 하면서 우리 셋은 또 얼마나 기고만장했던가. 이제 그 기본이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막내는,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본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길러졌고, 그걸로 기죽지 않고 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것은 자부심이기도 하고 불편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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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 없이 옛날이야기로 화기애애한 어른들. 나는 [토지]를 읽으면 꼭 우리 집 이야기 같더라. 아버지 일본 유학할 때 고추장을 비행기로 날랐잖아.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무수한 대화 끝에, 낭만적인 셋째 숙부, 결정타를 날린다.
“형수님, 죽으면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