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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의 나비효과: 조선은 어떻게 일본의 면화기지가 되었나

크림전쟁과 러일전쟁처럼 극동아시아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의미는 어쩌면 그 이상일 수 있는 전쟁이 하나 더 있다. 바로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진행된 미국의 남북전쟁이다. 스벤 베커트의 [면화의 제국]에는 이 면공업과 면화수급을 둘러싼 역학이 세계적으로 어떻게 흘러갔나에 관한 장엄한 서술이 있다. 남북전쟁은 이 두꺼운 책의 중반부에 등장하여 전쟁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스벤 베커트 (지은이),김지혜 (옮긴이),주경철 (감수)휴머니스트2018-10-29원제 : Empire of Cotton: A Global History (2014년)

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2018, 김지혜 번역, 주경철 감수, 휴머니스트), 원제: Empire of Cotton: A Global History(2014)

남부의 전쟁자본주의

베커트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제시한 개념 중 하나는 ‘전쟁자본주의’다. 보통 기계화된 공장제가 등장한 산업혁명 이전의 자본주의를  교역 중심 시스템이라 한다. 하지만 베커트는 그 시대에 관해 상업보다는 유럽의 강력한 무력이 토지를 수탈하고 노동력을 노예화하며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나온 용어가 ‘전쟁자본주의’다. 바로 이 전쟁자본주의 틀 안에서 공급망을 유럽과 그 식민지로 집중시키고, 국가가 강화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적 산업자본주의 체제, 기술혁신과 법의 지배가 촉진하는 발전의 기관차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독특한 나라였다. 1850년대가 되자, 미국의 북부는 번창하는 제조업을 갖춘 산업자본주의 중심부로 올라섰다. 하지만 남부는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는, 북부와 전혀 다른 별세계였다. 임노동이 지배적인 북부와 달리 남부의 핵심적 노동 체제는 단연코 노예제였다. 즉, 남부는 19세기까지도 전쟁자본주의 체제였다. 유럽 국가들이 그 두 세계를 본국과 식민지로 구분한 반면, 미국에서는 하나의 나라에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던 셈이다. 남북전쟁은 이 두 체제의 갈등이 폭발한 전쟁이었다.

180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180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을 담은 그림 (출처: civilwar-pictures.com)

이 전쟁의 영향은 자연스레 미국을 넘어선 전 세계적 범위로 퍼져나갔다. 남부의 전쟁자본주의는 폭력적 방법으로 근대적 생산 관리를 흑인 노예에게 적용하여 만들어내는 엄청난 면화를 매일 같이 세계 각지로 출하했다. 특히 산업대국으로 자리잡은 영국, 프랑스, 성장하기 시작한 프로이센,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남부 면화의 주요 수요처였다. 농촌의 유휴 노동력을 공장에 투입하면서 이들 나라는 경제 성장을 경험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이권과 경제적 목숨줄이 미시시피 삼각주에서 출항하는 선박에 의존하고 있던 셈이다.

영국의 새로운 면화기지 ‘인도’ 

북부는 당연히 이를 좌시할 수 없었다. 남부의 핵심적 전쟁 자금원을 어떻게든 말려죽여야 했던 것이다. 북부의 강력한 해군력이 남부 해안가를 모조리 봉쇄하자, 효과가 나타났다. 남부는 이후로도 고질적 경제 문제로 전쟁 수행에서 계속 발목이 잡혔다. 하지만 서유럽 국가들에게도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마치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석유가 일시에 공급이 중단된 것처럼, 산업 생산에 필수적인 면화가 단숨에 끊겨버린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실직자가 되고, 폭동이 일어날 위협까지 생겼다. 특히 가장 많은 면화를 빨아들이던 제1의 산업대국인 영국은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들은 남부의 독립을 지원하여 안정적 면화 공급선을 유지하는 전략까지도 고려했다.

물론 그럴 순 없었다. 따라서 각국은 자국이 확보한 잠재적 면화 산지를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영국에게 그 대상은 인도였다. 인도는 본래 세계 최대의 면화와 면직물 산지로, 산업혁명 이전 직물 산업의 최대 중심지 중 하나였다. 영국 산업혁명의 결과로 광범위한 탈산업화가 일어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남북전쟁은 이 흐름을 가속화시켜 인도를 아예 영국을 위한 면화기지로 만들어버렸다.

영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면화기지'가 필요했고, 인도로 시선을 돌린다.

영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면화기지’가 필요했고, 인도로 시선을 돌린다.

사실 남북전쟁 이전 인도를 면화 산지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 있긴 있었다. 다만 남부의 압도적 경쟁력을 이기기에는 인도는 토착 생산 양식이 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북전쟁으로 가격이 상승하고 영국 당국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자 이제 그런 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곧이어 인도의 경작지로 철도가 들어가게 되고 면화가 각지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면화값이 폭등하면서 인도산 면화도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더욱 강력해진 영국의 국가 역량이 인도에 대대적으로 투입되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러시아의 면화 식민지  

영국이 인도를 자국 면 산업을 위한 원료기지로 재편하는 것은 자연스레 많은 국가들에 영감을 주었다. 사실 이 무렵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는 노예농장 대신 흑인을 신용으로 얽어맨 가혹한 소작제로 다시 세계 면화시장의 주인공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 열강들은 한 번 더 그런 원자재 리스크를 껴안고 싶지 않았기에, 각국 정부는 자국의 면화 공급 기지 확보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 중 한 나라는 미국처럼 광대한 면화 생산지에 육로로 접근할 수 있던 러시아였다.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발칸과 흑해 방면으로 진출이 차단 당한 러시아는 남쪽 투르케스탄으로 뻗어나가는 데 더욱 많은 힘을 쓰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투르케스탄 정복은 국경지대에서 기회를 찾고자 한 호전적 장교들의 독자적 행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전한 면화산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의도가 반영된 일이기도 했다.

1865년을 전후로 미하일 체르냐예프(Mikhail Cherniaev; 1828-98) 소장은 코칸드 칸국과 인근의 타슈켄트를 정복했다. 코칸드 칸국이 자리잡은 페르가나 계곡은 비옥한 토지를 지녀 향후 훌륭한 면화 생산지로 자리잡을 잠재력이 있었다. 이후 ‘타슈켄트의 사자’ 콘스탄틴 카우프만 장군(1818-1882, 러시아령 투르키스탄의 초대 총독)은 공세를 이어가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를 비롯한 옥수스강 일대 지역을 정복하였다. 러시아의 남방 전진기지인 오렌부르크에서 타슈켄트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자 러시아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식민지를 개척(?)한 러시아의

러시아의 ‘면화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타슈켄트 일대를 정복한 미하일 체르냐예프(왼쪽)과 콘스탄틴 카우프만

그리고 제국의 식민 관료들이 이 곳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착수했다. 바로 식민지 토착민에게 면화를 재배하게 만드는 것이다. 폭력과 인센티브가 뒤얽힌 정책이 이어졌고, 러시아는 자국의 면화 생산 기지를 드디어 확보할 수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의 앞 뒤 광대한 영역을 서로의 면화 산지로 재편했다.

20세기 초반의 러시아령 튀르케스탄 지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20세기 초반의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타슈켄트 일대의 지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프랑스와 독일 

모든 국가가 이런 행운을 가질 순 없었다. 영국은 초강대국이었고, 러시아와 미국은 본토와 연결된 면화산지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와 독일은 그런 지정학적 행운이나 국력의 우위가 없었기에, 이들 국가를 부러움의 눈길로 지켜봤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두 나라는 각자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서아프리카는 그리고 전통적 면화 산지이자 면직물 공업의 역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했던 방법을 적용하며 실험을 시작했고,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독일은 자국의 토고 식민지에서 그러한 노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앨라배마 터스키기의 흑인 농업 전문가들을 고용하여 토고를 면화 산지로 재편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토고는 독일의 방대한 면화 수요를 충당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고, 독일의 식민정책에도 미숙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독일은 자국 면공업을 위해서라면 사활을 걸고 토고의 면화 개발을 성공시켜야 했다.

독일인은 이제 자신들도 세계 제국으로서 마땅한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면화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미국 남부와 영국령 인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더욱이 세계 각지의 면공업이 활성화되면서, 독일은 기존의 수입망에서도 자신의 지분을 빼앗길까봐 걱정해야만 했다. 가장 위협적 상대는 메이지 유신 이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면공업을 성장시키고 있던 일본이었다.

독일의 불안 vs. 일본의 불안

일본이 반대로 독일의 토고 면화 개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꽤 얄궂다. 하지만 독일의 우려는 근거가 있었다.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전면적 탄압과 가혹한 노동규율의 적용, 산업개발을 위한 국가적 지원 등에 힘입어 일본의 면공업은 무서울 기세로 성장했다. 문제는 면화 공급이었다.

메이지 유신(1868)은 남북전쟁(1861-1865) 이후에 일어났기에, 전쟁 기간 세계 시장에서 남부 면화의 공급이 끊긴 것이 일본에 많은 충격을 주진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영국이 새로 확보한 인도 면화를 주요 공급망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독일처럼, 일본도 영국과 미국의 면화에 크게 의존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면공업자들마저 막대한 인도산 면화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에 항의할 정도였으니, 독일은 충분히 그런 불안감을 느낄만 했다.

문제는 일본도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일본이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미국과의 관계도 우호적이었지만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면 영미에 대한 의존을 줄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 자국의 국가 권력이 보증하는 안전한 공급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영국이 인도에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서아프리카에서 해냈던 일을 일본도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면화를 확보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목화(면화)를 확보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다.

남북전쟁의 나비효과: 일본의 면화기지가 된 조선 

제국의 외교관이 이 사업의 선두주자를 자처했다. 1896년 한성의 일본 영사관에서 근무를 시작한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 1869-1953)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1902년 목포로 전근 갔는데, 한반도 남부가 면화 재배에 적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실험적 면화 재배를 시작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선에 면화는 있었다. 하지만 와카마쓰는 원말에 들어온 중국 면화가 아니라 제국의 면공업에 활용할 수 있을 상품성 좋은 미국산 육지면을 얻고 싶었다. 마침내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1904년 조선 최초의 육지면 재배가 성공하였다. 수많은 조선 농민의 운명이 바뀌게 될 순간이었다.

조선에 신품종 목화씨를 가져온 와카마쓰 도사부로

조선에 신품종 목화씨를 가져온 와카마쓰 도사부로(1869-1953)

1910년 이후 조선을 본격적으로 통치하게 된 총독부는 조선반도 남부를 전면적인 면화 공급지로 재편할 계획에 착수했다. 면화 농업을 위한 수리시설이나 수송 인프라 개선과 투자가 이어졌고, 농업 연구가 진행되었다. 물론 생계형 농업과 면화 농업을 병행하던 농민들을 전통적 생산양식에서 떼어놓아 ‘근대적’ 면화농업에 주력하도록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앞서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사용하던 기법이었고, 일본은 그 중에서 독일의 방법에 큰 영감을 받은 터였다. 그 노력은 대성공을 거두어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면화는 1904년에서 1908년 연평균 1,670만kg에서 1916년에서 1920년 사이 연평균 7,500만kg가량으로 폭증했다. 일본 제국은 자국의 저가 노동력을 활용해 이를 가공하여 자국이 확보한 시장인 중국 대륙으로 수출하였다. 경제대국, 수출대국 일본을 떠받치는 기둥은 조선반도 남단의 면화밭이었다. 

1861년 태평양 반대편에서 벌어진 거대한 전쟁, 미국의 남북전쟁은 숱한 유산을 남겼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발발한 원시적 형태의 총력전이자, ‘주들의 연합’인 미국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줄 통합의 동력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도, 이는 팽창하던 산업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던 핵심적 원료인 면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자, 최초의 지구적 원자재 위기였다.

그 위기가 촉발한 나비효과는 19세기의 여느 다른 사건들이 그러하였듯 지구의 구석구석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군대와 관료와 과학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조선반도도 그 예외일 순 없었다.

1912년 촬영된 일본 제국 관료와 조선의 면화재배인

1912년 촬영된 일본 제국 관료와 조선의 면화재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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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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