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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학습에서 ‘인풋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상식적이어서 평범한 동네 중학생이 이야기했다고 해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언어교육학의 역사에서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스티븐 크라센(Stephen Krashen)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하지만 당연한 것들을 체계화하기도 합니다. 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같지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꽤나 애쓰는 것이죠.

스티븐 크라센 박사(Dr. Stephen Krashen, 출처: alchetron https://alchetron.com/Stephen-Krashen) 그의 웹사이트 http://www.sdkrashen.com 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스티븐 크라센 박사(Dr. Stephen Krashen, 출처: alchetron) 그의 웹사이트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외국어 학습에 대한 크라센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누가 언어를 배우든 그 방식은 모두 같다. 

인류가 어디 있든 음식물을 소화하거나 눈을 통해 대상을 보는 방식은 동일합니다. 크라센은 언어도 마찬가지로 오직 한 가지 메커니즘으로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한 강연에서 “팔꿈치로 보는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손으로 호흡하거나 코로 소화시키는 사람이 없듯 언어습득도 누가 배우느냐에 관계 없이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영어에 적용해 보면 부자이든 빈자이든, 아시아인이든 유럽인이든, 지식노동자이든 운동선수이든 관계없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영어를 배운다는 주장이 됩니다. 외국어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것이죠!

2. 언어학습의 핵심은 언어에 담긴 메시지(message)의 이해에 있다.

우리는 언어에 담긴 내용을 이해함으로써 언어를 배웁니다.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문법이나 발음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언어학습에서 매우 부차적인 요소입니다. 이해 가능한 메시지를 계속 접하는 것, 이것이 외국어 습득의 핵심입니다.

3. 이해 가능한 입력이 중요하다.

크라센은 학습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 메시지를 ‘이해 가능한 입력’(comprehensible input)이라고 부릅니다. 그림이든 손동작이든 언어 입력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들이 중요하죠.

그런 면에서 입력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크라센에게도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는 듣기 자료를 열심히 듣는 것은 시간낭비에 가깝습니다. 소리에 익숙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귀가 뚫린다는 세간의 ‘썰’은 그야말로 도시전설일 뿐입니다.

4. 언어학습의 초기부터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보다는 이해 가능한 입력을 충분히 받는 게 좋습니다. 이해 가능한 입력을 늘리다 보면 말하기가 자연스럽게 따라 나옵니다. 그가 원래 쓴 단어는 ‘창발(emerge)이었습니다.

창발을 위해 필요한 시간, 즉 창발을 일으킬 수 있는 언어 입력의 축적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표현을 반복해서 따라 하거나 말하는 건 효과가 없습니다.

5. 처음부터 열심히 말하기를 연습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크라센은 모국어 발달 초기의 아동의 침묵기(silent period)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게 토대가 되어 이후 말하기가 발달하게 되니까요. 말할 줄 모르는 아기에게 자꾸 말을 하라고 시키는 게 도움이 되지 않듯,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습니다.

언어습득기제(LAD)와 보편문법(UG)의 영향   

어떤가요? 다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들 주장의 배후에는 언어학의 거장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누구인지 알아보실 수 있을까요?

노엄 촘스키. MIT 재학생들이 만든 강남스타일 패러디에 등장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영상에서 "오빤 촘스키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노엄 촘스키. MIT 재학생들이 만든 강남스타일 패러디에 등장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영상에서 “오빤 촘스키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네, 그렇습니다. 크라센의 주장은 20세기 중반 이후 언어학의 주류를 형성한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촘스키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과정을 거쳐 모국어를 습득합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언어습득기제’(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입니다. 오랜 세월 진화의 결과로 인간의 두뇌에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장치가 자리 잡았다는 겁니다.

[box type=”info”]언어습득기제(LAD; Language Acquisition Device)가 뇌에서 실제 어떤 구조로 자리 잡고 있는지, 그 기능이 어디까지인지, 심지어 LAD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유효한지 등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거리입니다. 다만, 이 개념이 당시 언어습득을 일반적인 습관 형성으로 보려 했던 행동주의 심리학(Behaviorist Psychology)의 관점을 무력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box]

겉으로 보기에 지구상에 6,500~7,000개의 언어가 있지만 실제로 우리 머리 속 언어 체계는 하나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보편문법(UG; Universal Grammar)이라는 개념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개별 언어의 어휘와 문법은 모두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어디에서 태어나든, 어떤 언어 환경에 처하든 모국어를 성공적으로 습득하는 데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지구상의 모든 언어가 머릿속에서는 하나라고?!
지구상의 모든 언어가 머릿속에서는 하나라고?!

그런데 크라센은 이 논리를 외국어 학습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아이들이 어머니로부터 문법 교육을 받거나 아버지로부터 어휘 교육을 받지 않아도 모국어를 습득하듯, 외국어 학습에서도 충분한 양의 이해 가능한 입력이 주어진다면 그 언어를 습득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죠.

저는 이 부분이 크라센의 이론 전개에서 가장 큰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box type=”note”]

A. 학습자의 수준에서 이해 가능한 인풋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과
B. 모국어와 외국어가 같은 방식으로 습득되며,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도 모국어처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별개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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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와 외국어를 배우는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은 너무나 다른데 이점을 간과한 것이죠.

인풋은 중요합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논쟁의 핵심은 ‘인풋이 외국어 학습의 필요충분조건인가?’입니다. 크라센은 그렇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학자들은 다양한 반론을 펼칩니다. 크라센의 제안과 이에 대한 반론은 제2언어 습득 연구와 이론의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입니다.

이 중대한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 크라센의 주장을 좀 더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982년에 낸 저서[footnote] [Principles and Practice in Second Language Acquisition] (1982) [/footnote]에서 위에서 언급한 주장을 정교화한 ‘인풋 가설’(Input Hypothesis)을 제시합니다. 인풋 가설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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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영어공부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성찰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는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²

  1. 외국어를 배우는 두 가지 목적
  2.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3. 영어는 인풋? – 2.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
  4. 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5. 필사, 영작문에 도움이 되나요?
  6. 영어는 인풋? – 4. 외국어 습득엔 ‘순서’가 있다?
  7. 영어 이름, 꼭 따로 필요할까?
  8. 한국식 영어 발음, 꼭 고쳐야 할까요?
  9. 영어교육과 홍익인간의 관계
  10. 쓰기의 마법: 생각과 글쓰기의 관계
  11. 언어는 습득하는 게 아니라고?
  12. 네이티브 이데올로기 그리고 네이티브의 윤리
  13. 영어는 인풋? – 5. 인풋 가설의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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