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980~1990년대 나온 걸작 애니메이션들을 보고 자라난 사람들도 이제는 가족을 거느린 어른들이 되었다. 매우 오래된 고전 동화책이나 아주 최신의 화려한 3D 애니메이션들도 여전히 즐거움을 안겨주지만, 때로는 이제 막 고전의 반열에 들어서기 시작한 성숙기의 작품들을 함께 감상하시는 것은 어떨까 싶어 더없이 유명한 작품들에 대해 짤막한 그러나 새로운 소개를 해본다.
1.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크리스마스 전날 꾸게 되는 그 꿈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1993년 미국에서 핼러윈데이에 맞춰 개봉한 이 애니메이션은 국내 극장가에서는 그로부터 1년이 넘은 1995년 1월에 선보일 정도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명작으로 손꼽게 된 작품이자, 팀 버튼 영화들 가운데 아주 높은 인지도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공포와 저주 속에 핼러윈데이 행사를 만들어나가는 잭 스켈레톤과 핼러윈 마을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알게 되고 산타클로스를 대신해 크리스마스 행사를 치러 보려는 대소동을 담은 이 작품은 정교한 스톱모션으로 이뤄진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단순해 보이는 몇 초의 장면들조차 여러 달이 걸려서 만들어낸 이른바 장인정신이 빚어낸 걸작이다.
여기까지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감독한 사람은 팀 버튼이 아닌 헨리 셀릭으로, 크리스마스 악몽 이후에도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1996), [코렐라인: 비밀의 문](2009)을 만들어내는 등 스톱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탁월한 솜씨와 감각을 보여주는 거장이라는 것은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잘 모른다.
작품의 국내 개봉제목은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이지만, 실제 영어 제목이 ‘The Nightmare Before Christmas’로 크리스마스 당일이 아닌 크리스마스 전날의 악몽이라는 것 또한 원체 줄임 제목이 많은 국내 수입 외화들 사이에서는 그닥 특별해 보이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제목은 2부작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따온 것으로,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음악과 애니메이션을 대사 없이 결합해 교향시를 구현하려 했던 월트 디즈니의 대형 기획작인 실리심포니 시리즈 중 크리스마스에 얽힌 두 편을 팀 버튼과 헨리 셀릭이 세심하게 패러디했기 때문에 제목도 그렇게 지은 것이다.
크리스마스 악몽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시퀀스를 차지하는 산타클로스 마을과 핼러윈 마을에서 서로 선물을 공장식으로 만들어내는 모습과 집집마다 선물을 배달하는 연출이 각각 윌프레드 잭슨(Wilfred Jackson, 1906~1988) 감독의 1932년 작 [산타의 작업장](Santa’s Workshop) 과 1933년작 [크리스마스 전날](The Night Before Christmas)에서 그대로 따온 장면인 것이다.
(산타의 작업장 – 전체 감상이 가능하다)
http://youtu.be/Z4hP5iNFdg4
(크리스마스 전날 – 전체 감상이 가능하다)
윌프레드 잭슨은 디즈니 스튜디오 출신의 애니메이터이자, 음악 작곡과 편곡을 했던 명 연출가로, 실리심포니에 이어서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판타지아]에서도 ‘민둥산의 하룻밤'(Night on Bald Mountain)과 이어지는 ‘아베마리아'(Ave Maria)의 연출을 도맡았다.
이제 [크리스마스 악몽]도 핼러윈데이와 크리스마스에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고전 명작이 되었지만, 이렇듯 그 뿌리는 그 이전 세대들이 추억하는 또 다른 클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패러디를 넘어서 세대와 세대 간에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를 추구했던 팀 버튼의 작품 철학을 조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악몽을 다시 접할 때 이런 부분들을 알고 본다면 여러분 역시 조금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크락!
아무런 대사 없이도 모두가 이해하는 흔들의자 이야기
식목일 즈음이면 여러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는 애니메이션 [나무를 심은 사람].
이 애니메이션은 장 지오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그 원작 소설에 채색과 이야기를 새로 입혀 캐나다 사람들이 저마다 나무 심기 운동을 펼치게 만든 힘은 감독 프레더릭 백(1924~2013)의 손끝에서 나왔다 할 수 있다.
본래 프랑스 출신으로 이후 캐나다에 이주해 퀘벡 지방의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중 캐나다 국영 라디오 방송의 제작 지원에 힘입어 1980년 만들어낸 단편 [Crac!]은 단 한 줄의 명확한 대사도 없지만, 그 덕분에 어느 나라의 어떤 문화에 속해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얗게 눈 내리는 지방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가족의 이야기, 축제, 고향을 그리는 누군가의 추억에 깊이 공감하게 만드는 마력을 뿜어낸다.
http://youtu.be/SJNIOJa0ba4
(크락! – 전체 감상이 가능하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 해의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하여 프레더릭 백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5년 뒤에 만들어낸 [나무를 심은 사람]이 또다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도 책과 애니메이션으로 서가와 TV 화면에서 익숙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색연필과 수채화가 번갈아 채색된 듯한 이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은 프레더릭 백이 홀로 모든 수작업을 한 셀 애니메이션으로, 우리가 흔히 보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과 같은 제작 공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방식과 연출에 있어서는 그만의 독특한 물감과 채색으로 이뤄진 것이기도 하다.
후속작인 [나무를 심은 사람]이 소설가의 나레이션으로 애니메이션 전체를 끌어나간다면, [크락!]은 말을 하지 않는 흔들의자가 모든 풍경과 이야기를 그 눈으로 보여주지만, 더 없이 인간적인 시선을 느끼게 해주는 따뜻한 작품이다.
오랫동안 그리웠던 이들과 만나거나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더라도 한 해를 돌아보며 저마다의 달력을 뜯어내는 시기에 이런 애니메이션으로 마음을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
3. 스노우맨
Walking in the Air
1982년 [Crac!]이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을 수상했을 때, 그 한편에서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던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해 쉽게 견주기 어려운 걸작 애니메이션이 유력한 경쟁 후보였던 까닭이다.
국내에도 레이먼드 브릭스의 원작 그래픽노블 [눈사람]으로 잘 알려진 이 애니메이션은 작품들에 비해 짧은 생을 마감한 천재 여성감독 다이언 잭슨(Dianne Jackson, 1941~1992)이 TV 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낸 것인데, 비틀즈의 유명한 팝송이자 동명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비틀즈 출연의 애니메이션 [노란 잠수함] 시절부터 애니메이터로 오랫동안 붓질을 해온 잭슨이 원작에 뒤지기는커녕 순수한 수작업으로 3차원적인 영상으로 TV 브라운관 화면을 애잔하면서도 아름답게 수놓았던 것이다.
(애니메이션 노란 잠수함의 주제가이기도 한 동명곡)
다이언 잭슨은 동화원작의 이야기들을 애니메이션으로 거듭나게 한 여성감독으로, 레이먼드 브릭스, 존 버닝햄 원작의 애니메이션들 외에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을 애니메이션화한 ‘피터래빗의 세계’는 원작을 토대로 한 새로운 이야기도 직접 집필했다.
동화와 만화의 중간에서 독특한 그래픽노블을 만들고, 그렇기에 만화식 말풍선을 자연스럽게 구사해온 레이먼드 브릭스는 이 원작에서는 단 한 칸의 말풍선이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그려냈기에, 애니메이션 역시 한 줄의 대사도 나오지 않는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오랜 팬이었던 다이언 잭슨은 원작의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원작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마법을 발휘했고 그 마법은 눈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뛸 때, 주인공 소년의 집에서 여러 가지 행동을 할 때마다 시청자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대사가 없다는 점이 여전히 단조로울 수 있었던 취약점에 그림만큼 아름다운 소리가 들어가게 되었으니, ‘S.O.S. 타이타닉’, ‘플래시 고든’ 등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영상 음악 작곡가 하워드 블레이크가 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하워드 블레이크 역시 레이먼드 브릭스의 팬으로서, 원작을 여러번 읽으며 어떻게 하면 원작의 적적한 분위기를 음악으로 전할 수 있나 고심을 하다 불현듯 눈사람이 소년과 손을 잡고 뛰다 날아오른다는 다이언 잭슨의 콘티에 감화되어, 소년이 부르면 좋을 노래 하나를 지어내기에 이른다.
“우리가 하늘을 걷고 있어”
http://youtu.be/av0QpbAXHq8
(Walking in the Air – 감상해보시라)
제목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는 이 아름다운 노래는 애니메이션의 콘티 그대로를 하워드 블레이크가 가사로 표현한 것이지만 그만큼 군더더기 없는 노랫말과 가락으로 승화되었고, 노래를 보이소프라노로 표현할 소년의 역은 세인트 폴 교회의 수줍어하는 합창단원이었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만큼 어린 소년 피터 오티에게 돌아갔다.
여러 곡절을 거치며 완성되어 마침내 TV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속 눈사람과 소년이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애니메이션과 별개로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매체에 의해 불리는 또 하나의 걸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