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박미숙∙민노씨의 ‘무드토크’ ep.01] 어느 평범한 마을, 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모두 조금씩 잘못했고, 모두 조금씩 이 죽음에 묶여 있지만, 이들을 비난할 순 없다. 이 죽음은 반복될 것이다. 그 영원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구조, 죽음을 만드는 ‘유리벽’에 관한 이야기. (⌚9분)

[소년의 시간] (2025, 넷플릭스)은 사람에 따라선 지루한 드라마일 수도 있다. 또 사람에 따라선 놀라운 반전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 관심사는 그런 건 아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 이 글은 드라마를 본 독자와 더 많은 의미를 함께 찾기 위한 글이다.

우리는 작품을 닫아야 한다(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규정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초라한 작품도 스스로 열려 있으려고 한다(더 많은 의미를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한다).
그 긴장, 그 대화 속에서 의미가 생겨난다.

1.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을지 모른다. 널리 알려진 그 저널리즘 규범은, 하지만 그 문장을 있는 그대로 일차원적으로 이해하면 범죄와 인간을 둘러싼 구체적인 조건, 그리고 그 조건이 굳어져 하나의 운명,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세계의 법칙에 관한 비판적 관심을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기 쉽다. 그것은 희망의 조건을 탐색하기 위해 그 고통과 슬픔을 알아야 하는 우리에게 무지를 강요하고 변호하는 어리석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서사는 그것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인 경우 그리고 가해자에 부당한 정당화가 되는 경우를 경계하는 권고이지 그 자체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은 아니다. 그것을 계명으로 착각하면, 더는 고민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으면, 악은 더 융성하고, 무럭무럭 자랄 뿐이다. 오히려 그 말은 악을 지키는 방패로서의 도그마가 된다.

그래서 저널리즘이든 영화나 드라마이든 혹은 그에 관한 비평이든 ‘가해자의 서사’는 좀 더 입체적이고 다층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테마다.

다시 [소년의 시간]으로 돌아오자. 드라마는 아주 노골적으로 피해자를 지운다. 동시에 드라마는 아주 노골적으로 가해자와 그 주변에 집중한다. 이것은 의도적이다. 일단 관객이 가장 궁금해야 할 ‘소년의 비밀’에 관한 스포일러 하나. 소년이 범인이다! (이에 관해선 따로 후술).

이 소년이 범인인지 아닌지를 밝혀지는 ‘추리 게임’ 처럼 관객을 교묘하게 속이는(적어도 1화와 2화까지는) 이 드라마의 진짜 관심은 따로 있다. 이 소년의 진범성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맥거핀'(영화에서 큰 의미 없이 다만 관객의 관심을 붙잡기 위한 장치로 설정한 소품이나 컨셉)에 불과하다. 이 드라마는 이 소년에게 아주 다양한 ‘서사’를 부여한다.

왜 범인인 소년에게 이 명백한 범죄자에게 드라마는 이토록 다양한 관점에서 ‘서사(이야기)’를 부여하는가. 그것은 남자 소년의 여자 소녀에 관한 잔혹한 범죄행위에 관한 가부장 감독이나 마초 각본가 혹은 브래드 피트 등이 포함된 제작진의 작정한 여성 혐오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드라마는 남자 소년이 여자 소녀를 죽였다는 일차원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이 벌어지는 범죄의 각 조건들, 원인으로서의 사회적 갈등 구조를 살핀다. 그렇게 추출된 드라마의 풍경을 보면 이 범죄는 우연적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이다. 그것은 마치 봄에 피는 꽃처럼 그렇게 피어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가해자 소년에게 아주 다양한 ‘이야기'(어쩌면 때에 따라선 변명)들은 어쩔 수 없이 부여된다. 그러니까 소년을 부당하게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범죄의 필연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이 드라마는 소년에게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라는 건 무엇인가? 그 필연적 구조라는 건 무엇인가?

오줌싸개

드라마 속 풍경은 모든 게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여느 날과 같이 엄마가 아침밥을 준비하며 식구들을 깨우고, 출근과 등교로 분주한 이른 아침의 평범한 날이다, 경찰이 들이닥쳐 살인 혐의자를 찾는다고 집안을 쑥대밭을 만들기 전까지는. 경찰이 자동소총을 들고 쳐들어오자 주인공 소년(제이미)은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2. 반전 없는 반전 드라마

우선 그 필연의 구조를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큰 스포일러 하나부터 해결하고 넘어가자.

소년이 범인이다. 짧게 해보자.

이 드라마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소년은 혹시 누명을 쓴 건 아닐까? 그래서 억울한 소년을 둘러싼 가짜 혐의를 누군가 영웅적으로 뿅~하고 등장해서 해결해 주지는 않을까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드라마는 그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기대는 절망이 되고, 절망은 체념이 되며, 그걸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는 게 삶이라고 잔인하게 말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드라마는 이제는 오히려 익숙해진 드라마의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건 진짜 삶엔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관객에게 ‘깜짝 놀랐지!’ 하면서 소년의 무죄성을 어느 순간 드라마적으로 ‘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에서, 반전에 익숙한 관객의 관습적 기대(저렇게 착하게 생긴 주인공 소년이 범인일 리 없어!)를 깨뜨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반대 방향에서의) 반전을 선보인다.

드라마는 마치 이 소년이 무죄일 수도 있다고 관객들을 현혹한다.

그래서 관객이 관습적으로 기대하는 주인공의 무죄성에 관한 기대는 가장 평범하고 ‘덜’ 드라마틱한 순간에, 그러니까 소년의 가족이 그들의 생계를 의지하는 허름한 승합차를 차고 모처럼 ‘평범한 가족’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바로 그 순간에, 교도소에서 걸려 온 ‘컬렉트콜’ 전화로 무미건조하게, 가장 스펙터클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러니까 가장 구질구질한 일상의 풍경 속에서, 통보된다. 그게 그 빌어먹을 진실이다. 소년이 범인이다.

20:80의 법칙

소녀 살해 사건의 담당 형사 베스텀 경위 아들 아담이 “아빠는 애들이 뭘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답답해하고,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겨우 사건 해결의 힌트를 얻는다. 아담은 학교에서 늘 괴롭힘당하는 (제이미와 같은) ‘또 다른’ 왕따다. 베스텀이 아들 아담에게 감자칩을 먹으러 가자고 할 때 뜬금없이 아담은 중국 식당 감자칩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여성 80%가 상위 20%의 남성만을 만난다는 20:80 법칙이 ‘매트릭스’ 빨간 알약과 함께 언급된다.

3. 평범한 사람들

이 드라마에서 의미 있는 대사를 부여받은 거의 모든 캐릭터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우선 사건 담당 형사. 중년의 형사는 마침 주인공 소년의 학교에 아들이 재학 중이다. 형사는 성실한 경찰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들과는 좀 더 친해지고 싶지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모른다. 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를 보다 못한 아들은 ‘인셀’이 사건을 풀 실마리라고 일러준다.

소년의 가족. 그야말로 평범한 가족이다. 소년의 범죄로 인해 고통받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끝까지 믿고 싶어 하고, 소년의 누나는 그래도 ‘우리 가족이잖아요’라고 말한다. 누구나 조금씩 부족한 면은 있지만, 이들이 겪은 고통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피해자의 친구. 피해자 소녀의 단짝 친구는 분노한다. 그리고 그 분노를 소년의 친구들에게 풀어놓는다. 이 소녀의 분노를 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소녀의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소녀도 이 범죄의 구조 속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소녀 역시 피해자 소녀와 함께 주인공 소년을 조롱했을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잘못’으로 이 소녀가 죽음을 만들었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피해자. 인기 많은 아이들이 인기 없는 아이들을 놀리고 따돌리고 조롱하는 것. 가령 조금 나이 어린 연진이를 상상해 보시라. 그렇다고 ‘잔인하고 미성숙한 장난'(온라인 집단따돌림)이 죽음의 대가로 되돌려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상담사. 소년의 마음속 비밀을 풀려고 노력하는 이 임상 심리학자도 자기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소년에게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 둘의 ‘대결’은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이 드라마의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벌어지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우주’ 속에서 ‘나쁜 외계인’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를 죽였고, 그 죽음은 필연적이다. 왜 그런가.

인셀(involuntarily Celibate)

케이티가 제이미의 소셜 미디어에 댓글로 ‘인셀'(involuntarily Celibate)이라는 말을 남긴다. ‘인셀’은 연애할 가망이 없는 무능한 남자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로라 베이츠는 그의 책 ‘인셀 테러’에서 인셀의 자기 정당화 기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이버 공간 혹은 오프라인에서 끊임없이 성적 파트너를 구하지만 구할 수 없는,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며 ‘남성을 증오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위치시키는 남성.”(로라 베이츠)

형사인 베스텀 경위가 그 말을 좋은 뜻으로 해석하는 장면은 자녀 세대와 부모 세대의 ‘평범하고 익숙한’ 단절을 잘 보여준다.

4. 죽음의 필연성: 롱테이크

소년이 소녀를 사랑하고, 소녀는 소년을 조롱하고, 소년은 소녀를 죽인다. 드라마를 가해와 피해로 축약하면, 이 드라마는 소년과 소녀의 엇갈린 러브 스토리 혹은 범죄 이야기다. 그것은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이고 슬프면서 잔인하다.

이 드라마를 둘러싼 관심 중 하나는 극단적인 ‘롱테이크'(이어 찍기, 이 드라마는 모든 에피소드가 원 테이크로 촬영됐다)일 텐데, 그 촬영기법을 굳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뭘까. 촬영감독이 ‘놀랐지롱’ 하면서 잘난 척하려고? 아니면 이토록 훌륭한 동선 설계를 과시하려고?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영화(드라마)에서 어떤 테크닉이 이유 없이 존재한다면 그저 잘난 척에 불과한 것에 불과하다. ‘소년의 시간’에서 롱테이크는 어떤 의미인가. 왜 굳이 감독은 롱테이크를 이토록 길게 길게 이어 찍은 것일까.

이 범죄의 구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어져 있고, 함께 존재하며, 그 범죄에 속한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공범자’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그래서 ‘소년의 시간’에서의 롱테이크는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에서의 롱테이크(영원히 깨지지 않은 유년의 성채, 그 완벽한 시간)와 로버트 올트먼의 ‘숏컷'(1993)에서의 롱테이크(모든 사람들이 이 ‘앗싸리 판 같은 세계’에 개입되어 있다)를 함께 뒤섞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소년의 시간’이 사용한 롱테이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영화는 가스파 노예의 ‘돌이킬 수 없는'(2002)이다. 영원히 이 절망이 이 범죄가 이 빌어먹을 시간이 계속될 거다. 소년의 시간이 좀 더 따뜻하게 일말의 희망을 품고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속 시간은 마치 블랙홀의 절망처럼 모든 것을 깊은 어둠과 암흑으로 빨아들인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마을의 풍경, 그런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희망은 이 깊고 어두운 묵시록적 저주의 무게를 더할 뿐이다.

제이미가 ‘소년의 시간’을 거쳐 도착해야 할 ‘어른의 시간’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2002, 가스파 노예)일 것이다.

5. 날 데려가 줘요: Take on me!

이 드라마 속 가장 슬픈 장면은 승합차 속에서 주인공 소년의 부모가 자신들이 젊은 시절 들었던 올드팝, 아하의 ‘테이크 온 미’를 틀어놓고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일 테다.

이 전설적인 올드 팝은 만화 속 캐릭터인 남자와 현실 속 여자가 서로의 세계에 갇혀 서로를 원하지만, 만날 수 없는 운명을 그려낸다. 카레이서 남자는 만화 속에서 뛰쳐나오기 위해 ‘프레임 벽’에 부딪히지만, 번번이 그 ‘프레임’이라는 벽에 쓰러진다. 현실 속 웨이트리스 여자는 그걸 눈물 흘리며 바라본다. 하지만 이 걸작 뮤직비디오에서 그 둘은 끝내 ‘프레임’을 깨고 만난다!

아하(A-ha)의 걸작 뮤직비디오 ‘Take on me’ 중에서.

소년의 부모는 승합차 속에서 ‘테이크 온 미’를 흥얼거리며 아름답고 완벽했던 젊은 시절을 불러와 망가져 버린 일상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소녀 살인마 ‘제이미’를 감옥으로 떠나보내고 그 제이미의 ‘낙인’으로 남겨진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놀리면서 모처럼 정겹게 농담한다.

하지만 그런 일상은 증오에 휩싸인 마을(왜 아니겠는가)의 분노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당한다. 그 증오마저 이 마을에서는 평범하고 이상하지 않다. 한 소녀가 죽었는데, 분노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건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정상적이다.

롱테이크(원 테이크)라는 영원의 시간, 모든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고 이 범죄와 증오에 조금씩은 책임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비난할 수 없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한 그런 평범하고 착한 마을에서 소년이 소녀를 죽이는 그 죽음의 구조는 영원히 반복될 거라고, 그리고 그 추악한 진실은 모처럼 일상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가족에게 그 소년이 걸어오는 ‘컬렉트콜’ 전화처럼 아주 평범하게 ‘통보’되고, 남겨진 가족은 그 잔인한 진실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이 드라마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 마을에서 소년의 범죄성은 너무도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형법적 진실이 이 드라마의 관심은 아니다. 소년이 소녀를 사랑하고, 그 소녀는 그 소년을 조롱하며, 결국 그 소년이 소녀를 죽이는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소년은 계속 소녀를 사랑하고, 소녀는 때로 그 소년을 조롱하며, 그 소년은 결국 그 소녀를 죽일 것이다. 벌할 수 없는 마을, 세계의 원죄성과 소년의 희생 혹은 타락 그리고 그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까지, ‘소년의 시간’ 속 세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2004)의 또 다른 평행우주 같기도 하다.

롱테이크라는 영원의 시간을 사는 이 마을의 사람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진 세계 속에서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지만(형사와 그의 아들, 소년과 그의 아빠, 소년과 소녀, 소년과 상담사, 소녀의 친구와 소년의 친구들), 결국 다가가지 못한다. 영원한 죽음의 시간에 갇힌 이 평범한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투명한 유리벽에 갇힌 것처럼 서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단 한 순간도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그렇게 소년의 시간은 계속 이어진다.

… 어, 그런데… 그거 우리 얘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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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별로 님께

    그것도 아주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다만 몇 가지만 제 생각을 들려드리면(제가 맞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간만에 반가운 댓글이라서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취지에서요),

    1. 13살로 다시 돌아가면,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긴 하지만, 그 ‘몽롱한'(자기 마음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 그런 미숙하고 몽롱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하는 걸 ‘사랑’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뭐 별로 이상하지 않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2. ‘사랑’에 관한 정의와 해석은 수백 수천 수만 수백만 수억 수십억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마르틴 부버의 정의를 가장 좋아하는 편입니다. “사랑은 나와 너 그 사이에 있다”로 시작하는 문장인데, 거기에서도 “사랑은 현재 속에서 살려진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글로 문장으로 사랑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하는 건 부질없고 불가능하다는 취지죠.

    암튼 짧은 댓글이지만 대화를 이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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