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모뎀 칼럼] 왜 리터러시는 미디어 ‘다음에’ 오는가. ‘모자무싸’와 ‘구해줘 홈즈’ 그리고 아버지. (⌚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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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보던 중 이제 하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주인공이 보여주는 행동과 대사를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황동만은 마주 앉은 인물에게 자신의 마음속 감정을 그대로 털어놓다가 TV 방송에서 보도된 테러 사건이 사상자가 없었다는 보도에 실망했다며 이렇게까지 말한다: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참을 수 없는 주인공
이토록 당돌한 자기중심적 사고도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듯 뇌까리는 게, 마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어처구니없이 몰상식한 주장을 늘어놓고는 자신만 그렇게 생각할 리 없다는 태도를 선 넘은 강요와 뒤섞어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가요?”라고 한 줄을 적고 마는 느낌을 섬세한 일상 묘사 영상 작품에서까지 만나는 게 싫었기 때문일까, 시청자로서의 도덕적 주관을 눌러가며 테러리즘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인물들의 주거니 받거니 대사로 가볍게 소화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데 반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3화를 보다가 말고 페이스북 담벼락에 하차나 해야겠다고 쓰며 1화를 보자마자 추천처럼 소개했던 나 자신의 성급함에 고개를 젓기도 했다.

문득 떠오른 며칠 전 부친과의 TV 다툼
그러다 문득 부친과 TV를 보며 다퉜던 며칠 전 일이 기억났다. 부친은 내가 틀어둔 연합뉴스TV 채널을 무심코 바꿔가며 MBC 구해줘 홈즈를 잠시 시청하시다 역정을 내셨다. 화면 속에 나와서 30평 인테리어를 엉터리 수준으로 마무리하고도 그걸 잘했다며 잘난 체하는 저 홍대 교수의 꼬락서니가 너무너무 보기 싫다며 온갖 욕설을 퍼붓고 계시는 부친을 그냥 지나치기 싫어서 넌지시 이견을 던졌다.

저 인테리어를 한 사람은 자기 나름의 미감과 수준과 취향이 있는데 그게 부친의 높은 식견과 맞지 않을 뿐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시지 않냐고 말이다. 부친은 했던 말을 또 하시되 약간의 장조 변화와 가락 변주를 넣어가며 라임을 개선하듯 계속 화풀이하셨고 나도 그에 후렴을 넣듯 비슷하게 바꿔 비슷하게 계속 되풀이해 드렸다.
나의 그런 무례함에 질린 표정을 하신 부친은 곧 MBC가 문제다 좌빨이라 그렇다 MBC라서 이런 것이라 하셨고 난 왜 그게 방송사의 문제냐, 문제가 있다면 저 프로그램을 만든 작가와 PD의 성향이지, 그리고 아버지 마음에 안 들어도 저 사람들이 만든 저 프로그램은 굉장한 인기가 있는데 그건 저기 나오는 사람들의 인테리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설령 그게 아버지 주장처럼 수준이 덜떨어진 것이라 해도 그건 어떻게 보면 수준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와 저 사람들의 시각과 취향이 다른 것일거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SBS건 KBS건 JTBC건 그 사람들의 방식과 스타일이지 그게 어떻게 방송사가 좌빨이고 우빨이라서 그렇게 되는 거냐 라고 랩을 하니 아버지는 모든 방송사가 MBC 스러워져서 그런 거라고 왜 당신이 보는 유튜브를 자꾸 못 보게 방해하고 방송을 틀어놓느냐고 내게 더 크게 화를 내셨고 나도 목소리를 키워서 AI AI 슬롭(AI Slop; AI 양산형 저질 생산품)을 계속 알고리즘으로 쫓아가시면서 무슨 방송사를 욕하냐 결국 아버지는 아버지 마음에 조금이라도 안 드는 건 내치시는데 그걸 사회 상식에서는 편향적 사고라고 하는 걸 아버지가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하고 불효를 계속하고 아버지는 더욱 역정을 내시며 왜 자신을 괴롭히냐고 소리 소리를 지르시고 결국 나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방송사가 좌가 어떻고 우가 어떻고 방송이 다 똑같고 유튜브를 봐야겠고 하다가 그 끝에 가면 술 취해서 계엄령이나 내리고 감옥에 가는 윤석열이 되는 거 아니겠냐, 난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랑 닮아가는 게 싫은 거다”라고 하소연처럼 이야기하면 그 이름 석 자는 참기 어려우셨는지 싸움을 끝내고 화해하기로 하는 아버지가 지금 생각해 보니 나보다는 인내심이 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를 단순하게 만든다
아버지와 나는 그날 싸움을 끝내면서 조단하게(이야기를 차분하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래도 아들이 중립적으로 이야기하려 애쓰는 게 고맙다는 아버지와 ‘요새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중요하대요’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몇 자로 시사 상식 공유해드리듯 까부는 아들의 자리를 맞추며 다음에는 조금 더 차분하게 서로 이야기를 하고 배려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최근 10년 남짓 소셜미디어에서 영상이건 텍스트건 서사 콘텐츠에 대해 까탈스럽지만, 단순한 불만을 토하는 독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왜 저 악당에게 사연을 주냐? 악당 악인에게 사연 좀 그만 주라고! 세탁기 좀 그만 돌리라고’ , ‘또 주인공이 불행하게 됐네요. 고구마 서사가 길어서 하차가 마렵습니다. 사이다는 언제 주나요?’ ‘아 제발 화끈하고 시원하게 가자고! 여기서 왜 깜빡이를 켜고 꺾어서 답답이 조연들이 또 바보짓 하는 거 보여주냐!’ 같은 목소리를 접할 때마다 난 혀를 끌끌 차며 풍부한 이야기와 입체적인 인물들을 견디지 못하고 그저 회빙환(회귀∙빙의∙환생)으로 절대 능력을 얻은 주인공들이 시원시원하게 원펀치로 무공이든 권력이든 돈이든 세상 부조리를 파괴하는 서사물의 범람에 대다수 간판 콘텐츠가 고난 없는 무협물처럼 돼버리다 유튜브 쇼츠에 밀려 주저앉으니 우리 독자 시청자 스스로 우리 두뇌를 단순하게 만드는구나 고고하게 한 걱정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뭇 대중의 수준을 폄하하고, 아버지에게 미디어 리터러시를 들먹이며 싸우는 나는 정작 피카레스크(Picaresque; 도덕적 결함이 있는 악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이끄는 문학 및 영상 장르)라고 보기도 어려운 그러나 배우의 생생한 연기와 작가의 섬세한 각본으로, 너무나 현실적으로 짜증스러운 솔직함과 민폐를 거듭하는 인물의 비도덕적인 사고 표현을 못 견뎌, 칭찬으로 시작했던 드라마를 하차하려 하고 있었다니.
근접 평향
세상 많은 편향 분류 중에는 나도 꽤 알고 있지만 오래 잊고 있던 근접 평향(Proximity Bias; 물리적, 시간적, 심리적으로 자신과 더 가까운 사람이나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선호하고, 멀리 있는 것을 과소평가하거나 경시하는 인지 편향)이란 게 있다.
시간과 공간에 가까운 것을 선호하는 인지적인 편향으로 사람도 가깝고 자주 보는 사람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세대 차이에 민감해 줄임말이나 유행어를 남발하면서까지 편향의 공동체적 방향성을 뚜렷하게 보이며 급기야는 가까운 사람 가까운 사물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 같은 세계관을 이루고 있다는 심리에 빠져들게 되다 보니 음악도 만화도 어렸을 때 유행했던 인기 차트가 올타임 골든 초이스가 돼버리는 문화 퇴행 현상까지 불러오는 것.

그런 편향을 지양하며 대중문화를 감상하고 언론 미디어를 마주한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자 이 정도는 당신 같은 사람이 견딜 수 있겠어?’하고 던지는 날것 그대로의 연출에는 벌떡 일어서서 도망가고 만 것이다. 그 전까지 그 드라마를 견딘 것도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닌 주인공의 형 같은 주변 인물을 좇으며 저 인물 마음에 드네 박해준 역시 좋은 배우구나 하고 시청자로서의 현실 도피까지 하고 앉았던 건 덤이었다.
얼마 전 겪었던 작은 싸움과 겹쳐서 돌아보니 정작 가치평가를 굉장히 협소하게 두며 편향적 사고로 드라마를 보고 있던 내가 우스워졌고 그제야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드라마의 4화까지 보고 나서야 너무너무 짜증 나고 화가 나기까지 했던 인물의 면면을 그대로 마주하며 자기연민의 화신 그 자체인 주인공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돌이키게 됐고, 주인공과 대립하는 또 다른 인물에 대해 그 인물의 배우자가 ‘당신도 주인공과 똑같다,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고 타박하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대립자의 아내도, 남자 주인공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는 여자 주인공도 좋다 나쁘다는 평가 이전에 인물들 그 자체를 그대로 마주하고 이해하는 태도로서 누구보다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저 드라마 속 주인공보다 훨씬 비루하고 무가치한 세상 사람 A일 뿐인데 그걸 마주하고 세상을 새롭게 살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목소리를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이 들자, 그제야 미디어 리터러시가 왜 ‘문해력’을 뜻하는 리터러시를 미디어 뒤에 붙였을 뿐인데 ‘정보의 비판적 수용’이 되는지도 참 뒤늦게 깨닫게 된다. 결국 리터러시는 어떤 사건을, 어떤 사람을, 어떤 이야기를 그대로 읽어내는 것을 뜻한다는 걸. 그대로 마주하고 읽어내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자신의 중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난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좋아하게 됐다.
물론 그래도 주인공은 싫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