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문화 »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한국 영어교육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단연 ‘인풋(input)’입니다.

  • 영어학습은 딴 건 필요 없어. 인풋을 늘려야지.
  • 무조건 많이 들어. 그래야 늘어.
  • 공부하려고 하지 말고 노출을 늘려야 돼.

이런 이야기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게 바로 ‘인풋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이죠.

‘인풋’은 만능일까? 

영어는 영어로 배워야 하고, 영어에 많이 노출(exposure)될수록 영어를 잘하게 되며, 다른 길은 없다는 요지입니다.

이에 따르면 수업시간에 한국어 사용은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대학의 전공과목도 영어강의로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듣고 있으면 언젠가 소리에 익숙해지면서 귀가 뻥 뚫리는 마법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들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논란이 있지만, 외국어 학습에서 언어 입력(input)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타를 직접 쳐보지 않고 기타를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물에 들어가지 않고 수영을 배울 수 있다고 우길 순 없으니까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인풋’이라는 건 내가 배우려고 하는 언어 자체입니다.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 언어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반기를 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그렇다면 외국어 인풋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까요? 다량의 인풋은 영어학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한국 영어학습의 초특급 키워드 인풋(input)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인풋'만 제대로면 만사형통일까?

‘인풋’만 제대로면 만사형통일까?

인풋, 언어이해 그리고 배경지식 

외국어 학습에서 외국어 인풋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지만, 한국어 배경지식이 갖는 중요성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1. 어떤 언어이든 간에 언어는 혼자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기반 위에서 돌아갑니다.
  2. 한국인이라면 경험과 지식 대부분이 한국어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외국어를 읽고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국어 지식과 함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갖추어야만 합니다. 어떤 언어를 공부하든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박상을 입으면 상처가 남듯이 모든 경험이 모국어로 구성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경험은 한국어로 표현되고 공유되며 체계화됩니다. 우리말은 우리의 경험 곳곳에 스며있습니다.

미드(혹은 영드)로 영어공부하는 건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죠.

미드(혹은 영드)로 영어공부하는 건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죠.

일상에서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한국어 자막의 효용일 것입니다. 그냥은 잘 들리지 않던 영어 뉴스 혹은 영어 드라마도 한국어 자막과 함께 보면 이해되는 경우가 많죠.

이는 외국어의 소리가 그 자체로 청자에게 전달된다기보다는 (주로 한국어로 된)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뇌에서 처리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종종 털어놓는 걸 보면 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닌 듯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국어와 외국어의 상호작용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영어 인풋을 이해하는 데 풍부한 배경지식이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신경언어학의 연구는 사춘기 이후 외국어를 처음 배웠을 경우 모국어(L1)와 외국어(L2)가 사뭇 다른 ‘회로’와 활성화 패턴을 통해 처리됨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국어 자막이 외국어 이해에 실시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다수의 경험은 모국어와 외국어가 엄청난 속도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테니스 영웅 정현의 인터뷰 비법?

정현의 영어 인터뷰 실력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 (2018. 1. 28.) http://news.joins.com/article/22324145

정현의 영어 인터뷰 실력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 (2018. 1. 28.)

“영국 신문 ‘가디언’은 8강전 직후 “로저 페더러와 토마시 베르디흐 중 4강전 상대로 누굴 원하냐”는 질문에 “반반”이라고 한 정현의 위트를 놓고 “외교관급 화술”이라고 칭찬했다.” (위 기사 중에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정현 선수의 적당한 유머가 담긴 절묘한 인터뷰는 ‘영어’공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소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나왔다고 봐야겠죠. 언어를 공부하는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사에도 나오지만 특정 문화에 대한 관심, 주도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연습 등이 멋진 인터뷰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를 표현의 암기가 아닌 문화적인 산물로, 의사표현의 매개로 배운 것입니다.

흔히들 유머 ‘감각’이라고 말을 하죠. 감각은 단기간에 암기하거나 체화할 수 없습니다. 오랜 기간의 경험과 고민, 깊이 있는 학습으로 길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적절한 유머의 구사는 복잡한 인지적, 정서적 요인에 대한 고려와 순간적인 판단을 요하는 고도의 언어능력입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즐거움과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를 즉석에서 구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어 능숙도와 자막의 효용

다만 엄밀한 연구를 위해서는 학습자들이 자막을 켜고 영상을 볼 때 ‘들린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어디까지가 실질적 이해이고 어디까지가 ‘이해했다는 착각’ 혹은 사후적 합리화인지 밝혀내야 하는 과제가 남습니다.

예를 들어 저와 같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능숙한 학습자가 영미권 드라마를 볼 때엔 다음을 가정할 수 있겠습니다.

  1. 영어 구어체에서 사용되는 어휘적, 문법적 패턴에 익숙하다. 즉 해당 언어의 일상어(colloquial language) 전반에 대한 지식이 있다.
  2. 드라마 전개상 해당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대략적인 파악한 상태다. 기존 스토리라인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추측(inference)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3. 드라마의 소재가 특이하지 않다면 해당 대화에서 나올 수 있는 대략적인 어휘 집합(lexical sets)에 대해 배경지식이 있다. 이는 드라마의 내용과 연관된 어휘지식에 해당한다.
  4. 드라마 시즌의 후반부를 보고 있다면 이전 에피소드들을 통해 주요 인물의 발음과 대화 패턴을 암묵적으로 익힌 상태다. 이는 각각의 인물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자막을 켜고 볼 때 시청자의 뇌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언어 능숙도에 따라 뇌의 여러 부위는 어떤 활성화 패턴을 보이게 될까요?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 영어 자막의 효용은 어디까지일까요?

이런 주제로 깊이 있는 연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 연구 결과를 근거로 ‘자막 금지’나 ‘무조건 자막 끄고 5번 이상 보세요’보다는 훨씬 더 나은 설명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생각 아이디어 소녀 아이

그래서 자막은 어쩌라는 겁니까?

이쯤에서 이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막 사용 여부를 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집중력의 한계, 동기 수준, 가용 학습시간 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 학습의 목표가 소리에 익숙해지는 데 있다면 자막을 끄고 반복해서 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2. 하지만 영어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자막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겠죠.

전자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상향식(bottom-up) 정보처리에 중점을 둔 공부라면 후자는 하향식(top-down)에 방점을 찍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언어 이해에서 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메커니즘인데, 이는 추후 설명하겠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막을 무조건 끄고 보아야 한다는 원칙에 매달리다가 영어학습에 대한 동기가 급속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이걸 자막도 없이 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시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영어를 배울 때 이 두 가지 모드를 혼합하여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결론적으로 자막을 꺼야 인풋이 많아지고, 인풋이 많아져야 영어를 더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영상으로 영어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자막 끄고 봐야 돼? 켜고 봐야 돼?’라는 질문으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미드로 영어공부, 자막은 켤까 끌까? 그때 그때 달라요~!

미드로 영어공부, 자막은 켤까 끌까? 그때 그때 달라요~!

삶을 위한 영어공부

언젠가 Claire Kramsch 선생님 수업에서 들은 이 한 마디가 여전히 제 심장에 남아있습니다. 너와 나를 가르고, 마음에 상처를 내며, 목을 뻣뻣이 세우는 영어가 아니라 성찰하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하도록 만드는 영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 ²

  1. 외국어를 배우는 두 가지 목적
  2. 영어는 인풋? – 1. 자막, 넣고 볼까 빼고 볼까 
  3. 영어는 인풋? – 2. 크라센, 인풋 이론을 체계화하다
  4. 영어는 인풋? – 3. ‘학습’하지 말고 ‘습득’하라 
  5. 필사, 영작문에 도움이 되나요?
  6. 영어는 인풋? – 4. 외국어 습득엔 ‘순서’가 있다?
  7. 영어 이름, 꼭 따로 필요할까?
  8. 한국식 영어 발음, 꼭 고쳐야 할까요?
  9. 영어교육과 홍익인간의 관계
  10. 쓰기의 마법: 생각과 글쓰기의 관계

좋은 기사 공유하고 알리기
슬로우뉴스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후원해주세요. 필자 원고료와 최소한의 경비로 이용됩니다.

필자 소개

김성우
초대필자, 응용언어학자

성찰과 소통, 성장의 언어 교육을 꿈꾸는 리터러시 연구자입니다. "삶을 위한 영어공부"라는 관점에서 영어교육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산문집 [어머니와 나]를 썼고, ‘영어논문쓰기 특강’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작성 기사 수 : 69개
필자의 페이스북 필자의 트위터

©슬로우뉴스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슬로우뉴스 안내 | 제보/기고하기 | 제휴/광고문의
등록번호: 경기아51089 | 등록일자: 2014년 2월 10일 | 발행일: 2012년 3월 26일
주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동판교로 153 802-902 | 발행인: 김상인 | 편집인: 강성모 | 청소년보호책임자: 강성모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