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한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키코(kiko)’를 기억하는가?

지난 6월 20일 국회 간담회를 통하여, ‘키코 사건’의 피해기업들과 투자자들이 검찰의 재수사를 촉구하고 나서면서 사건의 실체가 재조명되고 있다. 한국기업회생지원협회에 따르면 초기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에 가입한 기업은 1,000개를 넘었다.

피해 규모는 최소 3조 원 수준이며, 도산과 상장폐지 등으로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기업까지 보태면 10조 원 규모로 추산한다. 피해 규모도 규모지만, 피해 당사자가 한국 경제와 함께 견실하게 성장해온 수출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키코 사건은 우리 경제에 큰 상처를 입혔다.

견실한 중소기업의 무더기 파산을 초래한 '키코'
수출 중소기업의 무더기 파산을 초래한 ‘키코’.

[box type=”info” head=”키코(kiko)란? “]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할 경우, 미리 약정한 환율에 약정금액을 팔 수 있도록 한 파생금융상품이다.

녹인 녹아웃(Knock-In, Knock-Out)의 영문 첫글자에서 따온 말로서 환율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한 환헤지 상품으로, 가령, 어떤 기업이 약정액 100만 달러를 1달러당 약정환율 1000원, 하한 950원, 상한 1050원으로 정하여 은행과 계약했을 때, 만기시 환율이 970원으로 내려가더라도 약정환율 1000원을 적용받아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또 만기시 환율이 1000원에서 1050원 사이에 해당할 때는 시장가격에 매도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시장환율이 약정환율보다 높을 경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환율이 하한 이하로 내려가면 계약이 무효가 되어 환손실을 그대로 감수해야 하고, 상한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에는 더 큰 손실을 입는다. 보통 상한 이상으로 오를 경우 약정금액의 2배 이상을 팔아야 한다는 옵션이 붙기 때문에 손해가 더욱 커진다. 2배의 옵션인 경우, 약정액 100만 달러 외에 100만 달러를 오른 환율로 매입하여 은행에 매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환율이 하한과 상한 사이에서 변동한다면 기업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안겨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비하여 손실의 위험성이 훨씬 크다. 2008년 한국에서 환율이 급등하였을 때, 은행과 키코 계약을 맺은 중소기업들이 큰 손실을 보았으며, 견실한 중견기업체가 환차손으로 흑자도산한 사례도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키코 [KIKO] (두산백과) 중에서)

[/box]

키코 사건의 본질

키코 사건의 본질에 대하여는 은행의 사기 행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기업 측 입장과 기업의 투기에 기인한 것이라는 은행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IMF 자료에 따르면, 키코와 유사한 형태의 파생상품에 기인한 거대 손실 사례는 한국, 일본, 중국,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지역뿐만 아니라,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과 폴란드 등 유럽 지역에서도 발생하였다.

각국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주요 쟁점은 어김없이 은행의 ‘사기’ 여부였다. 키코와 동일한 구조의 파생상품은 미국이나 이탈리아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인도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도 일찌감치 사기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 검찰이 기소조차 제대로 못 해본 상태에서 민사소송에서 사기가 아니라는 이례적인 판단이 내려진 것이다.

대법원
대법원

우리 대법원은 2013년 9월 26일 4건의 키코 사건 전원합의체판결(세신정밀, 삼코, 수산중공업, 모나미)에서 키코 상품의 본질에 관하여 헤지(Hedge: 위험 회피) 부적합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기 또는 착오로 인한 취소 등 기업 측이 주장한 무효 또는 취소 사유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판단한 것은 적합성 원칙과 설명의무에 집중되었다.

[box type=”info”]

  1. 대법원 2013.9.26, 선고, 2013다26746,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장 양승태(재판장) 양창수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 이상훈 박병대(주심) 김용덕 박보영 고영한 김창석 김신 김소영.
  2. 대법원 2013.9.26, 선고, 2011다53683,53690,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장 양승태(재판장) 양창수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주심) 이상훈 박병대 김용덕 박보영 고영한 김창석 김신 김소영.
  3. 대법원 2013.9.26, 선고, 2012다13637,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장 양승태(재판장) 양창수(주심)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 이상훈 박병대 김용덕 박보영 고영한 김창석 김신 김소영.
  4. 대법원 2013.9.26, 선고, 2012다1146,1153,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장 양승태(재판장) 양창수 신영철 민일영 이인복 이상훈 박병대(주심) 김용덕 박보영 고영한 김창석 김신 김소영.

[/box]

키코 사태의 본질은 ‘사기적 판매 행위’인데, 우리 대법원이 이를 밝히지 못한 점은 진실 규명과 사법 정의 차원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은행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투기 상품을 기업의 헤지 상품으로 호도하다 보니, 사기나 착오의 문제가 대법원에서는 깊게 다루어지지도 못하였다는 점 또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은행 측이 사기라는 주장의 근거

키코 소송에서 은행은 키코 상품을 일종의 보험상품(헤지상품)으로 판매하였다고 주장하고, 기업도 환율변동에 대한 보험상품으로 알고 계약을 체결하였다고 주장하며, 각급 법원도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보험상품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보험계약자인 기업이 거액의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반인의 상식으로 보험계약자가 보험계약으로 인하여 거액의 손해를 입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돈 수입 달러

기업 주장의 요점은 거액의 손실 자체가 키코상품은 보험상품이 아닌 투자상품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은행이 투자상품을 보험상품으로 가장하여 판매한 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키코 법정에서 한 재판관이 은행 측에 물었다.

“카지노에서도 6:4 비율 정도의 승률은 지켜지고 있는데, 키코 사태는 12:0으로 중소기업이 완전히 잃고 있는데 이 정도면 사기 아닌가요?”

이에 관한 대법원 민사 판결의 입장은 키코가 ‘헤지 상품’이라는 것이다.

대법원 판단의 근본적 오류

대법원 판단의 근본적 오류는 다음 내용에서 발견된다.

“헤지 거래를 하려는 당사자가 현물의 가격 변동과 관련하여 특별한 전망이나 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특정 구간에서만 위험 회피가 되는 헤지 거래도 다른 거래 조건들과 함께 고려하여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 구간에서 위험 회피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구조적으로 헤지에 부적합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대법원은 키코 상품이 가격변동의 일부 구간에서라도 헤지 기능이 있으므로 헤지 상품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수많은 기업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키코 계약을 체결했다가, 도리어 거대손실로 도산했다는 모순적인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가격 변동 위험은 일부 구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격 변동의 전체 구간에 걸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 제거 내지 감소 여부는 전체 구간을 대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즉, 실제로 헤지의 효과는 가격 변동 위험의 일부 구간에만 작용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전체 구간에서 작용하여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택 초이스 거짓 진실 거짓말 갈림길

사실 헤지하고자 하는 위험이 일부 구간에만 존재하는 작은 위험이라면 굳이 보험을 가입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키코 상품의 근본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일부 구간에서 헤지가 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부분 헤지(partial hedge)’로 포섭하며, 헤지 거래로 판단하고 있어 상품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대법원 판단대로 키코가 부분 헤지 상품이었다면, 위험을 부분적으로밖에 회피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을지언정, 그 상품의 구입으로 인한 거대 손실이 발생할 까닭은 없다.

감기 보험 vs. 암 보험

대법원은, 키코가 발생 가능성이 낮은 위험은 기업이 스스로 감수하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위험에 한정하여 헤지가 가능하도록 설계된 상품이라고 판단한다. 위험의 헤지 여부 판단에 있어서는 발생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위험의 크기가 중요한데, 대법원은 위험의 크기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즉, 발생 가능성이 아무리 높더라도 위험의 크기가 작다면 헤지의 필요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감기는 발생 가능성이 높지만, 위험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감기 보험을 별도로 가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법원 판단을 비유하자면, 키코 계약에서 기업은 발생 가능성이 높지만, 작은 위험인 ‘감기의 위험’만 보험계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발생 가능성이 낮지만 큰 위험인 ‘암의 위험’은 무보험으로 스스로 감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감기'에 걸리면 보험금을 받지만, '암'에 걸리면 그 위험을 모두 감수하는 보험에 가입하겠는가?
당신이라면 ‘감기’에 걸리면 보험금을 받지만, ‘암’에 걸리면 그 위험을 모두 감수하는 보험에 가입하겠는가?

키코 상품은 왜 더는 판매되지 않는가? 

키코 상품이 대법원 판단대로 이색적이기는 하지만 정상적인 범위에 드는 헤지 상품일까? 키코 상품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만약 문제가 없는 상품이라면 은행은 유사한 상품을 계속 기업들에 판매할 수 있어야 하는데, 키코 상품의 판매가 중단된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부분적으로는 키코를 통하여 환헤지를 하던 많은 수출기업이 막대한 손실을 경험함으로써 얻은 학습효과로서, 키코와 유사한 구조의 상품이 환율 헤지라는 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직접 체득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보험계약을 체결했는데, 거대 손실로 기업이 도산했다는 모순적인 사실을 외면하는 대법원 판단을 평균적인 소박한 시민의 상식으로 공감할 수 있을까?

대법원의 논리처럼 '키코'가 정상적인 상품이었다면, 왜 더는 판매되지 않는가? (출처: Jeremy Brooks, "No Sale", CC BY NC) https://flic.kr/p/6pmHZS
대법원의 논리처럼 ‘키코’가 정상적인 상품이었다면, 왜 더는 판매되지않는가? (출처: Jeremy Brooks, “No Sale”, CC BY NC)

요컨대, 키코 상품은 전체 구간을 통해 헤지가 가능하지 않은 상품으로서 본질에서 헤지 상품이 될 수 없었다. 백번 양보하여 이 상품의 본질을 모르고 감기 보험인 줄 모르고 들었다가 대신 암의 위험을 감수하게 되면서, 결국 수많은 견실한 수출 중소기업이 도산에 이르게 된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피해 중소기업들에 상품을 판매한 은행들로부터 적절한 손해배상의 길을 가로막아버린 대법원 판결의 오류가 지금이라도 바로잡히길 바라며, 나아가 검찰 조사를 통해 키코상품 판매에 있어서 은행의 사기성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divide style=”2″]

[box type=”note”]

2017년 9월 퇴임을 앞둔 양승태 대법원장에 관해서는 여러 평가가 가능할 것입니다. 특히 법원 내 연구모임에 대한 외압이나 법관 블랙리스트 의혹을 계기로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 권한과 법원행정처에 대한 개혁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평가 기준은 바로 ‘판결’입니다. 대법원의 역할은 법과 양심에 따른 올바른 판결로 분쟁을 해결하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과연 양승태 대법원장은 판결로써 그러한 역할을 다하였는지, ‘양승태 대법원’의 주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평가해보고자 합니다.

이번 칼럼을 시작으로 총 7회에 걸쳐 ‘판결비평칼럼-양승태 대법원장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대법원을 평가하고, 향후 새롭게 임명될 대법원장의 요건과 이후 대법원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제시해보려 합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1. 2009년 6월,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 교사들은 정말 유죄였나 (곽노현) 
  2. 문재인의 탈원전 ‘공론화’ vs. 제주 해군기지 ‘날치기’ (김필성) 
  3. ‘시효’ 뒤에 숨은 국가배상책임 (이상희)
  4. 신속하고 잔인하게 – 쌍용차 대법원 판결을 회고한다 (김태욱)
  5. 감기 보험 vs. 암 보험: 키코의 본질과 대법원의 오류 (박선종)
  6. 시대착오적인 ‘기성회비’ 판결 (2015) (임재홍)

¶. 이번 칼럼의 필자는 박선종 교수(숭실대학교 법과대학)입니다.

[/box]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