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반도체 IP 기업인 ‘암'(ARM)은 자타가 공인하는 모바일 시장의 숨은 지배자다. 스마트폰만 따지면 ARM 설계를 적용한 칩 점유율은 97%에 달한다.
ARM은 2016년 7월 전 세계 IT 업계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소프트뱅크가 240억 파운드, 한화로 36조 원에 이르는 거액을 들여 ARM을 인수하겠다고 밝힌 것. 당시 소프트뱅크가 밝힌 ARM 인수의 이점을 보면 지적재산권에 대한 라이선스, 커넥티드카를 비롯한 사물인터넷 시장 등 혁신에 주력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눈에 띈다.
실제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모바일 광대역이 폭발적으로 보급된다면 그 다음에 올 패러다임으로 사물인터넷을 지목한다. 사물 하나하나가 인공지능이 분석한 정보를 수집한 센서를 바탕으로 인터넷에 연결되는 세상이 되면 기반 기술을 보유한 ARM의 잠재 시장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폭발적이라는 얘기다.
그는 이런 점에서 ARM 인수에 들어간 금액을 두고 “겨우 240억 파운드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ARM이 노리는 다음 시장은 명확하며, 최근 ARM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하다.
ARM ‘다이내믹’, AI·VR 시장 정조준
먼저 살펴볼 건 ARM이 직접 노리는 시장. ‘다이내믹(DynamiQ)’은 ’17년 3월 ARM이 발표한 새로운 기술이다. 차세대 코어텍스-A(Cortex-A) 기반 기술로 선보인 다이내믹은 인공지능이나 머신러닝 같은 분야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여 자동운전 차량 등에서 활용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다이내믹은 코어텍스-A를 비롯한 ARM의 멀티코어 마이크로 아키텍처에 변화를 줄 것으로 보인다. 유연성과 다기능을 겸한 기술로 공통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기기에서 멀티코어 환경을 재정의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ARM이 이전에 선보인 ‘빅리틀(big.LITTLE)’은 말 그대로 빅(고성능), 리틀(저전력)을 구현한 것이다. 고성능 코어 2개 혹은 4개에 같은 수의 저전력 코어를 결합, 같은 디자인으로 2가지 ARM 프로세서를 쓸 수 있게 한 것.
‘다이내믹’은 빅리틀 기술의 진화형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빅리틀은 앞서 밝혔듯 같은 수를 써야 했지만, 다이내믹은 지금까지 구현할 수 없던 1+7처럼 활용도에 따라 최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ARM에 따르면, 다이내믹 기술을 적용한 코어텍스-A 프로세서는 현재 선보인 코어텍스-A73 시스템과 견주면 앞으로 3∼5년 안에 인공지능 성능을 50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CPU 성능 역시 10배까지 높일 수 있다는 설명.
또한, 다이내믹 기술을 이용해 SoC를 설계하면 단일 클러스터에서 8코어까지 확장할 수 있고, 코어마다 서로 다른 성능과 전력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런 멀티코어를 구현할 때의 유연성 덕에 머신러닝이나 관련 응용 프로그램에 대한 빠른 대응이 가능하다. 더불어 재설계한 메모리 서브 시스템을 통해 데이터 접근 속도가 빨라지고 전원 관리도 강화된다.
다이내믹은 또 자동차에 이용하는 ADAS 솔루션의 응답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안전성을 향상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또, ASIL-D 호환 시스템을 구축해 장애가 발생해도 안전한 운용을 기대할 수 있다. 자동 운전 시스템을 더 안전하고 빠르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ARM은 지난 5월 다이내믹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CPU인 ‘코어텍스-A75(Cortex-A75)’와 ‘코어텍스-A55(Cortex-A55)’, 신형 GPU인 ‘말리-G72(Mali-G72)’를 발표했다.
코어텍스-A75는 높은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싱글 스레드 성능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같은 주파수 동작을 기준으로 견주면 이전 세대 코어보다 성능이 20% 높아졌고 최대 클록 주파수도 3GHz에 이른다.
함께 발표한 코어텍스-A55는 기존 코어텍스-A53보다 성능은 18% 높이고 전력 효율은 15% 끌어올렸다. 또 메모리 성능은 2배, 확장성은 10배 이상이라고 설명한다. 이 제품은 사물인터넷 기기 등에 맞는 제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들 코어는 다이내믹 기술을 채택한 다이내믹 빅리틀(DynamIQ big.LITTLE) 기술을 기반으로 삼는다. 응용 프로그램과 시스템 작업에 따라 명령이나 제어를 바꿔 전반적으로 전력과 효율 두 가지를 모두 끌어올릴 수 있게 개발한 것이다.
말리-G72의 경우 고성능 GPU로, 코드명 ‘비프로스트(Bifrost)’를 기반으로 한 2세대 모델이다. 소비전력이 높은 고화질 모바일 게임을 겨냥한 것으로 모바일 가상현실 게임 등을 겨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말리-G72는 머신러닝에도 최적화돼 있다고 설명한다.
ARM이 발표한 다이내믹 기술을 기반으로 한 프로세서는 머신러닝과 가상현실 등에 대한 대응력을 높인 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다이내믹 기술이 자동운전 차량 등에서 효율이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빠른 응답이 필요할 때 다이내믹 기술이 특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한 프로세서는 내년 초부터 판매될 예정이다.
ARM이 다이내믹 기술을 내걸었다는 건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자율주행차량 등 사물인터넷과 머신러닝 같은 분야를 강화한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ARM에 따르면, 다이내믹 기술은 인공지능이나 머신러닝 성능은 50배, CPU 자체 고속화 수준도 10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ARM 생태계가 노리는 또 다른 시장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ARM의 확장은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할 당시 손정의 회장이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밝혔듯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ARM 세력 확장은 블루오션뿐 아니라 기존 시장까지 포함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인텔, 퀄컴과 손잡고 항상 연결하는 ‘올웨이즈 커넥티드(Always Connected)’ 구상을 발표했다. 차세대 유심인 eSIM을 내장, 윈도PC도 휴대폰처럼 언제 어디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게 해 ‘윈도10’ 기능을 제공하는 모바일 기기를 말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를 중심으로 항상 모바일에 연결된 상태에서 사용하는 커넥티드 디바이스(connected device)가 늘어나고 있다. 통신 속도가 빨라지고 요금은 내려가면서 앞으로는 이런 상시 접속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높아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ARM은 이런 올웨이즈 커넥티드 구도에도 등장한다. 지난 5월 초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개발자 컨퍼런스인 ‘빌드2017’ 기간 중에는 ARM 버전 윈도10 구조와 실제 데모가 공개되기도 했다. 이유는 상시 접속을 전제로 한다면 저전력을 특징으로 삼고 저전력 모뎀 등을 내장한 ARM 기반 프로세서를 쓴 윈도10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데모 영상에서 공개한 건 퀄컴 ‘스냅드래곤 835’를 얹은 태블릿. 여기에는 ARM 버전 윈도10을 운영체제로 탑재했다. ARM 버전 윈도10에선 에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통해 x86 버전 ‘윈도10 프로’가 실행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엣지’ 같은 브라우저 작동은 물론 USB 웹캠을 연결하고 윈도10 표준 앱을 실행해 별다른 문제 없이 영상을 볼 수 있다. 스마트폰과 달리 드라이버 탓에 고생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ARM 버전 윈도10은 x86 버전 윈도10과 마찬가지로 윈32(Win32) 애플리케이션이 실행된다는 게 가장 큰 특징. 윈32 응용 프로그램은 사이트에서 실행 파일만 내려 받아 설치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일반 윈도10과 전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덕분에 기존 소프트웨어 자원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별다르게 주의할 것 없이 여느 윈도10 프로 기능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에뮬레이터를 이용하지만, ARM 버전 윈도10은 윈32 응용 프로그램을 에뮬레이터로 네이티브 앱에 가까운 형태로 실행할 수 있고 UWP(Universal Windows Platform) 응용 프로그램까지 지원한다.
ARM 버전 윈도10 출시는 스티브 몰렌코프 퀄컴 CEO가 올해라고 발언한 바가 있다. 몰렌코프 CEO는 지난 4월 열린 2분기 결산 발표 이후 투자자 질문에 스냅드래곤 835를 탑재한 첫 윈도10 노트북이 올해 4분기 등장할 것이라고 답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마찬가지로 퀄컴은 ARM 버전 윈도 노트북이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고속 회선과의 상시 연결을 전제로 한 제품이라고 정의한다. 그도 그럴 것이 스냅드래곤 835 같은 ARM 기반 프로세서는 태생 자체가 고성능과 저전력을 바탕으로 삼는다. 긴 배터리 사용시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퀄컴은 스냅드래곤 835에 블루투스 5와 ‘와이기그’, 그러니까 IEEE802.11ad 같은 무선 기능을 통합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차세대 고속 통신이 가능하면서도 저전력을 실현한 윈도10 노트북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ARM 아키텍처의 확장은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처럼 ARM의 의지가 담겼다기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나 퀄컴 같은 기업의 의중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ARM 기반 윈도10 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퀄컴은 올해 하반기 인텔 ‘제온’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서버 시장 진입을 위해 ‘센트릭 2400(Centriq 2400)’이라는 절전형 48코어 서버칩을 출시할 예정이다.
센트릭 2400은 윈도 서버 운영체제에서도 실행되며,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센터에서 사용될 예정이다. 리눅스와 x86칩이 지배하는 서버 시장에 마이크로소프트와 퀄컴이 입장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퀄컴은 애플과 법정 투쟁을 벌이는 만큼 앞으로 애플로부터 아이폰 칩 대량 주문을 해지당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퀄컴 입장에선 윈도나 서버 등 다른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할 수밖에 없다. ARM 기반 노트북에 자사의 스냅드래곤 835를 넣으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봤을 때 PC와 달리 지분율이 확연히 떨어지는 모바일이나 서버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을 터다.
어쨌든 ARM 버전 윈도10을 탑재한 노트북이나 2in1 단말기가 등장하면 초경량에 장시간 사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델과 HP 등도 ARM 기반 윈도10 노트북에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ARM 생태계 확장과 인텔의 행보
물론 과거 마이크로소프트는 ARM을 기반으로 한 ‘윈도RT(Windows RT)’를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윈32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었던 탓에 판매 종료를 맞아야 했다. 만일 ARM 버전 윈도10 노트북, 그것도 윈32 응용 프로그램을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제품이 등장하게 된다면 ARM이 인텔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상당 부분 변화를 주게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ARM 생태계가 확장되면서 인텔의 움직임도 바뀔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해 인텔은 개발자 행사인 ‘IDF 2016’ 기간 중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ARM과 협력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반도체 칩을 제조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생산 설비, 팹이 필요하다.
생산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도 막대한 연구비용이 들어가는 건 물론이고, 모든 제조사가 반도체 칩을 생산하기는 어려운 만큼 생산 설비를 갖춘 기업이 반도체 칩 생산 하청을 맡는 사업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된다. 이렇게 칩을 생산하는 기업을 파운드리, 생산을 파운드리에 맡겨 팹이 없는 업체를 ‘팹리스'(fabless)라고 한다.
인텔은 자사 생산라인 대부분을 오랫동안 자사 제품 생산에 써왔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파운드리 사업을 강화할 움직임을 보여왔다. ARM과의 제휴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인텔이 지금껏 약세를 면치 못했던 모바일 시장에서 퀄컴이나 애플용 시스템온칩(SoC)을 생산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인텔은 ARM 반도체 칩을 자사 생산라인에서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PC 시장이 줄면서 인텔 역시 ARM 생태계에 주목하는 한편, 삼성전자와 TSMC 등이 경쟁하고 있는 파운드리 사업에도 힘을 더 주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든 건 2013년이다. ARM 생태계가 확대하고, 제조 공정 미세화가 한계까지 높아지며, 다품종 소량 생산 등 다양한 요구가 쏟아지는 만큼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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