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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은 있지만 과학은 없다" – 김우재 인터뷰

김우재 박사는 세상에 참 할 말 많은 과학자입니다. 소셜 서비스에선 일명 ‘초파리 박사’로도 알려져 있죠. 어쩌면 과학자 김우재보다는 ‘싸움꾼 김우재’로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트위터에선 크고 작은 싸움(논쟁)들에 휘말렸었죠.

김우재 박사와는 개인적인 인연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 2008년 촛불 시위가 벌어진 그 광장에서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죠. 그가 오랜만에 모국인 한국에 왔습니다. 이제 곧 다시 머나먼 캐나다로 떠나는 그를 정말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에게 과학과 정치, 과학과 사회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과학자의 역할과 의미에 관해 물었습니다.

  • 일시: 2015년 4월 14일 오후
  • 장소:  혜화동 인근 카페
김우재 혹은 초파리 박사

김우재 혹은 초파리 박사

– 자기소개.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다.

– 유전학자인가?

행동 유전학자다.

– 초파리 연구 재밌나.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 어릴 적 하고 싶었던 연구가 ‘사람의 행동’이었다. 난 게임도 하면 금방 지겨워지는데, 사람마다 안 지겨워지는 게 있지 않나. 나에겐 책과 글쓰기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행동을 지배하는 에센스랄까, 그 에센스를 직접 ‘연구’하는 쾌감은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연구에는 과학을 책으로만 배운 사람은 모르는 그건 게 있다.

그 쾌감은 힘든 과정을 거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거다. (노동착취 문제는 논외로) 매일 야근하면서 프로젝트를 끝낸 셀러리맨의 희열이랄까. 과학은 좀 다른 게 있는데, 내가 발견할 수 있는 걸 다른 과학자는 발견하기 어려우니까. 과학자의 발견은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한 계속되니까. 과학자는 그런 면에서 자신의 몸이 불타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면이 있다.

– 과학적 발견이 후세에 부정되기도 하지 않나.

그렇지.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부정되는 것은 그 발견이 아니라 ‘이론’이다. 뉴턴의 발견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들어가서 프레임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실험 관측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측정량”은 그대로지만, 그 측정량이 모이면, 측정량을 기존의 이론이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이게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쉬프트’다.

하지만 기존의 이론이 폐기된다기보다는 설명 영역이 넓어진다고 봐야 한다. 더 넓은 이론이 좁은 이론을 포괄하고, 일부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기존 이론이 폐기된다고 볼 수는 없다.

– 그렇다면 쿤의 ‘패러다임’ 가설은 과장됐다고 보나?  

과장됐다고 본다. 특히 생물학에는 적용하기 어렵고, 물리학의 특수한 시기에만 맞아떨어지는 가설이다.

– 쿤의 저술이 역할 한 바도 있다고 보는데.

논리 실증주의자(특히 비엔나 학파; 귀납적 방법론을 강조)의 도그마를 깨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쿤의 저술을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지식을 상대주의화하는 데 일조했다.

– 과학의 상대주의화에 일조했다?

과학자라면 쿤을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쿤의 저술을 인문, 사회과학자들이 받아들이길 마치 종교를 개종하는 것 같은 것처럼 인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됐다고 본다.

앨런 소칼

앨런 소칼

특히 앨런 소칼(물리학자)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상대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는데, 나는 그 입장을 대체로 옹호한다. 한 번은 앨런 소칼이 한 저명한 인문학 저널(‘소셜 텍스트’)에 의도적으로 엉터리 논문을 냈다. 그런데 그 인문학 저널은 소칼의 논문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은 소칼의 ‘지적 사기극’으로 소위 ‘과학전쟁’ 논쟁이 불붙는다. 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정치 

– 과학과 정치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데.

정확히는 ‘과학과 사회’다.

– ‘과학과 정치’, ‘과학과 사회’를 구별하는 취지는. 

내가 대장균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치자. 그 대장균이 위험할 것 같다고 치자. 그 순간에 내가 내부 고발자가 되던가. 동료 과학자를 설득해서 기자회견을 하든가.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내 연구의 사회적인 파장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차원에서 ‘과학과 사회’는 ‘과학과 정치’보다는 폭이 넓다.

내가 몬산토 연구원이라고 치자. 과학자가 정치적인 행위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과학자가 자신의 제반환경, 제도와 연구비 등등을 바꾸고 싶을 때는 ‘힘’이 필요하고, 그럴 때는 과학과 정치의 맥락이 중요하다. (참고 – 몬산토, Monsanto Company; 다국적 생화학 제조업체. 유전자 조작 작물 종자의 세계 점유율이 90%에 이른다. – 편집자)

몬산토

– 정치는 힘과 행동에 관여한 개념이다? 

그렇다. 정치는 사회와 비교해보면, 특정한 분야에 한정되지만, 사회는 인지적 반성행위 전부에 관여한다. 정치는 행동에 좀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즉,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는 지적 토양이 있어야 비로소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아직 과학과 정치를 논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해야 하지만 아직 준비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고 본다. 독일의 메르켈 수상처럼 과학자 출신의 대통령이 나오면 모를까. (앙겔라 메르켈은 양자화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편집자)

– 박정희 시대에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견해가 있다.

사실이지. 팩트다. 양적으로 발전한 것은 맞다. 하지만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제도와 조직이 생겼고, 그리고 과학자 그룹이 생겼다. 그런데 그 그룹이 마치 하나회와 같은 모임이었다. 박정희에게 충성하고, 조국을 근대화시켜서 박정희의 이념에 충실한 조직이었다.

–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말하는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첫째, 과학이 정치에 종속됐다.

둘째, 과학과 기술이 한몸을 결합해서 산업경제 패러다임에 갇혔다. 물론 테크노사이언스는 전 세계적인 경향이지만, 한국은 과학이 과학 그 자체로 존재한 적 없다. 산업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과학기술은 존재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 “그거 돈 되나?”식 논리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내가 어디에서 무슨 연구를 한다고 하면, 일반적인 시민은 이런 식으로 질문한다.

“그거 돈 됩니까?”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고 본다. 그 사람들에게 진짜 과학이 뭔지 가르쳐준 적이 없다. 우리에게는 아인슈타인이 없었고, 다윈이 없었다.

– 아인슈타인이나 다윈이 있어야만 하나.

꼭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가 아니라, 과학적인 토양이 마련된 사회에서 그런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취지다.

–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지 않나?

평균적으로는 인정받는다. 하지만 ‘대가’급이 있나? 없다. 감히 이야기하지만, 없다.

– 대가급이란?

죽기 전에 노벨상을 예약한 사람들. 그 분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그 행보에 따라서 그 분야를 함께 움직이게 하는 학자들. 한 백여 명 정도의 리딩 사이언티스트.

–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선결해야 할 문제는 뭐라고 보나. 

한마디로 ‘과학’이 없다. 너무 기술 편향적으로 발전해 있다. 삼성과 엘지의 기술력은 전 세계적으로 우수하다. 하지만 그 기술력은 과학이 없다면 한계가 있다. 장기적으로 그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

– 삼성은 애플을 베껴서 갤럭시로 잘 나가간다. (참고: 삼성의 ‘베끼기’ 관행과 애플 소송 (펄))

언제까지 가겠나. 길게 갈 수 없는 모델이다. 테슬라 전기자동차, 애플이나 구글이 벌이는 사업을 보면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사업이 있다. 테슬라가 화성에 가려고 한다든가(스페이스X). 구글이 전 세계에 와이파이를 연결하려고 한다거나(프로젝트 룬).

출처: http://www.spacex.com/

출처: www.spacex.com/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상을 바꾸는 기술을 선도하는 준비를 하고 있는 곳이 있나? 있으면 알려달라. 과학이 없어서 그렇다. 선도적인 기술이 없다.

– 기술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렵다 보나. 

기술만으로도 먹고살 수는 있다. 인도는 IT에 주력하고, 과학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개발도상국의 발전 논리는 기술만으로 먹고살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줬다. 그걸 증명한 게 박정희다. 과학이 먼저 발전해야 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는 선형적 발전 논리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나라에는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 같은 논리일 수도 있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우리나라도 과학을 포기해도 된다고 나는 말한다.

하지만 만약에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독일처럼 강한 나라가 되고 싶다면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 독일의 아스피린이나 에디슨의 전기, 백신 등등. 하나가 터지면 100년을 먹고 살 수 있다. 터지면 그 나라가 그 분야를 주도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 과학은 사기업에 의존할 수는 없고, 국가 차원으로 준비해야 할 영역 같다.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나 수십 개 나라가 재정을 지원하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를 봐라. 이런 분야의 성과물들은 어쨌든 그 프로젝트와 연구소에 투자한 국가들이 그 과실을 가져간다. 하지만 기약 없는 투자다. 국가가 이런 곳에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투자하기 위해선 멀리 보고 투자할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CERN(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의 중심 연구 단지의 모습 (출처: 위키백과 공용) http://en.wikipedia.org/wiki/CERN#/media/File:CERN-aerial_1.jpg

하늘에서 바라본 CERN(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의 중심 연구 단지의 모습 (출처: 위키백과 공용)

– 우리나라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전범이랄까 롤모델로 평가할 수 있는 과학자가 있다면.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 김 교수는 과학정신이 있다.

– 과학정신?

과학을 통해서 과학만으로 무엇인가를 이뤄보려는 그런 게 있다. 이를테면, “예술혼”이라고나 할까. 그걸 과학에 대입하면 ‘과학정신’이라고 본다.

– 제도적으로 이런 건 좀 고치자는 건 뭐가 있을까. 

우선, 과학자들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서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

– 왜 연대하지 못하나.

과학자는 노예니까. 연구비의 노예니까. 인문학자와 가장 큰 차이점은 연구비 못 따면 월급으로 버틸 수 없다는 점이다. 인문학자는 책을 써도 되고, 강연해도 되지만, 과학자들은 연구비 못 따면 죽는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 월급이 있잖나?

자연과학자는 월급만으로는 절대로 연구를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이론을 강의할 수는 있지만…

– 가정해서 김우재 박사가 대통령이 됐다 치자. 가장 먼저 뭘 바꾸겠나. 

우선 미래부 산하에 있는 과기부를 독립시킨다. 두 번째는 미국에 있는 국립과학자연대와 같은 것을 만들어야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대(과총)이 있지만, 어용이다. 미국은 직접 국회와 협상해서 예산을 따온다. 정부와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는 독립 기구가 필요하다. 과총은 국가에서 돈 받는 ‘어용’이다.

– 좀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과학은 왜 필요한가. 꼭 필요한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사고 실험을 해보자.

  • 예술은 왜 필요한가.
  • 미디어는 왜 필요한가.
  • 슬로우뉴스는 왜 필요한가.
  • 영화는 왜 필요한가.
  • 여가 활동은 필요한가.

하나씩 줄여가다 보면 세상에 필요한 건 먹는 일 빼고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과학이 필요한 순간들을 만난다. 아이들이 자라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당장 백신부터 접종해야 한다. 과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기술이 기여한 부분이 많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과학이 기여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 불만 있다! 

김우재

–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 비판적이다. 

우파 쪽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소위 좌파라고 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애증이 있다.

– 어떤 애증?

첫 번째는, 남들은 진영논리나 인정욕구로 바라보기도 하는데, 과학자를 지식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자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다. 가령, 이택광 교수는 영문학이 전공인데 별별 사회현상을 논평한다. 진중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런 과학자가 있나?

– 최재천 교수 같은 이도 있지 않나.

최재천 교수는 사회생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고, 사회를 그 학문의 바탕에서 설명하는 분이다. 최재천 교수가 그런 지식인이라고 치자. 그런 분이 얼마나 되나. 인문사회 쪽에선 쌔고 쌨다.

– 왜 그렇다고 보나.

과학이 없어서 그렇다. 인문학자나 사회과학자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이 없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런 사회에선 최재천 같은 이가 더 나올 수 없다. 인문학자들의 현상적인 토론만 보면서 살아야 한다.

– 외국은 어떤가.

미국 최고의 지성이 누군가? (- 노엄 촘스키?) 촘스키는 과학적 지식인에 가깝다.

– 외국의 전범적 과학자는 누구를 뽑을 수 있을까.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리차드 르원틴(Richard C. Lewontin)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줄리안 헉슬리(Sir Julian Sorell Huxley, 올더스 헉슬리의 손자)

서구에선 과학자를 저명한 철학자, 사상가, 인문학자들과 동등하게 대등한 전통이 있다. 칸트의 저술은 뉴턴의 발견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마르크스 역시 19세기의 과학기술 발전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 그동안 제이 굴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굴드 제이 굴드(사진)는 자신의 작업 속에서 사회와 연결되는 작업을 찾고, 사회에서 과학자로서의 소신과 신념을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사회에 발언하는데, 모든 과학자의 특징인데, 자신의 전공 분야라는 ‘창’을 통해서 발언한다.

진중권이나 이택광처럼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에서 잘난 척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전공과 사회가 연결되는 지점을 찾고, 거기에 대해 발언했다. 제이 굴드는 생물학자로서 인종이나 우생학, 통계적으로 조작된 IQ 따위로 사람을 차별하려는 행위에 대해 비판했고,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굴드는 좌파였다. 스스로 “중도 좌파”라고 말했다. 세상을 혁명하자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연구하는 생물학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접점을 고민했다.

– ‘진화와 진보는 다르다’는 제이 굴드의 명제에 대해.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스티븐 제이 굴드)

이게 정확한 명제인데, 보통 진화를 박테리아에서 사람이 된 걸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 굴드의 지적이다. 진화를 일종의 나뭇가지처럼 생각하는데, 굴드가 생각하기엔 ‘덤불’처럼 단순한 나뭇가지 그림으로는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복잡한 양태를 지닌다는 거다.

– 나는 그동안 과학기술의 진화는 사회적 진보와는 다르다는 취지로 이해했는데 오해였네. 

창조적 오해다. (웃음)

– 지적한 것처럼 과학자의 사회 참여(사회적 ‘발언’)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천안함 사건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를 사회는 필요로 하고, 세월호 사건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전문가를 사회는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과학자들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 전문가는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 문제는 ‘발언’할 수 있는 전문가는 없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왜 천안함 사건에서 국내 물리학자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물리학자(서재정 박사)가 굳이 발언해야 했을까.

– 왜 그런가. 

국내 연구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서 그랬다고 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인문학하는 사람들은 “나는 감방 가면서까지 발언했는데?”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개인적인 윤리의 문제로 환원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면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부고발자나 착한 사마리안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 인문학자들에게 그런 사회를 원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과학 잡지를 만들고 싶은 꿈 

김우재

– 과학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들었다.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잡지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다.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있다. 그리고 계획이 어느 정도 진행 중이긴 하다.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 중이다.

– 어떤 계획인가. 

과학자연합체, 과학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을 포함해서 과학에 관련한 사업들을 하는 록펠러 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보고 싶다. 미국은 공익재단이 국가가 미처 하지 못하는, 제3섹터라고 하는 영역의 일을 담당한다. 가령 어떤 인종의 권익, 여성의 권익을 보호한다던가… 미국은 그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단체에 세금을 감면하는 방식으로 지원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조직을 만들고 싶다.

– 한국에는 과학 민간단체에 대한 국가 지원이 없나? 

한국에도 장학금을 주는 재단이 있긴 하다. 청계재단도 공익재단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시민운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과학에 관한 공익재단을 하는 건 들어본 적 있나. 하나 생기긴 했다. 인터파크 사장이 200억 원을 출연해서 재단을 만들었다. ‘카오스재단’이다. 이제 막 과학에 관한 재단이 하나 딱 생긴 수준이다.

– 캐나다 교수(국립 오타와 대학교)로 간다면서 어떻게 하려고?

한계가 있다는 건 인정한다.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건 어렵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씨앗을 뿌리는 존재가 되고 싶다. 자극이 되고, 계기가 되고, 우산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캐나다 가면 한국에는 영영 안 오나.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다. 한국에 있는 대학에도 지원했다. 다 떨어졌다.

– 캐나다 국립대학 교수 되기보다 한국 대학 교수 되기가 어렵나.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 교수가 된다는 건 하늘에서 별 따기다. 온갖 인맥, 학맥, 지연 등등이 동원된다. 만약에 채용됐다고 해도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일지는 미지수다. 국내 선배 교수들이 국내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조언을 할 정도다.

교수 수업 강의 선생님

– 아쉬움은 없나.

많다. 내가 애국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모국어는 한국어인데… .내 형제와 부모가 사는 땅이고, 동료 과학자들이 사는 땅인데… 물리적인 한계가 있으니까. 캐나다는 ‘존나’ 머니까. 정말 멀단 말이야. 그래서 아쉽다.

– 나중에 한국에 있는 대학에서 부르면 올 건가.

모르겠다. 여러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데, 가장 먼저, 연구를 계속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가, 와이프와 가족의 동의를 얻을 수 있나…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결정해야겠지.

그런데 나를 부를 일이 있겠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건 대한민국에 엄청난 변화가 있다는 건데, 정권이 바뀌어도 그런 일이 생기겠나. 그런 나라, 그런 사회라면 나와 같은 이단적인 과학자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 김우재는 이단인가?

이단이다. 과학자 사회에서도 이단이고, 지식인 사회에서도 이단이고, 진보 진영에서도 이단이다.

– 왜 이렇게 자주 싸우나.

성향이 원래 그렇다. 다혈질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트위터 잘 안 한다. 페이스북에선 덜 싸우는 것 같다. 미디어의 속성인 것 같기도 하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 

한국 과학과 사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다. 그 과학자들도 영리하게 조직을 만들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적극적으로 발언했으면 좋겠다.

이명현, 이종필, 정재승, 이정모, 김상욱, 이강영… 과학자 그룹이 있다. 구세대 과학자들과 많은 부분에서 선을 긋고, 과학연구를 사랑하지만, 그 연구의 사회적 의미를 고민하고, 사회적 발언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연구자들 사이에는 사회 참여를 고깝게 생각하는 관습이랄까 전통이 있다. 쉽게 말해서 ‘너 왜 그렇게 나대냐. 시간이 남아도냐.’ 그런 관습을 깨뜨리는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계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분들이 용기를 내고 활동할 수 있는 대중의 지지가 있기를 바란다.

– 한국엔 언제 다시 오나.

지금으로선 기약이 없다. 지금처럼 한 달 동안 길게 체류하는 일은 당분간은 없을 것 같다. 5년 안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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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민노씨
슬로우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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