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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테러다: 프랑스 vs. 이슬람 관극틀의 문제점

파리의 테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나는 여기 답할 지적 역량이 없다. 다만, 파리에 살면서 이번 일을 겪으며 슬픔과 두려움을 느꼈고, 이 글은 나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다.

한 가지 실마리를 잡는다면, ‘프랑스적 가치’로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외부적 폭력의 위협이라는 프레임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샤를리 엡도를 향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가 여론에 부각되는 것처럼 펜과 총의 대립인지는 잘 모르겠다.

펜과 총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저널리즘과 테러리즘이 아니라, 각각이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정치적 가치일 수 있다. 특히 그것이 ‘프랑스 vs. 이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형제는 어떻게 테러리스트가 되었나 

테러리스트 형제 중 동생 셰리프 쿠아치(Chérif Kouachi)는 파리 경찰의 감시대상으로 어느 정도 알려졌었다. 그는 알제리계지만 부모를 본 적이 없다. 프랑스에서 자란 프랑스인이고 지하드에 투신하기 전에는 평범한 프랑스인이었다. 피자 배달 등을 하며 평범하게 절망한 청년으로 살다가 십여 년 전인 20대 초반에 또래 친구들의 이슬람 극단주의 모임에 빠져들었다.

파리 19구 이라크 조직 혹은 ‘뷔트쇼몽파’으로 불리는 모임은 80년대 한국의 주사파처럼 입소문을 타고 자생했다. 모두 80년대 생 파리지앵인 구성원들은 파리 뷔트쇼몽 공원에 모여서 체력 단련도 하고 자취방에 모여서 꾸란 공부도 하면서 당시 한창이었던 이라크 전쟁에 자원입대할 계획을 세운다. 셰리프 쿠아치는 시리아행 비행기 표까지 샀지만 실제로 가지는 않았다. 이게 문제가 되어 친구들과 법정에 섰다.

쿠아치 형제와 공범

쿠아치 형제와 공범 아메디 쿨리발리(Amedy Coulibaly)

테러 다음날, 당시 쿠아치의 변호인이 언론 인터뷰를 했다. 쿠아치는 체포되었을 때 이라크에서 죽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변호인이 보기에 그는 확신을 가진 이슬람 전사가 아니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들에 휩쓸려서, 거친 남자애들끼리 몰려 놀려면 끊임없이 허세를 부려야 하니까, 인정받고 싶어서 혹은 비겁자 취급을 받기 싫어서 모임에 나갔을 뿐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셰리프는 감옥에 다녀왔고, 국외의 테러조직과 연락이 되었다. 공범인 그의 형 사이드(Saïd)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파리 시청에서 위생 관련 일을 했고, 2011년경 예멘의 알 카에다 조직에서 몇 달간 훈련을 받았다. 쿠아치 형제가 좌절과 증오에 사로잡힌 젊은 패자들인지, 종교의 탈을 쓴 프로페셔널한 괴물들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는 듯하다. 그들은 둘 다였다. 프랑스인으로 가망 없는 청년기를 보내는 동안 형제는 전자에서 후자로 변모한다.

프랑스 바깥 vs. 프랑스 내부 

테러는 프랑스 바깥에서 온 충격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 내부 문제가 안에서 터진 것으로 봐야 한다. 공화국,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는 공격받았지만, 외부인이 아닌 프랑스인에게 공격받았다.

내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을 보는 한국의 시선이다.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던 테러를 꼭 프랑스 특유의 가치 전통과 그것에 대한 외부적 위협으로 분석해야만 할까? 2004년 마드리드 테러나 2005년 런던 테러 때 스페인적 가치나 영국적 가치 같은 말이 나온 적 있을까?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불관용 사이의 투쟁이라는 문제는 프랑스에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신의 신념에 반대하지만, 당신 신념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삶은 전형적으로 프랑스적인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에서도 이번 테러와 관련해서 프랑스적 가치와 외부적 위협이라는 프레임이 큰 힘을 얻고 있으며, 우파와 극우파는 반사이익을 노릴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언론이 프랑스 대 반프랑스라는 가치 대립의 프레임을 차용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함의에 대해 숙고하지 않은 채 이 프레임을 자의적이고 일관적인 방식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

표현의 자유가 과도하거나 과격하다는 말, 위험을 무릅쓰고 관철되던가 아니면 온건한 수준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말은 거꾸로 표현의 자유가 다른 가치들과 공존하기 어려운 가치로 물신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과연 어찌할 수 없는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 때문일까?

‘파리의 사정’은 찾아볼 수 없는 관념의 잔치    

1월 8일 자 한겨레의 ‘도 넘은 이슬람 비하인가, 보호해야 할 표현의 자유인가’는 샤를리 엡도의 논조가 반이슬람적 보수주의가 아닌 철저한 반권위주의임을 밝힌다. 샤를리 엡도는 “모든 권위주의에 반대했던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 세대의 유물”이며, 모든 종교를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으로 조롱하면서 여러 번 사고를 쳤다.

샤를리 엡도는 프랑스 자체의 이미지와 비슷한 면이 있다. 프랑스는 반권위주의만큼이나 강력한 권위주의의 전통을 가진 나라다. 잡지의 만평은 권위를 잘 모르고 우습게 보는 탈권위주의가 아니라 권위의 강력한 그림자에 의식적으로 대드는 반권위주의에 가깝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정의길 선임기자는 “이슬람권 가치”라고 부른다. 그것은 화해할 수 없는 가치들 사이의 “탈출구가 없는” 대립이 되며, 새뮤얼 헌팅턴의 이름을 빌려 ‘문명의 충돌’이 된다. 맞는 말일 수 있지만, 평생 파리에 살던 사람들이 파리의 언론인들을 죽인 사건인데 파리의 사정은 찾을 수 없다.

톨레랑스에 대한 위협이 테러의 본질?  

한편 한겨레는 ‘프랑스적 가치’로서 톨레랑스를 언급한다. 많은 언론이 샤를리 엡도의 호전적인 논조에 우려를 표하는 동시에, 톨레랑스의 원칙을 들어 그것이 프랑스에서는 존중되어야 할 일이라고 거리를 두었다. 테러는 두 가지 방향에서 톨레랑스에 대한 위협이다.

  • A –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를 무슬림과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의 근거로 삼는 극우파는 프랑스적 가치인 톨레랑스를 위협한다.
  • B – 한편 언론의 풍자에 죽음으로 복수하는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은 풍자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톨레랑스를 위협한다.

조일준 기자의 ‘프랑스판 9·11’ 충격파… 기로에 선 톨레랑스는 이번 테러가 톨레랑스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진단하면서, 전자의 톨레랑스(A)에서 후자의 톨레랑스(B)로 은연중에 넘어간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같은 가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번 테러에 대해 톨레랑스 개념을 끌어들인다면, 내 생각에는 이 개념이 오래전에 낡았고 다시 한계가 노출되었다는 이상의 이야기를 하긴 어려울 것 같다.

톨레랑스는 이삼백 년 전에 종교 탄압을 제한하자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책에서는 많이 봤지만, 프랑스에 살면서는 들어본 적 없는 말이기도 하다. 톨레랑스라는 가치가 반-톨레랑스적 세력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말 역시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테러의 본질인지는 모르겠다.

‘라이시테’(정교분리 원칙) 문제  

프랑스의 이민자 및 이슬람 문제에 끊임없이 인용되는 정교분리 원칙도 그렇다. 번역하지 않고 프랑스어로 ‘라이시테’(laïcité)라고 적을 만큼 이 원칙은 프랑스 특유의 가치로 간주된다. 프랑스에서 공화주의 확립을 위해 라이시테의 원칙은 아주 중요했는데,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수구 왕당파 세력의 보루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투쟁은 1905년의 정교분리법을 통해 어느 정도 결실을 맺는다.

이때 프랑스적 가치로 확립된 라이시테와 100년 뒤 학교에서 히잡을 쓰지 말고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할랄 햄버거를 팔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라이시테 사이에는 큰 공통점이 없다. 후자가 전자를 구실로 들어 배제를 정당화할 뿐이다. 정교분리를 프랑스 공화주의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으로 보면서 정교분리와 이슬람이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겉으로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을 말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현실에서 떨어져 있다.

적어도 프랑스의 이슬람 사회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과 연을 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 주류의 일부가 강조하는 라이시테가 아니다. 프랑스의 이슬람 사회 내에서 극단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가치 체계를 수면 위에 내놓고 열린 토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표현의 자유, 권위에 대한 도전, 톨레랑스, 라이시테 같은 가치들, 함께 모여 자유와 개성의 나라 프랑스의 이미지 같은 것을 이루고 있는 가치들이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를 통해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희생자들이 희생된 것은 그들이 저 가치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 무고한 생명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테러는 테러다: ‘프랑스적 가치’라는 신화  

1월 9일 자 경향신문 1면은 “과격한 표현 자유”와 “호전적 근본주의”를 두 개의 극단적 대립항으로 놓았다. 같은 날 이택광 교수의 경향신문 칼럼은 샤를리 엡도의 만화가들과 한국의 극우를 유추의 같은 항에 놓았다. 이들의 글에 따르면 총격 사건은 비판을 겪지 않은 전통적 가치들이 정면으로 충돌해서 생긴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이 사건은 테러다. 굳이 슬픔에 빠진 프랑스인들보다 먼저 이론적 성찰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치들의 방정식을 짜는 것보다 이 ‘프랑스적’인 가치들이 어떻게 하나의 신화를 이루고 있는지 보아야 할 것이다.

테러에 맞선 추모와 연대의 목적은 한겨레 조일준 기자의 기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로에 선 톨레랑스”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를 국가적 특수성의 위기로 가공하는 것은 무고한 희생과 절박한 애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사회적 위기를 겪는 이들에 대한 연대의 태도도 아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작)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작)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의 테러  

쿠아치 형제가 프랑스에서 자라났다는 것은, 그들의 좌절과 분노가 프랑스에서 배양되었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내에 이미 그들을 극단주의의 광기로 이끌 수 있는 시스템이 안착했다는 것, 나아가 그들의 무서운 성장을 프랑스 사회 주류의 담론과 치안 당국이 방치했다는 것을 뜻한다.

샤를리 엡도에 대한 테러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용서할 수 없는 도발이지만, ‘문명의 충돌’인 만큼이나 프랑스 사회 내의 정치경제적 갈등의 폭발이다. 차라리 이렇게 묻는 게 낫다.

9·11 때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조종사들이 미국으로 비행기를 몰았다. 샤를리 테러에서는 이라크로 가려다 잘 안 된 프랑스인들이 프랑스에서 테러했다. 14년 동안 서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스적 가치’라는 스테레오타입 

파리의 테러와 관련해서 연대를 표하고 교훈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개념들의 이해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분석이다. 프랑스인이 가치를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프랑스를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프랑스라는 기호, 프랑스에서 연상되는 의미망과 이미지가 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세련된 개념과 문제적인 가치들이 있고, 이를 통해 프랑스는 서구의 다른 나라들과 차별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글에서 인용한 기사들은 프랑스에 대한 한국인의 스테레오타입에 사건을 끼워 맞추고 있다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라는 스테레오타입을 제시하는 순간, 스테레오타입에 맞지 않는 사람, 프랑스 사람이 아닐 것 같은 프랑스 사람들, 다수인 소수자들은 배제된다.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극단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은 현재 프랑스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이 프레임에 머무는 한 우리의 이해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될 것이다. 그 프레임은 프랑스 사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국민 정체성과 이슬람의 문화적 정체성 사이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계급적 정체성 문제가 매몰되는 한, 프랑스가 테러의 악몽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를 좀 더 유물론적으로 봐야 한다.

본문 인용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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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주원
초대필자. 연구자

프랑스 유학생. 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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