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호메트를 풍자했던 프랑스 신문사에 무장 괴한들이 총격을 가해 십여 명 사망”
대다수 언론은 샤를리 테러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1. 샤를리 엡도
‘풍자’라는 단어 때문인지, 마치 샤를리 엡도가 무함마드나 이슬람을 놀림거리로 삼았다고들 생각하는 모양이다.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인가, 다른 종교나 문화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도 표현의 자유인가 등을 두고 토론이 벌어지니 말이다.
샤를리의 진짜 조롱 대상은 억압적 편견
그러나 샤를리는 무분별하게 차별이나 비하를 하는 그런 언론이 아니었다. 내 견해를 밝히자면, 그 신문사의 만평들은 “세계 최강의 병맛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나 영화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2006)와 같은 블랙유머였을 뿐, 일부 사람들이 상상하듯 이슬람에 대한 멸시를 담은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샤를리를 구독해왔고 그 신문사의 포지션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법한 견해라는 점도 밝힌다.
샤를리가 터번을 쓰고 턱수염을 기른 남자를 그림으로써 궁극적으로 조롱했던 대상은 이슬람이 아니라, 그 이미지만 보고도 자동적으로 이슬람을 떠올렸던 사람들이었다. 샤를리는 터번과 턱수염의 남자를 그려놓고 “난 유태인이라고!”라고 써놓기도 했다.
터번 안 쓰고 턱수염 안 기르는 무슬림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 보고도 자동적으로 이슬람을 떠올리는,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차별주의자가 아닐까?
[사우스파크]나 [보랏]도 샤를리와 비슷한 유머 기법을 사용한다. 그 두 작품을 두고도 차별적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그 두 작품이 진짜로 ‘풍자’하는 대상은 바로 그 사람들 자체다.
그림이 잘못? 진짜 잘못은 테러범이 저질렀다
한편 이슬람 전통에 따르자면 선지자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 자체가 잘못이기는 하다. 샤를리가 선지자(라고 생각되는 남자)를 만평 소재로 사용한 이후에, 프랑스의 이맘들은 “선지자를 그리는 것은 이슬람 전통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논평을 낸 적이 있다. 선지자나 종교상의 위대한 인물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 몹시 불경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역사를 통틀어 선지자의 초상을 그린 전례가 없다. 적어도 이슬람에서 지배적 다수를 점하는 수니파에선 그렇다. 선지자조차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선지자마저 우상이 될까봐 경계하는 것, 이것은 예수를 신격화하는 기독교에 견주어 이슬람만이 진정한 유일신교라고 생각하는 무슬림 정체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아마 테러범들 또한 만화 내용 자체보다도 ‘샤를리가 이슬람 선지자를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 그렸다’는 사실에 더 자극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샤를리가 그동안 우익 정치인이나 대기업을 조롱해온 것에 비해 이슬람을 소재로 한 만화가 그토록 질 나쁜 것이었는지는 내가 판단하지 않겠다. 선지자를 그린 것만으로도 잘못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전통의 진짜 목적, 즉 우상숭배를 피하기 위한 목적을 위반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애초에 무슬림을 대상으로 나온 출판물이 아니지 않은가. 신앙이 깊은 무슬림이라면 이런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도록 두었을 것이다.
진짜 잘못은 테러범들이 저질렀다. 테러범들은 신문사에 난입해 비무장한 민간인에게 총기를 난사했다.
2. 하디스
하디스(حديث نبوي, 마호메트의 언행록)에 따르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가장 큰 죄는 다음 네 가지다:
-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예배 대상에 끼워 넣는 것
- 살인
- 누군가의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것
- 거짓으로 증언하는 것
용서할 수 없는 네 가지 죄
살인을 포함하는 이 네 가지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 중 가장 큰 죄다.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도 이런 죄를 저지른 사람은 돌보지 않으신다.
하디스는 살인의 개념을 꽤 넓게 본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뿐 아니라, 살인하려는 마음만 먹어도 살인으로 치는 것이다. 예컨대 남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저 녀석을 내가 죽이고 말겠어’하며 맹세를 하는 것도 살인으로 친다. 또한, 두 사람이 서로 죽이려고 칼부림을 하다가 한 사람이 죽으면, 살인자 뿐 아니라 살해당한 사람도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친다. 모두 이미 상대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실한 무슬림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려고 해도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길 뿐, 방어적으로라도 상대방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남을 죽이려는 마음만 품어도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로 극단적인 비폭력의 삶을 산다.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이상화하는 티베트 승려 이상이다. 이것이 보통의 무슬림들이 스스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다.
순교 vs. 테러: 샤를리 테러는 약자로서의 저항이 아니다
과거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전사들이 대(對) 이스라엘 항쟁에서 폭탄 자살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전술적인 이유가 아니다. 폭탄 자살은 억압에 저항하는 수단이기에 앞서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는 일이다.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절멸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상대편 군인이 민간인 마을에 폭격을 퍼붓는 상황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총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 자신의 몸에 화약을 장착하고 폭사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순교다.
그러나 파리의 테러범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에게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총칼 든 군인이 아니었다. 그 사망자들이 중장비로 무장한 이스라엘 군대처럼 젊은 테러범들을 위협했는가? 테러범들은 자신들이 강한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진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모습을 그리면 안 된다”는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해서, 그저 민간인을 죽였을 뿐이다. 그런 후 현장에서 재빨리 도망쳤다.
그들이 살해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랍계 알제리인(샤를리 신문의 편집자)도 있었다. 심지어 샤를리 신문사와 관계없는 무슬림도 있었다. 이 테러를 프랑스(또는 유럽)적 가치에 대한 이슬람의 저항 때문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이 사건은 강자 또는 억압자인 서구인에 맞서는 피해자, 약자인 무슬림의 저항이 아니다. 두 문화 또는 두 문명 간의 충돌도 아니다. 그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난 것일 따름이다.
이 사건은 이슬람의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인 가치들을 테러범들과 같은 극단주의 세대가 더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방리유에 방치된 채로 자라온 이민자 2, 3세대의 정체성은 프랑스적 가치가 아닌 것은 물론이요, 이슬람적 가치도 아니다. 이슬람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솔선하는 것에 실패했다.
3. 하디스의 일화
나는 그 테러범들은 진짜로는 무슬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실패한 도착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극단주의는 이미 이슬람이 아니다. 예컨대 기독교로 치자면 다미선교회, 불교로 치자면 옴진리교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결코 이슬람 움마(공동체)를 대표하지 못하며, 아예 그 자리에 끼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 테러범들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그들은 프랑스의 세속법에 따라 고작 몇십 년의 징역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바로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그렇게 판결했기 때문이다.
유태인 유부녀와 바람이 난 유목민 청년
하디스를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온다. 옛날에 어느 유목민 부족의 청년이 살았다. 그는 유태인 상인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는데, 어쩌다가 자기 주인의 아내와 눈이 맞아버렸다.
눈이 뒤집힌 상인은 그 청년을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청년의 아버지는 부족의 거의 전 재산인 양떼를 내어주고 자신의 첩까지 주었지만, 그 상인은 그걸로도 부족하다며 청년을 죽이겠다고 했다. 이에 청년의 아버지가 선지자를 찾아가 하나님의 법으로 판결해주기를 청했다고 한다.
선지자는 유목민 부족과 유태인 상인 가문을 불러모았다. 그의 판결은 “간통을 저지른 남녀를 각자의 율법대로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유목민 청년은 부족의 규칙대로 1년간 채찍질을 당하는 벌을, 상인의 아내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는 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청년은 자신의 연인인 그 여자의 몸 위에 웅크려 함께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꾸란과 하디스를 통틀어 유일하게 나오는 투석형의 기록이다. 투석형은 원래 이슬람 율법에 없다.)
선지자의 선택: 각자의 전통과 법에 따라
선지자는 두 집단 간에 갈등이 생기자 각자의 전통과 법에 맡겼다. 그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각자의 전통과 법에 맡기는 것이 서로를 가장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선지자의 판결에 따라서, 우리도 이렇게 하면 좋을 것이다.
주간 샤를리는 프랑스의 세속법에 따라 이슬람에 비하적인 표현을 했는지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미 재판 중이다,) 그리고 테러범들은 (그들이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주장한다면) 이슬람 율법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는 상황에서 이슬람 율법은 몹시 간단하다. “자유에는 자유, 노예에는 노예, 여자에는 여자”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말이다. 이 원칙에는 예외가 없다.
예컨대 항공사 부사장이 사무장을 폭행했다면, 사무장도 부사장에게 똑같이 폭행한다. 백화점 고객이 주차요원을 욕하고 무릎 꿇렸다면, 주차요원도 똑같이 백화점 고객에게 욕하고 무릎 꿇린다. 건물주가 임차인의 가게를 부당하게 부수었다면, 임차인은 건물주의 집을 때려 부순다. 검사가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다면, 그 검사가 간첩죄의 처벌을 받는다. 청와대가 멀쩡한 해경 조직을 해체했다면, 해경은 똑같이 청와대를 해체한다. 테러범들이 총기를 난사해 사람을 죽였다면, 사망자의 가까운 친족이 똑같이 테러범에게 총기를 난사해 죽인다.
물론 이런 판결에 앞서 이슬람의 선지자는 용서와 화해를 권장하지만, 살인자는 예외다. 살인은 가장 큰 죄이기 때문에, 살인자는 피해자가 용서한다 해도 인류사회로부터 영구히 추방되며,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지옥불에 던져지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 율법이다.
4. 이슬람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자세
나는 이런 사건을 두고도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물이 난다.
“살인은 용서받지 못할 가장 큰 죄”라고 하는 것은 서구의 세속화된 가짜 윤리가 아니다. 바로 이슬람의 하나님이 이슬람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직접 그렇게 말한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살인을 저지른 그 테러범들을 이해하자는 태도야말로 가장 이슬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진정으로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테러범들에게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자, 약자라는 이름의 방패를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린 문화와 관용을 옹호한다’는 윤리적 지위를 가지려고 이슬람을 영원한 타자성의 감옥에 두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테러리즘을 계속해서 이슬람에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이슬람 혐오라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이다. 테러범들은 그저 광적인 범죄자일 뿐, 종교적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테러리즘은 이슬람이 아니다. 바로 샤를리 테러 사건은 그 둘 사이에 헤엄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진정 이슬람을 존중하는 자세는 이슬람의 이름을 빙자한 끔찍한 범죄를 면죄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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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대해 상당 부분 동의하나 일부는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이 테러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네오나치, 극우정당, PEGIDA 운동이 탄력을 받고 있고, 어제 독일극우정당 AfD 대변인은 “본인은 무슬림들이 유럽에서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 진작에 알고 경고해왔다”며 ‘유럽에서 무슬림을 쫒아내자’는 PEGIDA 운동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 “진정 이슬람을 존중하는 자세는 이슬람의 이름을 빙자한 끔찍한 범죄를 면죄하지 않는 것이다.”에는 극히 공감한다. 테러는 테러일 뿐이다.
무하메드가 처음 이슬람을 창시할 때 유대인 마을 몇을 전멸시키고 학살했습니다. 평화를 강조한 부분도 있는 것이지 평화의 종교라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죠.
쿠란에 유대인 죽이라는 말 안나옴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