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특별칼럼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윤석열 정부의 공영방송 탄압과 언론장악 실태를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특별칼럼’을 마련했습니다. 다섯 번째로 문현숙 민언련 정책자문위원·전 한겨레 기자의 글을 싣습니다. 해당 칼럼은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이동관이 온다, 한국형 파시즘이 부활한다 (신태섭)
- 미디어의 시장화: 윤 정부의 반지성적 반달리즘 (정연우)
- 다가올 파국적 전제주의 사회, 누가 악몽을 막을 것인가 (채영길)
- 소 잃었어도 외양간은 고치자: 정치적 후견주의 극복해야 (김서중)
- 언론장악 시즌2, 공영방송을 지키기 위한 세 가지 조건 (문현숙)
공영방송이 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이명박 정부 때 홍보수석으로 방송장악을 지휘했던 이동관 특보가 이번엔 방송정책을 총괄하는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의 부적격 청문보고서와 시민사회의 반대 여론도 무시한 채 임명을 강행한 것이다.
이동관은 8월 28일 방송통신위원장 취임사에서 “공영방송은 각종 특혜를 당연시하면서도 ‘노영방송’이라는 이중성으로 정치적 편향성과 가짜뉴스 확산은 물론 국론을 분열시켜 왔다”고 왜곡된 언론관을 드러내며 “서비스·재원·인력 구조 등 개편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언론 자유와 독립성을 훼손하는 발언으로 노골적인 공영방송 탄압을 예고했다. 이날 방송통신위원회 회의엔 5명의 합의제 기구라는 취지가 무색하게 대통령 추천 2명만으로 공영방송 보궐이사 임명안을 의결했다. 임기 첫날부터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무소불위의 깃발을 올린 격이다.
앞서 방송통신위원회에선 김효재 위원장 대행이 한국방송공사(KBS) 남영진 이사장과 문화방송(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권태선 이사장을 잇달아 해임한 상태다. 이어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해촉하고, 속전속결로 빈자리에 언론에 문외한이거나 친정권 인사로 갈아치우고 있다. 이런 무리한 작업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방송을 장악해야 정부·여당에 유리하다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아니 방송 길들이기를 넘어 공영방송을 갈가리 해체한 뒤 일부는 민영화하여 미디어 생태계를 짓밟아 복원조차 어렵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윤석열(대통령), 언론을 국정홍보 도구로만 생각하나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국민의힘 연찬회에 참석해 “언론도 그저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합니다”라고 발언했다. 평소 언론에 대한 몰이해가 전적으로 드러난 말이다. 언론을 정치 선전과 홍보 조작의 도구로 활용하고 싶은데 지적질이나 한다는 적개심이 짙게 묻어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난을 당했던 공영방송들은 이번엔 또 어떤 일이 닥칠까. 지난 경험을 살펴볼 때 정권 코드에 맞는 이사진이 짜이면 낙하산 사장이 임명될 것이고 경영진 교체와 조직의 전반적 구조조정은 속도가 가팔라질 것이다. 권력에 목소리를 높였던 구성원, 특히 노조 간부 중심으로 부당해고나 중징계라는 본보기가 이뤄질 수 있다. 이명박 정부 때 MBC [PD수첩]과 YTN [돌발영상]이 불방된 것처럼 정권의 심기를 건드린 특정 프로그램은 폐지되고 빈자리에 ‘윤비어천가’식 콘텐츠가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방송 진행자나 패널들까지 물갈이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럼에도 ‘공영방송’인 이유
다양한 플랫폼이 쏟아지는 디지털 시대에 올드미디어로 간주되는 공영방송이 꼭 존립해야 하는지 회의적 시각이 있다. 특히 집에서 TV 잘 안 보는데 왜 수신료를 내야 하느냐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그러나 오너가 따로 있는 종합편성채널 등 사영언론과 달리 수신료를 핵심 재원으로 하는 공영방송은 국가나 자본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이들을 감시할 공적 책무가 있다. 공영방송이 굳건하게 버텨줘야 민주주의 사회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생태계를 역행하는 윤석열 정권은 수신료라는 돈줄을 틀어쥐고 언론탄압 기술자를 데려와 방송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다. 윤 정권은 공영방송이 비판에 나서면 편파보도와 ‘가짜뉴스’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고 있지만, 국내외 여론조사에서는 여전히 공영방송 보도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지난 1월 KBS 공영미디어연구소가 공개한 2022년 4분기 KBS 미디어 신뢰도 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방송사 뉴스(인구특성별 분석 1순위)는 MBC(28.1%), KBS(22.9%) 순이다. 또 지난 6월 영국 옥스퍼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23’을 보면, 국내 주요 언론사 신뢰도 조사에서 MBC(58%), KBS·YTN(55%) 순으로 나타났다. 가장 신뢰하지 않는 매체는 조선일보(40%), TV조선(39%), 동아일보(34%)-채널A·중앙일보(32%) 순으로 종편과 그 계열사들이었다.
공영방송의 저력, 고품질 콘텐츠에서도 보인다
뉴스 외 다른 콘텐츠는 현재 공공재적 가치를 유지하고 있을까. 예능 프로그램도 매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유익한 가치 추구보다는 시청률만 의식하는 경향이 높다. 그래도 지난 3월 KBS [히든 어스, 한반도 30억년]이란 자연사 다큐 5부작은 공익성을 살린 고품질 작품이었다. 국내뿐 아니라 호주, 미국 등 2년에 걸쳐 100여 곳을 돌며 1편당 3억을 투입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한반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블록버스터급 초고화질(8K)로 자연풍광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수직절리가 잘 발달한 설악산의 장군봉, 세 개의 지층으로 이뤄진 성산 일출봉,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발자국이 남았다는 무등산 서석대, 그리고 인수봉 백운대 등 북한산 화강암의 비밀도 살핀다. 등반가가 손끝 발끝으로 절벽을 타는 모습에선 마치 시청자가 한 몸으로 아찔함을 느끼는 순간을 접하게 된다. 지질박물관 깊숙한 곳에 들어가 바위를 통해 생명과 기후변화 역사를 오가고, 문화의 다양성을 두루 체험했다고 할까. 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BBC 자연다큐 못지않은 우리 공영방송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판스타로 자리 잡은 시사다큐 프로그램 외에도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특별하게 그리거나 사회적 약자 등 우리 이웃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웃음 속에 역사적 의미를 짚어가는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공공재적 가치를 실현한다고 하겠다.
문제는 방송이 장악되면 이런 공영방송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냐는 점이다. 공적 방송의 가치에 따른 불편부당 보도와 정보 대신 ‘땡윤뉴스’만 난무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는 콘텐츠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총선을 대비한 여러 프로그램이 정권 홍보물로 전락할 수 있다. 제작·편성 자율권이 침탈당할 땐 고품질의 작품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시청률을 겨냥한 먹방이나 트로트 경연 열풍이 확대되면 여론 다양성은 사라질 수 있다. 이는 마치 전두환 정권 때 국민에게 정치 무관심을 유도한 3S정책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공영방송을 지키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첫째 정치적 영향력이 심각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시급하다.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을 조속하게 통과시켜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이 수난을 겪는 근본적 이유는 정치적 후견주의가 작동하는 지배구조 때문이다. 현재 공영방송 이사는 정당 추천제로 여야 7대 4(KBS), 6대 3(MBC) 등으로 구성된다. 정치권에선 언론 자유와 방송 공정성에 대한 철학을 지닌 인사가 아니라 철저하게 정당 이해를 대변해 줄 사람부터 천거한다. 대통령실에서 명단을 내려보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이사회가 구성되면 방송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위한 논리는 사라지고 정치권 우위의 숫자로 표결이 좌우된다. 결국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 역할은 뒷전이고 정파 확대 재생산,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영방송이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민의 방송이 되기 위해선 시민 목소리가 적극 반영된 지배구조가 되어야 한다. 국회 본회의에 회부된 방송법 개정안은 정치권 추천 비율을 줄이고 추천 주체를 다원화한 안이다.
둘째, 재원 안정을 위한 수신료 제도개혁을 사회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준조세인 수신료에 대해 징수 방법이나 배분을 넘어 조세화 등 재원 모델을 디지털 시대에 맞춰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공영방송의 가치와 공적 역할은 수신료에서 비롯된다고 이미 1999년에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수신료 징수가 재산권·평등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적시한 것이다. 이렇게 법으로 보장된 수신료 징수를 시행령 개정만으로 무력화한 것은 방송 장악을 위한 밀어붙이기식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
공영방송 재원은 수신료를 기반으로 광고, 광고 외 방송사업, 국가지원금 등이 있다. 현재 한국의 수신료는 한 달 2천 5백 원이다. 공영방송 전체 재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몇 년 전 인상 논의가 있었지만 국회 벽을 넘지 못했다. 여기에 분리 징수 압박이 더해져 재정 안정은 더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 수신료는 연간 159파운드로 현재 환율로 월 2만 2천 원 선이며 일본 NHK는 연간 1만 3650엔으로 월 1만 원 선이다. 우리보다 각각 8.8배, 4배에 달한다. 영국은 한동안 매년 올렸던 수신료를 동결하고 자금 조달 방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에선 달라진 미디어 환경을 반영해 TV 수상기 보유와 상관없이 공공서비스세 등을 도입했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권 개입을 차단하고 재원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세화한 것이다. 사회 문화적 토양은 다르지만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우리도 장기적 안목에서 준비해야 한다.
셋째, 공영방송 내부에서 언론개혁을 위한 자구노력이 절실할 때이다. 이들은 공영방송 존립 근거와 사회적 통합을 위한 공공재로서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당당히 맞서는 자세는 저널리즘의 본질적 속성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방송 장악에 저항해서 열심히 앞장서도 정작 공영미디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동력은 사그라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