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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언련 특별칼럼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윤석열 정부의 공영방송 탄압과 언론장악 실태를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특별칼럼’을 마련했습니다. 세 번째로 채영길 공동대표·한국외대 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해당 칼럼은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1. 이동관이 온다, 한국형 파시즘이 부활한다 (신태섭)
  2. 미디어의 시장화: 윤 정부의 반지성적 반달리즘 (정연우)
  3. 다가올 파국적 전제주의 사회, 누가 악몽을 막을 것인가 (채영길)

급기야 윤석열 정권이 ‘파시즘의 수령’에 빠지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8월 15일 경향신문 칼럼 [여적/‘파시스트 되는 법’]은 윤석열 정권이 비판 언론과 시민사회, 노조를 적으로 규정해 혐오를 조장하는 등 곳곳에서 파시즘적 징후가 감지된다고 지적했다. 그런 우려에 동감하면서도 사실은 더 비관적이다. 파시즘의 수렁이 전제주의 국가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단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 사회나 전제주의 국가나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전제주의 국가는 이념이나 가치보다 권력자들의 이익 국가라는 차원에서 더 파렴치하다.

▲ 8월 15일자 경향신문 칼럼 갈무리 ©경향신문

윤석열 정권, ‘파시즘의 수렁’에 빠지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파시스트 사회는 바로 전제주의 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사전작업 단계로써 체계적으로 기존 민주주의 체제를 초토화하는 폭력적 정치 과정일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나치 독일 시대 초기 단계에서 진보단체와 출판사 및 노조에 가해졌던 극렬한 파시스트적 폭력이 다름 아닌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제3제국(Third Reich) 건설의 전초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윤석열 정권이 벌이고 있는 이 난장판이 결국 전쟁으로 치달은 나치 제3제국과 같은 악몽의 전조라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지나친 억측이라고 쉽게 부정하지 않는 이 시기는 진정 현대 한국사의 파국적 위기다.

전제주의 국가에서는 폭력 그 자체가 국가의 운영 원리이므로 반헌법적 상황이 예외적이지 않다. 파시스트 사회는 기존 민주적 정체의 요소를 압살하기 위한 반헌법적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사회를 폭력에 점차 무감각하게 만든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권에 비판적인 노동과 시민사회를 “공산전체주의”,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면서 MB정권 괴벨스라 불리던 이동관 대통령실 특보를 언론미디어 정책 수장 자리에 앉히려 하고, 공영방송을 일거에 날려 버릴 언론장악 부역자들을 다시 무덤에서 불러내 공영방송 이사와 대표로 임명하고자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팬덤 정치’의 아이콘이었던 히틀러와 그 선전, 선동 조력자들.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그 악명 높은 괴벨스.

이는 곧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없애는 대신 이를 자신들만의 자유로 독점하여 진정한 자유를 무력화시킨다. 윤석열 정권과 그 부역자들의 반헌법적 전횡과 부정부패, 무능함을 절대 다수인 언론과 방송으로 하여금 은폐 또는 왜곡시켜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사회가 무지하거나 무감각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일련의 언론장악을 위한 폭력적 조치가 성공한다면 내년 4월 총선은 전제주의 국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동관 방송통신위원회 후보자가 “선전·선동에 능수능란하게 했던 공산당의 신문과 방송을 언론이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밝혔을 때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위태하다는 불안감에 휩싸이지만, 이들에게는 전제주의적 국가를 위한 당연한 사전 작업일 뿐이다.

법을 초월해 스스로 법이 되려는 정권


전제주의 국가에서는 굳이 헌법을 전제적으로 바꿀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헌정질서가 정치 체제의 근간이 아니라 권력자 스스로가 헌정질서이자 그 질서 위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정권과 그 하수인들이 벌이고 있는 무지막지한 언론탄압, 공영방송 소멸작전 과정이 그러한 것처럼. 굳이 방송법을 바꾸지 않아도 방송장악이 되듯 대통령의 시행 명령 하나만으로도 KBS 수신료 제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듯 말이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전제정치에서 법은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시민들에 대한 ‘단속 규정’으로만 적용된다고 했다. 방송법을 포함한 모든 법이 앞으로 그리될 것이다. 권력자의 의도와 의지를 거스르는 방송과 언론을 없애고 단속하기 위해 즉,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안중에 없는 방송과 언론 관련법을 적용할 것이다.

몽테스키외 (Charles Montesquieu, 1689~ 1755, 향년 66세)

그 결과는? 몽테스키외는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정치적 사건들을 광범위하게 분석하고 역사적으로 모든 전제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시민들의 삶은 궁핍”해지고 “공금 횡령과 사적 재산의 자의적인 몰수”가 횡행해지며 시민 개인의 생명은 상시로 위협받는다는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권력자, 그리고 권력 부역자들의 부와 권력에 반비례하여 시민들의 삶은 궁색해지고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미 그러하다. 시민들의 경제 상황은 내리막길이고, 10.29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해병대 채상병 참사 등 사회적 결핍과 재난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로 우리의 생명이 위태함에도 다수 보수언론과 방송은 이를 모른채하거나 오히려 옹호하고 있다.

최악의 악몽은 윤석열 대통령이 아무런 국민적 동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미-일을 대리한 신냉전의 전선에서 우리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는 와중에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우리는 이 사실도 모른 채 어느 날 일본과 미국의 군함 앞에서 총칼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 역시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독점하기 위해 공영방송 체제를 무력화하고 언론장악이 완성되는 시기가 도래한다면 지나친 억측이 아니라 당연히 우려해야 하는 현실이 될 수 있다. 나치의 제3제국이 일으킨 끔찍한 2차 세계대전은 국민의 의지가 아니라 히틀러와 부역자들의 의욕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로 인해 완성되는 전제주의


전제주의 국가에서 벌어질 이 악몽들을 막을 방법은 없다. 만약 시민이 지식인과 전문가, 정치인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의지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모든 가난과 결핍과 파국적 전쟁의 배후에는 예외 없이 무력하고 타락한, 그렇지만 의욕과 의지가 남아 있는 지식인과 전문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있었다. 전제주의는 탐욕 덩어리 권력자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 사회에 포진하고 있는 권력과 이익을 탐하려는 부역자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 2015년 12월 15일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서울 서초구 한 웨딩홀에서 열린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웃고 있다. 왼쪽은 이명박 전 대통령. ⓒ오마이뉴스

지금 자행되고 있는 방송과 언론장악은 바로 이들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흠모해 마지않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제주도 양민을 공산당 ‘폭도’로 지목하고 제압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제주도 주둔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이를 “정부의 최고지령”으로 받들고,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 지역을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해 수많은 제주 양민을 학살했다. 송요찬 같은 천인공노할 부역자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늘 존재한다. 방송과 언론을 장악하여 공영방송이라는 공유지를 초토화시키려는 이동관 특보 같은 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한 사실도 이러하다. 국가를 파국으로 이끌고 잔인하게 시민을 학살한 것은 권력자 한 사람에 의한 것도 아니고, 사회 이데올로기도 아니며 특정 집단과 단체도 아닌 그러한 일에 동조한 개별적 개인들이 있었기에 결국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각종 청문회나 공개 증언을 하는 자리에서 거짓말과 억지 논리 또는 변명을 하는 부역자들이 바로 아이히만들이다. 우리가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을 역사적 범죄자로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고 어찌 보면 명료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전제주의화를 막지는 못한다. 만약 우리 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의 유혹과 악행에 침묵하고 방조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막을 책임과 판단을 보류한다면 말이다.

악몽을 막을 수 있는 ‘의로운 사람들’이 희망


제주 4·3평화기념관 2층 상설전시관에 올라가 보면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의로운 사람들(righteous people)”이라고 하는 분들을 기리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4.3 학살을 막고 평화적 해결을 추진하고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강경 진압을 반대하다 해임당한 김익렬 연대장을 비롯해 일개 경찰서 순경이었으나 감금된 주민들을 보호했던 강계봉 순경, 극우테러리스트 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이면서도 주민들의 희생을 막고자 했던 고희준, 토벌대로부터 주민들의 성향을 취조당하면서도 한결같이 ‘몰라’라고 해 ‘몰라구장’으로 불렸던 김성홍 등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권력에 부역하는 대신 이웃 주민과 공동체를 도운 분들을 만날 수 있다.

▲ 제주4·3평화기념관 ‘의로운 사람들’에 전시된 김익렬 연대장과 강계봉 순경 자료사진 ©채영길

이 의로운 사람들, 즉, ‘우리’ ‘개인’들이 이 엄혹한 시기의 유일한 희망일 수 있다. 다시 몽테스키외를 굳이 인용하자면, 민주공화국의 국가 조직과 운영 원리는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고귀한 가치가 아니다. 그에 의하면 민주공화국 정체의 원리는 다름이 아닌 ‘명예’라고 했다. 이 명예는 “모두 평등하게 남보다 내가 더 낫지 않고 나아질 수도 없는, 고귀함과 저열함의 판별 기준”으로 권력자에게 요구되는 가치가 아니라 시민과 시민의 대표인 의회에 요구되는 개별적인 책임과 판단의 근본 토대다.

권력자와 그 부역자들이 방송을 장악하고 공영방송을 초토화하더라도 ‘우리’ 각자 ‘개인’이 무엇이 진실인지, 어떠한 진실이 공유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진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예’롭게 성찰하며 실천해 나가는 책임과 판단을 한다면, 이 엄혹한 세월의 악몽을 막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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