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민주화 요구에 역행하는 반작용을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정치 이론이 있다.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있을까. 훗날 오늘을 돌아보았을 때 현재의 시간이 민주화로 나아가던 시대였을지, 반민주로 거슬러가던 시대였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사람마다 오늘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발전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현대의 삶이 각박해져 행복과 더 멀어졌다는 이유로 발전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기술이 발전하여 과거보다 편리해졌음을, 그리고 권리가 확장되어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권리의 확장. 너무나도 소중한 현대 문명의 가치이다.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한 시대가 된 것은 다행인 일이다. 선거할 수 있는 기본권을 위해,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시절이 있었다던데 많은 유권자는 그 시절을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임진왜란 시절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라는 질문이 현대에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민주화 운동과 87년 헌법 체제의 정당성을 다시금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구시대적이라 폄하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우리는 그 체제를 유지하며 지금 또다시 5년 단임제 대통령 선거를 맞이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의 인간성의 한계 덕분에 오염되어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이기까지 하며 제도의 개혁도 요구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 가치를 지키며 우리는 또 한번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기본권, 그 소중한 가치
민주주의는 너무나도 소중한 이념적 지향이라서 누구도 그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다. 개인의 자유와 참여를 기반으로 각자의 이익의 확보를 가능하도록 하는 정치체제로서 우리는 ‘민주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민주시민’이기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법치주의는 어떠한가? 우리 헌법에 ‘민주’라는 단어는 11차례 등장하는 소중한 단어다. 그러나 ‘법치’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최고규범이자 근본규범인 대한민국헌법에 우리가 법치국가라는 것이 나와 있지 않은데 우리는 법치국가인가? 그렇다. 우리는 법치국가이다.
법치(Rule of Law)는 본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자의에 의한 통치(人治)를 막고, 국민에게 법률로만 권리를 제한하도록 하여 예측가능성을 주며, 통치기구를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두어 기관 간 권한에 따른 균형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며 그 기본권이 침해될 경우 사법심사를 통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이념적 지향이다. 우리 헌법이 이러한 법치주의의 원리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기에 우리는 단어로 ‘법치’를 써넣지 않았어도 우리나라를 법치주의 국가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입법한 법이라도 이를 잘 지켜야 한다는 ‘준법주의’와 ‘법치주의’를 유사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준법주의와 법치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법치주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자의를 배제하고 ‘소수자 보호’를 제도화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결국 다수결 원리가 가질 수 있는 한계가 있으니 그중 가장 큰 문제점이 소수자 보호이고, 그렇기에 우리 헌법은 소수자 보호를 명문화하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선언하였다. 즉, ‘기본권’은 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다수로부터 소수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법치주의는 제도적으로 기본권을 보장하며 민주주의에 필요한 절차를 규정하기에 민주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규범으로 인정받는다.
대통령 후보들에게 법치의 가치를 질문한다
선거를 앞두고는 모두 변화를 이야기한다. 정권연장, 정권교체 상관없이 선거는 결국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 논쟁 과정을 통해 실제로 우리 사회가 조금씩 더 나아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선거의 모습이 과연 그러한가? 네거티브라는 단어를 포털에서 검색하면 이번 대선 후보들의 이야기만 쭉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책과 공약이 실종된 선거. 그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정치가로서 지향해야 하는 후보자들의 의지가 담긴 ‘권리 확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구현하는 형태로 운용되고 있고 소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의 표를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아야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의제가 있기에 그중 어떤 의제가 다수 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의제의 통제’(control of the agenda) 과정을 거쳐 진정한 논의의 대상이 될지를 잘 세팅하는 것도 후보의 자질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현실은 온통 비방뿐이다.
지금 새로운 5년을 책임지겠다는 후보들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두 명의 후보는 모두 법률가다. 그들은 법률가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어떤 방법으로든 대통령 후보에까지 오르도록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중앙정치의 경험이 부족하고 특별한 이슈들에 얽혀 상대방에게 비방을 받을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었던 법률과 법치주의의 실현에 대해 그 누구보다 목소리 드높여 법치의 가치를 지키고 실현하겠다고 이야기 해야 할 후보들이다.
그런데 법치주의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장애인에 대한 공약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노인에 대한 공약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각 당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상세하게 소수자의 권리 옹호에 대한 공약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어떻게 전달되고 있고 후보들은 실제로 그 내용을 어떤 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여성가족부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의 공약을 제시한 후보는 오늘도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라며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고 했다. 그에 맞서는 후보는 ‘RE100’[footnote]재생에너지 100(Renewable Energy 100)의 약자. 기업이 쓰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자는 국제적 기업간 협약 프로젝트.[/footnote]을 아는지에 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질의하여 지식을 과시했으나 그 지식의 시대적 중요성에 비해 성과는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인가 폐지되는 것도 제도의 변화이고,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일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사회적 기준으로는 날 때부터 장애인이었고 죽을 때 장애인으로 죽는 사회임을 이야기하며 “장애등급제 폐지”를 외치는 것은 같은 일곱 글자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혐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소수자 보호의 가치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K방역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늘어나는 확진자의 숫자를 보고 무조건 실패라고 규정하거나 줄어드는 위중증 환자의 숫자를 보고 무조건 성공이라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K방역이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방역에 얼마나 취약한지, 삶의 안전에 있어서 위협받았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며 이를 법치주의의 가치로 끌어들여 설명해 줄 수는 없을까? 법률가로서 살아온 두 후보는 이러한 가치를 잊은 것일까?
수화(손짓말)와 오스트리아 헌법
소수자로서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후보자가 공개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지만 ,우리 법치주의는 당신이 소수자라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사회에 미칠 파급력은 상당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수화는 독자 언어로 인정된다. 자세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오스트리아 헌법, 2005년 신설)
2005년 오스트리아 헌법에 새로 신설된 조항이다. 이런 조항을 이야기하며 ‘우리도 이런 헌법 내용 정도는 필요한 사회가 된 거 아닙니까?’라고 의제 설정 해주는 후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일까. 30만 명이 채 안되는 청각·언어 장애인을 위한 공약이 아니라 법치주의의 가치를 전달해 주는 그런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선거를 보고 있으니 그래도 이것도 민주주의의 지속이고 다행인 일이라고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반작용이라고 해석하기에도 이 넘쳐나는 혐오와 증오를 보면 우리 사회의 분열이 극복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답답할수록 제도의 본질에 부합하는 내용을 후보들에게 계속 물을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진정한 민주주의자인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그 질문들에 붙여 당신이 생각하는 법치와 소수자 보호는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정치, 그것은 무엇을 성취하려는 의지이다.” (올로프 팔메)
이 표현은 스웨덴이 가장 사랑했다던 총리 올로프 팔메의 문장이다. 우리는 후보들에게 당신이 성취하려는 그 무엇의 가치에 법치주의의 정신이 잘 내포되어 있는지를 계속하여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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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거와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듣고 계신가요? 후보자의 말이나 의혹에 대한 기사는 쏟아지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정책과 무관하거나, 무분별한 의혹 제기 기사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거, 대선을 앞두고 과연 무엇을 검증해야 하는지, 유권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게임의 룰은 문제가 없는지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가 꼼꼼히 파헤쳐보는 대선 [유권자의 스케치북] (유스케)을 연재합니다. 이번 슈스케 칼럼 필자는 김정환 변호사(법무법인 도담)입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 유스케(유권자의 스케치북)
- 필터 버블과 팬덤 정치: 대선 후를 더 우려하는 이유 (유성진,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교수)
- 2022 대선은 2030이 결정한다 (ft. 2030 공약 비교) (조원빈,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미국의 ‘제한 정부’, 유럽의 ‘50%+1’ 원칙이 주는 교훈 (조영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 대선 3분 가이드: 꼭 확인해야 할 세 가지 공약 (무권자 J 씨)
- 제20대 대선과 지방 소멸의 위기 (이소영, 대구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 비호감 대선: 선거제 개혁이 필요한 이유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청년 공약, 세대 갈등과 젠더 갈등을 넘어서 (장선화, 대전대 글로벌문화컨텐츠학과 교수)
- 대통령제 개헌의 조건: 분권형 vs. 4년 연임 (이선우,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수화(손짓말)와 오스트리아 헌법 (김정환,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
- 선진국 한국의 대선 (ft. 윤 후보의 ‘엉뚱한 분’ 발언) (서복경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실행위원)
- 비인간화를 넘어서: 정치의 본질을 생각한다 (박영득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교복 입은 시민’ 통제하려는 교육부 안내문의 문제점 (김형철 성공회대학교 교수)
- 촛불의 자리를 차지한 ‘비토크라시’ (강우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윤석열 당선자에게: ‘승자의 저주’를 피하는 방법 (유성진, 이화여대 스크랜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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