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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다. 그 이미지도 여전히 세렝게티 초원이나 기근, 내전 같은 피상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십개의 국가 위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대륙’이며, 독립 이후에도 구체적인 수많은 지명과 인명, 사건이 얽히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아프리카 현대사를 형성해나간 ‘영걸’들을 위주로 이 지역을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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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영걸전 

  1. 서아프리카 삼국지: 프랑스령 삼국의 엇갈린 운명
  2. 동아프리카 쌍벽: 케냐타와 니에레레
  3. 콩고의 순교자 루뭄바: 독립에서 암살까지
  4.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5. 셀라시에, 타락한 계몽군주의 처참한 최후
  6. ‘도살자’ 멩기스투 그리고 ‘위 아 더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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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원한 판데믹과 에티오피아 한 지역의 내전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뻗어 나간 가지로, 명확하지는 않아도 확실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현대사의 줄기에는 에티오피아의 민족 분규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해묵은 원한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중국의 부상까지 아우르는 지역적, 국제적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에티오피아의 오늘을 이해하는 것은 곧 세계사의 중요한 퍼즐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퍼즐을 알아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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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프리카 영걸전’ 중에서도 ‘에티오피아’ 편에 속한 글입니다. 이 글은 아래 두 글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을 읽을 분은 아래 두 글을 먼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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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1974년 6월, 군 하사관들과 하급 장교들이 공모하여 108인으로 구성된 ‘조정위원회’를 결성하고 아디스아바바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조정위원회는 단순히 ‘위원회’로 더 널리 불리었다. 에티오피아의 혁명 정권을 칭하는 말로 알려진 ‘데르그’(Derg)가 바로 암하라어로 ‘위원회’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7월과 8월을 거치며 정부 장악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데르그는 9월 12일에 마침내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를 폐위시키면서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정부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시작될 내부적 혼란, 전쟁,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에티오피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솔로몬의 후예이자 국민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에서 에티오피아의 착취와 억압, 낙후와 후진성의 근원으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9월 11일에 데르그 장교들은 황제에게 월로 기근의 참상을 기록한 영국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했다. 다음날 장교들은 황제를 폐위한다는 포고문을 낭독했는데, 황제는 이에 대해 자신 또한 폐위를 받아들인다고 답하였다. 궁에 감금되었던 황제는 이듬해(1975) 8월에 사망했는데, 데르그는 자연사라고 발표했지만, 많은 이들이 처형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시신은 1992년 이후에야 궁전 화장실 밑에서 발견되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살라시에의 1942년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살라시에의 1942년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그는 타락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에 의해 처형당한다.

물론 이제 폐위된 황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혁명 정권의 주도권을 누가 장악하냐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의 답이 드러나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부 출신인 37세의 젊은 장교이자 곧이어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로 악명을 떨치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그 장본인이었다.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1937년생)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1937년생)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 멩기스투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1937년 에티오피아의 남부 시골에서 태어났다. 아랍인과 닮았고 피부가 조금 더 밝은 암하라인과는 달리 멩기스투는 피부가 더 어둡고 이목구비도 코카소이드(Caucasoid: 피부색이 흰 인종)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병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군에 들어간 그는 아만 안돔 장군을 수행하곤 했는데, 장군에 눈에 들었던 그는 홀레타 군사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교육은 정말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으나 어쨌든 그는 하급 장교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후에 그는 미국 메릴랜드로 파견을 가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아마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멩기스투는 평범한 장교로 계속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어난 혁명(1974)은 그의 인생도 송두리째 바꾸었다. 아디스아바바에 들어와 데르그(‘위원회’)에 참여한 멩기스투는 데르그 내의 급진 좌익 그룹의 주요 인물로 빠르게 부상했고, 데르그의 부의장이 되었다.

비상한 기억력과 상황과 사람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가졌다고 하는 멩기스투는 부의장으로서 막후에서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올라섰다.  여기에는 도시 하층민이나 데르그 구성원 다수를 차지한 하급 장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그의 평범한 출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1974년 11월 멩기스투를 주축으로 한 급진 좌익 파벌은 과거 그를 거두었던 데르그 의장 아만 안돔을 포함하여 반대파 60인을 처형하면서 에티오피아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멩기스투(왼쪽)과 아만 안돈(가운데)의 모습. 멩기스투는 자신을 발탁한 아만 안돈을 숙청한다.
멩기스투(왼쪽)과 아만 안돈(가운데)의 모습. 멩기스투는 74년 11월 자신을 발탁한 아만 안돈을 포함한 반대파 60인을 숙청한다. (사진은 1974년 모습, 퍼블릭 도메인)

1975년이 되었을 때 멩기스투와 그의 동료들은 에티오피아에서 전면적인 사회 혁명을 개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 그들은 이미 소련식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신념을 받아들인 터였다.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는 1960년대에 아프리카 독립 1세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아프리카 사회주의’와는 결이 달랐다.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로 대표되는 아프리카 사회주의가 민족적 발전과 사회 제세력의 화합 등, ‘듣기 좋은 말’을 내거는 수준이었다면, 혁명 사상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사회, 경제적 개조를 추구했다. 데르그는 에티오피아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추진하고, 농촌 계몽 사업을 위해 학생과 교사들을 동원하여 시골로 파견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통적 사회 관계가 지배적이던 농촌에서 이들 학생과 교사들의 계몽 노력은 충돌로 비화될 때가 많았다. 혁명은 처음부터 그 조짐이 좋지 않았다.

데르그의 독단적이고 과격한 정책에 맞서 혁명에 동참했던 온건 좌파 세력은 정권 비판 운동으로 맞섰다. 그러나 무력을 지니고 있는 데르그는 이에 대해 더욱 가혹한 탄압으로 되갚아주었다. 1976년 ‘에티오피아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은 ‘전국 민족-민주 혁명’으로 바뀌었으며, 동구권에서나 유행하는 말들이 정부의 공식적인 언어를 가득 채웠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이제 에티오피아 민중의 ‘적’이 되었다.

1977년이 되면서 데르그 내 급진 좌파와 그 수장으로서 멩기스투의 위상은 절대적이 되었다. 2월에 멩기스투는 아만 안돔의 후임으로 내세웠던 데르그 의장 타파리 벤티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을 처형하고 적색 테러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처형당한 이들은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수십만 명에 달했다. 이런 잔혹한 통치와 과격한 혁명 정책은 자연스레 지방을 중심으로 데르그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불만은 아직은 본격적인 투쟁으로 점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도살자'로 불린 독재자 멩기스투는 1991년까지 집권하면서 수십만 명의 반대파를 숙청했고,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양산했다. (출처: ILRI, CC BY NC SA
‘도살자’로 불린 독재자 멩기스투는 1991년까지 집권하면서 수십만 명의 반대파를 숙청했고,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양산했다. (출처: ILRI, CC BY NC SA

미국의 오신, 소련의 의심  

한편 1974년부터 1977년까지의 사태 전개는 양대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관심을 모두 끌었다. 미국은 처음에는 에티오피아 혁명이 필연적으로 좌익 친소 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오히려 혁명 정권을 지원하여 에티오피아를 더 단단하게 미국과의 동맹에 결속시키고, 에티오피아의 제대로 된 근대화를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홍해의 두 친소 국가인 남예멘과 소말리아 사이에 위치한 요충지이자 카그뉴 군사 기지의 소재지로서 에티오피아는 미국으로서는 잃기에 너무나 아까운 전략적 자산이었다.

에티오피아의 지리적 역학 (출처: 구글지도)
에티오피아의 지리적 역학 (출처: 구글지도)

그러나 1977년 2월의 적색 테러는 에티오피아 정권이 완전히 적화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미국은 에티오피아를 과거의 모습대로 지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련도 사태의 급속한 전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에티오피아가 그렇게 빠르게 공산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소련도 데르그의 의도나 역량을 계속해서 의심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였던 소련은 에티오피아에서 황제를 폐위하고 군주제를 전복한 사건을 쁘띠부르주아 성향의 반봉건 혁명 정도로 해석했다.

소련 분석가들이 보기에 에티오피아 혁명은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장한 혁명적 전위의 무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련 입장에서는 데르그가 혁명적 좌익 세력이었더라도 안심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제3세계 각지에서 좌익 운동의 진정한 후원자를 자처하며 소련을 견제하고 있던 중국 때문이었다. 즉, 소말리아가 소련과 동맹을 계속 맺고 있는 이상 에티오피아에 설령 좌익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그들은 대안적인 후견국으로서 모스크바가 아니라 북경을 선택할 위험이 있었다.

소련을 향한 구애 

하지만 1975년을 지나면서 데르그는 소련에 구애를 계속했다. 데르그 급진파는 미국이 에티오피아의 구체제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혁명 정권에 대한 전복을 기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미국의 당시 의도를 다소 곡해한 것이었지만, 미국이 냉전기 CIA를 활용하여 각지의 정권을 전복시킨 사례들을 생각하면 아예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멩기스투와 그의 동료들은 좌파 이념에 경도되면서 미국을 아프리카를 수탈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구체제가 의존했던 미국이란 동맹에 대한 훌륭한 대안이었다. 소련은 사회주의라는 대안적 근대성과 발전 모델을 제공한 것은 물론이고, 현대적 군사 장비나 석유 같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였다. 게다가,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종주국으로서 소련의 지지를 받는 것은 에티오피아 좌익 세력 내에서 데르그의 정통성을 크게 올려줄 수 있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지지를 받는 게 멩기스투에겐 중요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지지를 받는 게 데르그와 멩기스투에겐 중요했다.

데르그의 구애는 에티오피아를 바라보는 소련의 시선을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에티오피아 혁명이라는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이 중요한 국가가 미국이나 중국 같은 경쟁국에 넘어갈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 점점 힘을 얻고 있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KGB 같은 조직은 베트남 전쟁을 보고 고무되어, 제3세계 혁명 운동과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을 흔들고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의 고심…  

그러나 1975년 내내 모스크바는 아디스아바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두고 계속해서 고심했다. 소련 입장에서 최대의 고민은 에티오피아가 너무 갑작스럽게 친소 진영으로 넘어온 데서 발생했다. 소련은 기존 동아프리카에서 확보해 놓은 외교적, 전략적 자산과 새롭게 들어온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를 조율해야만 했으나, 그러기에는 충분한 시간도 없었고 사실 능력도 없었다.

베르베라 해군 기지를 제공해준 동맹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1919-1995, 소말리아의 군부 독재자)는 혁명을 활용하여 에티오피아 동부의 소말리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 하고 있었다. 소련은 북부에서도 동독, 쿠바와 함께 에리트레아인의 분리주의 운동 세력인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EPLF)를 지원하고 있었다. 혁명과 무관하게 분리주의를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에티오피아와, 분리주의를 자극하는 소말리아, EPLF의 요구를 전부 들어줄 수는 없었다.

시아드 바레(Siad Barre, 1919-1995, 재임: 1969-1991) 소말리아의 군부 독재자 시아드 바레는 '대소말리아주의'에 편승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
시아드 바레(Siad Barre, 1919-1995, 재임: 1969-1991) 소말리아의 군부 독재자 시아드 바레는 ‘대소말리아주의’에 편승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판단을 보류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주 에티오피아 소련 대사관이었다. 아나톨리 라타노프 대사와 무관 빅토르 포키드코는 데르그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철저히 이해하고 모스크바의 지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보냈으며, 소련이 지금 에티오피아를 장악하지 않는다면 홍해 지역 전반에서 입지가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멩기스투가 보여주기 시작한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도 결연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의 자세라고 치켜세웠다. 대사관 측의 호의적 평가에 설득된 모스크바의 지도부는 1976년 12월 에티오피아와 군사 협력 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1977년 2월에 벌어진 멩기스투의 쿠데타와 적색 테러를 보면서, 소련은 데르그 정권을 완전히 신뢰해도 좋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남예멘을 통해 전차와 헬리콥터, 항공기 같은 현대전 장비가 에티오피아로 공여되기 시작하면서 데르그는 현대적 무장에 대한 그들의 갈증을 풀 수 있었다.

미국은 사태 진전이 도저히 자신들에게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했고, 데르그는 4월이 되었을 때 카그뉴 기지를 비롯한 미국의 파견 조직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소련은 멩기스투의 행보를 보고 흡족함을 느꼈다.

소말리아의 분노 

문제의 초점은 이제 에티오피아를 후원하기로 결정한 소련이 어떻게 소말리아와의 동맹도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로 모아졌다. 사실 소말리아와 소련의 관계는 에티오피아 혁명 이전에도 다소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이는 지방의 씨족 유력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시아드 바레가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친미 아랍 국가들과도 우호 관계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런 소말리아의 모습은 황제를 폐위하고 공산주의를 건설하자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며 러시아 혁명을 연상케 했던 에티오피아의 혁명적 열기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1977년 3월에 아덴에서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중재하려고 했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도 두 국가 사이에서 마찬가지 인상을 받고, 소련에 에티오피아를 지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에 조언했다. 사진은 1977년 당시 바바라 월터스(미국 언론인)과 함께 한 피델 카스트로의 모습 (출처: Antonio Marin Segovia, CC BY NC ND)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에 에티오피아를 지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진은 1977년 당시 바바라 월터스(미국 언론인)과 함께 한 모습 (출처: Antonio Marin Segovia, CC BY NC ND)

당연하게도 소련의 냉랭해진 태도는 소말리아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정보를 모를 리 없었던 미국은 소련에 대한 소말리아의 불만을 활용하기로 했다. 소말리아 대사와 만난 카터는 미국이 수집한 위성 사진 자료를 건네주며 은연중에 미국의 전쟁 지원 의사를 전달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의 침공이 취약한 에티오피아 정권에 결정적 타격을 주고, 내부 반대파의 봉기를 자극하여 멩기스투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예측을 하였다.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시아드 바레는 7월 13일에 오가덴을 향한 진군 명령을 내렸고, 오가덴 전쟁(Ogaden War; 1977. 7. 12. ~ 1978. 3. 15.) 혹은 에티오피아-소말리아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가덴 전쟁(1977.7. ~ 1978.3.)

소련의 군사 지원을 착실히 흡수했던 소말리아군은 혼란에서 회복하지 못하던 에티오피아군을 손쉽게 쳐부수며 오가덴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갔다. 소련은 자국이 공여한 무기로 인근 혁명 정권을 분쇄하려 하는 소말리아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소말리아는 마치 에티오피아가 미군 기지를 폐쇄했던 것처럼 모가디슈와 베르베라의 소련군 기지를 폐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소련은 소말리아를 아예 상실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에티오피아를 지지할 수 있었고, 이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멩기스투에게는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 없었다. 소련은 대외 개입 자산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에티오피아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가장 크게 활약한 것은 카스트로가 파견한 1만 1,600명의 쿠바군이었다. 곧이어 쿠바군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 공군은 1,000명의 소련군과 신식 소련 군사 장비를 공중 수송을 통해 에티오피아로 실어날랐다. 바실리 페트로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쿠바 연합군을 막아낼 세력은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가덴 전쟁에 참전한 쿠바군의 모습 (1977, 퍼블릭 도메인)
오가덴 전쟁에 참전한 쿠바군의 모습 (1977, 퍼블릭 도메인)

게다가 쿠바와 소련은 이미 앙골라 내전에서 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를 지원하는 군사 작전을 통해 합을 맞춰본 경험도 있었다. 1978년 5월이 되자, 소말리아는 이미 점령지에서 패주하고 있었다. 미국이나 소말리아가 기대했던 소말리인의 호응이나 에티오피아 내부에서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패전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아드 바레 정부는 지방 부족 세력들의 반발을 감당해야 했다. 오가덴 전쟁은 훗날 소말리아가 무정부 상태로 찢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붕괴된 데탕트와 소련의 회의론  

소련군 지도부는 앙골라의 뒤를 이어 쟁취한 에티오피아에서의 승리에 크게 고무되었다. 수천km 바깥에서 수행되는 작전을 공중 수송을 통해 전개하고 지휘하여 손쉽게 승리를 거둔 것은 이제 소련도 미국에 버금가는 지구적 강대국이 되었음을 입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개입 능력을 통해서 소련은 지구상 어디에서든 간에 혁명을 수호하고 소련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었다.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소련의 개입 능력을 목도했으니 마땅히 소련을 자신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소련이 보기에 자신들이 멩기스투를 지지한 것은 미국이 아옌데를 제거하고, 피노체트를 권좌에 앉힌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목표는 애초에 자신과 동등한 강대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것 자체에 있음을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지도를 보며 에티오피아의 공산화가 소련에서 남쪽 이라크와 시리아로 뻗어 나가 남예멘까지 이어지는 연속적인 소련 팽창의 결과물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인도양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전통적 위협을 상기시켰고, 석유 수송로를 지키고자 하는 미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목표를 위협했다.

이 때문에 카터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브레진스키는 회고록에서 “데탕트(긴장 완화)는 오가덴의 모래 속에서 묻혔다”고 썼고, 레이건은 카터의 나약한 태도를 더욱 격하게 비판했다. 1979년에는 앙골라와 에티오피아의 뒤를 이어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으로도 진군하자 미국의 인내심은 완벽히 파탄났고, 데탕트는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만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928-2017, 백악관 안보보좌관 임기: 1977-1981, 출처: 퍼블릭 도메인)은 오가덴 전쟁으로 데탕트가 붕괴했다고 회고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928-2017, 백악관 안보보좌관 임기: 1977-1981, 출처: 퍼블릭 도메인)은 오가덴 전쟁으로 데탕트가 붕괴했다고 회고했다. 참고로 브레진스키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사실상 전두환 일당의 군사행동을 묵인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쨌든 소련은 에티오피아에 혁명을 수출하고 자신들의 발전 모델을 실험할 수 있게 된 데 기뻐했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도합 수천 명의 전문가를 에티오피아에 파견했고, 에티오피아의 발전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파견된 소련 전문가들의 열정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근대적 발전을 위해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사회에서 헛된 노력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회의했으며, 현지의 열악한 조건에 눈살을 찌푸렸다.

게다가 사업 시행을 둘러싸고 현지 사정을 모르는 소련 전문가들과 전근대적 관행에 익숙한 현지 협력자들 사이의 불신과 갈등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이는 냉전기 미국과 소련에서 파견된 개발 전문가들이 어느 정도는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1979년의 에티오피아까지 왔을 때, 소련 공산당에서는 제3세계 개입이 비용만 값비싸고 기대되는 효과는 거의 없는 낭비적 정책이 아닌가에 대한 회의론이 크게 부상하게 되었다.

멩기스투, 개인숭배 본격화(79-84) 

하지만 오가덴 전쟁에서의 승전은 멩기스투의 권위를 최고로 올려놓았다. 외견부터 카스트로를 모방하기 시작한 그는 공산권 전체의 명망 있는 혁명가가 되었고, 국내에서는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한 지도자의 위치도 차지했다. 이미 1977년부터 시작한 개인숭배는 승전과 함께 더욱 본격화되었다. 그는 셀라시에가 쓰던 황궁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며, 신문 1면마다 자신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는 멩기스투가 혁명 전의 황제 숭배를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로 바꾸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혁명, 숙청, 승전이라는 격변 끝에 등장한 개인숭배 분위기에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멩기스투는 수많은 군중 대회를 열고 국민들을 각종 사회 조직에 소속시켜 동원하고 관리하고자 했다. 1979년에 그는 국제 아동의 해를 기념한다고 아디스아바바의 경기장에 어린이 2만 명을 모아놓고 오리걸음을 시키는 기행을 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멩기스투가 동구권 공산당을 본 딴 에티오피아노동당의 창당을 준비하는 1979년부터 1984년 사이 기간에 더욱 거세졌다. 1984년, 창당과 혁명 10주년을 기념한 행사에서 멩기스투는 거대한 혁명 행사를 기획했는데 이는 1982년에 그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국경절 행사를 보고 영감을 받은 결과물이었다. 북한 고문들은 에티오피아에 파견되어 행사 기획과 매스 게임 등을 감독했으며, 만수대창작사에서는 50m의 석비와 조각상으로 이루어진 티글라친 기념비를 만들어주었다. 행사는 7만 명의 군중 대회와 값비싼 소련제 군사 장비의 행진을 뽐내며 웅장하게 치러졌다.

독재자를 영접하는 독재자. 1971년 루마니아 주석 차우세스쿠를 영접하는 김일성. 그리고 1982년 평양을 방문한 멩시스투는 김일성 우상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독재자를 영접하는 독재자. 1971년 루마니아 주석 차우세스쿠를 영접하는 김일성. 그리고 1982년 평양을 방문한 독재자 멩시스투는 김일성 우상화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에티오피아 대기근(83-85)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서 에티오피아 혁명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초기의 토지 개혁은 여느 공산주의 국가처럼 농업 집단화로 이어졌고, 이는 농업 생산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에 대응해 정권이 추진한 새로운 영농법은 삼림 유실과 토양 침식으로 이어져 에티오피아 농업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그러나 멩기스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농촌 조직을 통해 곡물을 징발하고 수출하였다. 과거 소련이 농업 집단화를 시행했을 때 벌어진 아수라장이 에티오피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수출액을 공업에 투자한 스탈린과 달리 멩기스투는 정권의 든든한 지지기반이자 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를 유지하는 데 보냈다.

상황은 북부 티그레이와 월로 지역에서 가장 안 좋았다. 전쟁 이후 소요가 진압된 동부와 달리, 이 지역은 여전히 에리트레아인들과 티그레인들이 주축이 된 게릴라 집단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 에리트레아해방전선(ELF), 티그레이인민해방전선(TPLF)가 그 주역이었다. 멩기스투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이 지역에서 계속된 진압 작전을 펼쳤는데, 군사 작전의 진행은 타격을 입은 농업 생산을 아예 붕괴시켜버렸다.

1983년과 1984년에는 기록적인 가뭄이 찾아와 마침내 티그레이와 월로에서 거대한 기근이 초래되었다. 수백만 명의 난민이 식량을 찾아 고향을 떠나 애처롭게 도시로 향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기아, 질병, 폭력 등으로 희생되었다. 기근에 따른 사망자 통계는 추산에 따라 다양한데, 혹자는 50만 명, 혹은 120만 명을 주장하기도 한다. 정확한 숫자는 앞으로도 알기 힘들겠지만, 사망자가 얼마나 되었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최악의 인도주의적 참사 가운데 하나였다.

1984년 11월 4일 에티오피아 바티에서 촬영한 모습(출처: United Nations Photo, John Isaac, CC BY NC ND)
1984년 11월 4일 에티오피아 (출처: United Nations Photo, John Isaac, CC BY NC ND)

멩기스투는 티그레이에서의 기근에 무신경했다. 국내에서 기근 지역에 대한 구호 활동을 해야하며 외국의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빗발쳤지만 그는 이런 모든 제안들을 가볍게 무시했다. 서구에서도 티그레이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는데, 멩기스투가 기근에 대한 정보를 심지어 국내에서도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위 아 더 월드’

하지만 영상 시대에 생중계되는 티그레이의 비참한 실상은 일단 한 번 전달되자 서구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영국의 팝 가수 밥 겔도프‘그들이 크리스마스인 것을 알까?’(Do they know it’s christmas?)라는 곡을 발표해 수익금을 에티오피아 기근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나섰다.

밥 겔도프의 움직임은 영국과 미국의 팝스타들을 자극했다. 1985년 영국에서는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결성되었고, 미국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주축으로 하여 ‘아프리카를 위한 미국(USA for Africa)’이 만들어져 팝의 역사에 남을 곡인 ‘우리는 세계입니다(We are the World)가 탄생했다.

커버에 적힌 말 그대로 "역사적인" 레코딩 '위 아 더 월드'
커버에 적힌 말 그대로 “역사적인” 레코딩 ‘위 아 더 월드’

대중문화 스타들의 참여나 냉전 시대 진영을 넘어선 인도주의 구호의 경험은 이후 세계 시민사회의 중요한 자산으로 남았고, 기근 위기에 처한 많은 에티오피아인들을 구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기부 수익금의 많은 부분은 멩기스투 정권으로 흘러 들어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데르그가 모든 걸 통제하는 가운데, 굶주림에 처한 수만 명의 난민을 목도한 난민 보호소와 자원봉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했다.

티그레이 강제이주 (’84. 11.) 

멩기스투는 기근을 오히려 지긋지긋한 티그레이와 에리트레아 분리주의 세력을 분쇄하는 계기로 삼고 싶어했다. 1984년 11월, 그는 초유의 강제이주 계획을 발표했는데, 기근 문제를 해소하고 에티오피아 농업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티그레이 지역 인구 수십만 명을 남부 지역으로 재배치하고 그곳에서 사회주의적 집단농장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발상이었지만, 아직도 에티오피아를 버리지 못한 소련의 협조 하에 강제이주가 개시 되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진행된 강제이주를 위한 강제이주는 규모는 작았을지라도 마치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학살 같은 비극을 만들어냈다. 60만 명이 이주되는 동안 5만 명이 사망했다. 강제이주 대상자로 지정된 사람들은 사살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하고, 국경 너머 서쪽의 수단으로 탈주했다. 남쪽에 어떻게 도착했어도 티그레이 지역과는 맞지 않는 기후와 식생 때문에 농민들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티그레이' 지역
에티오피아 북부 분리주의 세력의 근거지 ‘티그레이'(와 레이트레아)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것은 멩기스투도 마찬가지였다. 티그레이와 에리트레아의 분리주의 운동은 가차 없는 진압 작전과 기근에도 불구하고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련식 군사 교리가 유용했던 오가덴 평원과 달리 산맥과 절벽 등으로 지형의 기복이 심했던 북부 지역에서는 작전이 어려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랬듯이 산악 지형은 게릴라들을 위한 좋은 은신처들을 제공해주었다. 참다못한 멩기스투는 자신이 직접 지휘에 나서겠다며 에리트레아의 수도인 아스마라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의 지나친 지휘권 간섭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파멸을 맞은 혁명… 멩기스투의 망명(1991)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해 숙청과 냉전의 국제전을 거쳐 참혹한 기억과 비극으로 치달은 에티오피아 혁명도 이제 종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88년 3월에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의 1만 5천명 병력이 아파벳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정부군 2만 명을 압도적으로 격파하고 전멸시켜 승기를 거머쥐었고, 5월에는 에티오피아 내부의 저항세력이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을 결성하여 연합 공세에 나섰다.

1990년이 되었을 때는 항구 도시 마사와마저 장악당하면서 에리트레아에서 멩기스투의 통치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리고 이 때 에티오피아 혁명의 지원자였던 소련은 사실상 제국을 유지하는 데 모든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경제난과 민족 갈등, 혼란 등으로 지쳐 있는 소련 시민들은 이제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의 혁명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잃고 자원을 쏟아붓는 것에 진저리를 쳤다. 그 돈으로 차라리 자신들의 삶이나 개선해야 했다.

소련은 지원을 대폭 삭감하고 고르바초프는 멩기스투에게 자신처럼 개혁에 나서라고 권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의 돈줄인 수출품 가격이 폭락하면서 데르그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멩기스투는 지원을 찾아 이스라엘에게까지 접근하여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이주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원조를 받기까지 했다. 더하여 멩기스투는 시장 개혁에 나서고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했다.

멩기스투하면 이를 갈고 있던 그의 적들은 이런 같잖은 시도에 코웃음을 쳤다.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와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의 연합군은 아디스아바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은 멩기스투는 1991년 5월 21일에 연합군을 피해 몰래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짐바브웨로 망명했다. 그날 EPRDF는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했고, 6월에는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다. 이미 붕괴된 여러 동유럽 공산 정권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은 아디스아바바의 레닌 동상을 무너뜨리며 냉전과 혁명의 종식을 축하했다.

수많은 숙청과 학살 그리고 난민을 남긴 최악의 독재자 멩기스투... 그의 혁명을 파멸이라는 종착지에 드디어 도착했다.
수많은 숙청과 학살 그리고 난민을 남긴 최악의 독재자 멩기스투… 피로 물든 혁명은 파멸이라는 종착지에 드디어 도착했다.

악당의 ‘평온한’ 노후 

망명 후 멩기스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짐바브웨에서 평온한 후생을 보내고 있다. 즉, 그는 아직도 84세의 나이로 살아있다. 1995년에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에티오피아 정부가 계속해서 그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고, 로버트 무가베가 2017년에 축출되었음에도 짐바브웨 정부는 여전히 멩기스투를 보호해주고 있다.

혹자는 멩기스투가 무가베 시기 슬럼가 철거를 비롯한 각종 억압 정책에 조언을 제공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신정부는 멩기스투를 생포하지 못한 것에 아까워하며 궐석재판을 진행했고, 2008년 사형 선고를 내렸다.

물론 신정부 입장에서 멩기스투를 잡지 못한 것은 그냥 조금 아까운 문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혁명 이후 폐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거취 따위는 부록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이다.

왜 악당은 (대체로) 잘먹고 잘사는가? (....)
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악당… 왜 악당은 (대체로) 잘먹고 잘사는가? (….)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시대가 바뀌고 인물이 바뀌면서, 다시 이 나라의 주도권을 누가 쥐게 되느냐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질 터였다. 멩기스투의 집요한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투쟁을 지휘한 게릴라 지도자들이 권력을 갖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두 명의 지도자가 가장 중요했다.

한 명은 공산 정권 붕괴 이후에 독립 에리트레아의 대통령이 되는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였고, 또 다른 한 명은 28세에 이미 티그레이인민해방전선(TPLF)를 이끌기 시작해 5년 뒤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를 규합하고, 마침내 36세의 젊은 나이로 에티오피아의 총리가 되는 멜레스 제나위였다. 아페웨르키와 멜레스는 어찌 보면 형제민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에리트레아인(티그리냐인)과 티그레이인(티그라얀인)의 지도자로서 멩기스투에 저항하는 연합 전선의 양대 수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지도를 새로 쓰는 가운데 과거의 동지는 철천지 원수로 변하고 만다.

어제의 전우가 오늘의 원수로.
밍기스투에 함께 저항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왼쪽)과 멜레스 제나위(오른쪽,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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