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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와 신비가 운영하는 서울 약수역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카페 [어쩌면 사무소]. 근사한 인테리어를 ‘구경’하거나, 숙련된 바리스타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쩌면 사무소]엔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꿈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들은 그 꿈을 매일 조금씩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 소박하지만 멋진 모험담을 슬로우뉴스에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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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사무소 beta
어쩌면사무소 beta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여름 내내 선풍기도 틀지 못한 채 공사를 하던 나날… 정말 끝이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아득함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흘러 베타 오픈의 날이 왔다. 목장갑, 사포, 톱, 빗자루가 아닌 종이와 펜을 손에 쥐고 이 팻말을 쓰던 그 순간의 어색하면서도 설레던 기분이란! “어쩌면사무소 beta” 이 몇 글자를 쓰기까지 우리가 거쳐왔던 시간과 인연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졌었다.

뭐 하는 곳이냐고요? 우리도 잘 몰라요.

두근두근 베타오픈
두근두근 베타오픈

그동안 어찌어찌 해오긴 했지만 사실 목공도 텃밭도 사업자등록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커피, 장사, 이웃 살이… 앞으로 해나가야 할 것들도 모두 처음일 터였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이 뭐하는 곳인지를 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불안함이나 부족함이 아닌 기대와 호기심을 더해주는 멋진 조건이었다. 그런 만큼 우리는 기존의 사례나 경험에서 정답을 찾지 않고 우리가 하나하나 탐험하며 답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베타 오픈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메뉴와 공간운영방식을 확정하지 않은 상태로 한 달 동안 공개테스트를 하기로 했다. 그 한 달 동안, 오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답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고쳐나갈 참이었다. 대신에, 공사기간 내내 누군가 “여기 뭐하는 곳이에요?”라고 물으면 “저희도 잘 몰라요…” 했던 대답을 바꿔 이제부터는 “카…카페 같은 곳이에요.”라고 대답할 참이었다. (하지만 이후로 “여긴 뭐하는 곳이에요?”에 이어 “베타 오픈은 뭐에요?”라는 질문이 추가될 거라는 건 생각지 못했었다.)

대망의 첫 손님

그렇게 베타 오픈의 첫날이 밝아오고, 부산스럽게 청소를 하고 채비를 끝낸 우리는 출입문에 “OEPN” 팻말을 걸어놓고 어색하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제일 먼저 들어올까?” “누가 들어오기는 할까?” “아무래도 우리끼리 하루를 보낼 수도 있겠지?” 이런 대화를 하는 사이, 갑자기 창밖에 오토바이가 한 대 달려와 섰다. 가만 보니 조금 전에도 이 앞을 지나갔던 우체국 직원 오토바이였다. 우편물이 온 건가 싶었더니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온 그분은 “이제 오픈하셨어요? 매일 지나가면서 언제 여나 했었는데, OPEN이라고 쓰여 있는 거 보고 반가워서 들어와봤어요.”라며 실내를 죽 둘러보았다.

아, 그렇다. 드디어 첫 손님이 온 거다.

첫 손님은 동네 토박이 우체국 집배원!
첫 손님은 동네 토박이 우체국 집배원!

그는 20대에 우체국에 들어가 십여 년간 꾸준히 집배원으로 일해왔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이 근처에서 살아왔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단다. 옆집, 건너 집, 맞은편 아파트 단지, 언덕 너머 우리가 살고 있는 옥수동… 매일같이 골목골목을 누비며 일해왔기 때문에 모르는 집이 없고, 동네의 예전 모습이며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요즘 우편배달은 어떠냐고 물으니 역시나 고지서나 홍보 전단이 대부분이라 손편지 일일이 찾아다 주는 맛이 적어졌다고 했다. 가끔 또박또박 손으로 쓴 정성스런 편지를 보면 어떻게든 꼭 제대로 배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하지만 우편물 수량에 비해 인원이 많지 않아서 담당 분량을 다 확인하고 소화하려면 종일 무척 바쁘다고 했다. 최근에 새로 조달받은 오토바이와 뭐가 잘 맞지 않아서 사고가 자주 난다는 이야기도…

하여간 반가운 마음에 들뜬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친김에 인증샷까지 찍었더랬다. 그는 그날 이후에도 지나는 길에 종종 들르긴 했지만 바빠서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우편물은 꼭 직접 들어와 전해주고, 근처 어디를 지나다가 어쩜이와 똑 닮은 고양이를 보았다거나, 명절을 앞두고 우편물이 밀릴 거라든가 그런 소소한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때론 무슨 심부름꾼처럼 대하는 주민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렇더라도 별 내색치 않고 자기의 일을 즐겁게 자부심을 갖고 하는 모습이 근사했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우편물을 들고 온 그가 한동안 나오지 못할 거라고 했다. 새 오토바이가 영 몸에 맞지 않았던 건지, 과로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몸에 문제가 생겨 입원을 하게 되었다고. 입원해 수술할지 치료를 할지 검사를 해봐야 하고, 수술하게 되면 더 오래 못 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더니 진짜 가을이 다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전혀 소식이 없어 제법 걱정이 되었더랬다.

그러던 어느 추운 아침, 오랜만에 오토바이가 문 앞에 멈추어서고, 아무렇지 않게 그가 들어와 복귀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코끝이 괜히 시큰, 했었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스쳐 지나는 인연일지라도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만남이었고, 그는 언제까지나 우리의 딱 한 번뿐인 ‘첫 손님’일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 좋은 인연의 시작

어쩌면사무소의 첫 손님이 토박이 집배원이라는 것은 무언가 좋은 소식이 앞으로 계속 날아들 거라는 암시는 아니었을까. 돌아보면 정말 그러했던 것 같다. 하루하루,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아가면서 좋은 소식, 좋은 인연이 참 많이도 이어져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여전히 활달한 모습으로 우리의 우편물을 들고 오고, 그 우편물 중에는 때로 고마운 사람들의 정성이 담겨오곤 한다.

추운 겨우내 늘 운전 조심하라는 인사만 전했는데, 이번에 오면 뭔가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전해줘야겠다. 이후로도 계속, 잘 부탁한다고. 지금처럼 늘 건강하고 행복한 집배원이 되길 바란다고.

첫 손님이 앉았던 창가 풍경
첫 손님이 앉았던 창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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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1. 어쩌면사무소 풍경만큼 따뜻한 글이네요
    어쩌면 우리가 상상했던것과 다른것이 된다해도 재미있을것같아요
    그런데 정말 베타오픈이 뭐예요??

  2. 베타 오픈은 ‘정식’ 오픈이 아닌 ‘임시’ 오픈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요. : )
    온라인 서비스 발표에서 ‘알파’니 ‘베타’니 하는 용어를 쓰는데 거기에서 온 표현입니다.

  3. 고마워요, 종소리 님.
    민노씨 설명처럼 테스트를 위한 임시오픈을 뜻하는 거였어요.
    생소한 재미를 노렸는데 잘 안된 것 같죠.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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