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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버스를 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을 알지만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면 내려가는 버스를 놓쳐서는 안 되고, 그러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고속터미널까지 가주세요” 하고 행선지를 말하니 기사 아저씨가 묻는다.

“어디 멀리 가시나벼?”

“대전까지요.”

“집이 대전이에요?”

“네, 집은 대전이고 아까 택시 탄 데는 친정이고요.”

“친정에는 왜 왔다 가유? 엄마 보고 싶어서 왔슈?”

“아, 그게…”

이런 질문을 들으면 왠지 망설이게 된다. 왜 이런 걸 묻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런 걸 왜 물어봐요?’ 하고 따지면 이쪽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될 테고, 적당히 둘러대자니 굳이 거짓말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이상한 거부감이 생기고, 모든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 역시 ‘TMI’[footnote]TMI: 인터넷 조어. ‘Too Much Impormation(너무 많은 정보)’의 약자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전하는 경우에 쓰임. (편집자) [/footnote] 같고. 그러다 보면 상대는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혼자만 괜히 진지한 것 같아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결국 앞뒤 옆 다 자르고 간략하게 말하기로 한다.

“친정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아파서요. 많이 아프고 곧 죽을지 모른다고 해서, 얼굴 보려고 들렀다 가요.”

“푸하하! 개가 아파서 왔다고요!”

내 말을 들은 기사 아저씨는 웃음을 터뜨렸다. 싸한 기분이 들면서 괜한 걸 이야기했다고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니, 개가 몇 살인데 그려요.” 

“열여섯 살이요.”

“열여섯이면 살 만큼 살았구먼 왜.”

기분이 나빠진다. 사실 저 나이대의 아저씨들에게 놀랍지 않은 반응이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다. 실은 나 역시 마음 한 구석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지만.

“새끼 때부터 키운 개라서요.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요.”

“어유, 개한테 정드는 것이 참 무서운 일인디.”

“네?”

택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한다. 기사 아저씨는 말을 잇는다.

“아, 우리집도 애들 어릴 때 아직 살림이 살만하던 시절에, 강아지 사줬었거든요. 왜 사람마다 그런 시절이 한 번씩 있잖아요? 꽤 오래 살았지. 우리 개도 16년 살았는디. 그런데 애들이 거기 정을 붙여가지고, 나중에 강아지 죽었을 때 왜 추모공원 있죠? 거기다 갖다 묻어줬다니까요.

그러면서 할아버지 제사는 안 챙겨도 강아지 제사는 꼭 챙긴다니까요? 내가 딸 둘에 아들 하나인데, 할아버지 제사니까 오라고 해도 이것들이 절대 안 와. 그래놓고서는 일년에 한 번씩 강아지 제삿날에는 지들끼리 꼬박꼬박 만나서 간다니까 글쎄! 어휴 진짜.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나중에 내가 죽으면 좀 강아지한테 하듯이 챙겨줘봐라. 그랬더니 대답들을 안 해. 개는 거기다 눈 안 보인다고 나름 백내장 수술까지 해줬는데. 그래서 내가 야 느이 아버지도 눈 안 보이니까 나중에 눈 수술해줘라, 하는데 이것들이 또 대답을 안해. 이것들이 아빠 생일에도 집에 안 오면서 말이야.”

“…음….”

더는 화가 나지 않았지만, 반대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강아지 가고 나면 부모님이 많이 쓸쓸하시겠네유?”

“네…아무래도 그렇죠. 딸들도 다 시집가고, 자식같이 기르셨으니까.”

“아 한 마리 더 사줘유!”

“근데 부모님이 이제 힘들어서 못 기르시겠대요.”

“아 힘들긴 뭐가 힘들어유! 늙은 개나 힘들지 새끼 때는 안 힘들어. 그냥 사줘유!”

“아니 기르는게 힘든게 아니라, 생명을 기르고 보내는게 힘이 드신대요. 길러도 또 금방 죽으니까요. 그러면 또 보내줘야 하잖아요.”

“아 금방 죽긴 뭘 금방 죽어유. 15~16년 살텐데 그럼 부모님하고 같이 가겠구만.”

“네???”

“손님 정도 나이 딸 있으면 부모님도 환갑 넘었을텐데, 아녀유? 그럼 비슷하게 가겠구만, 뭘. 먼저 보내는 걸 걱정해?”

화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신기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웃길 정도였다. 개가 죽을 것 같아 슬퍼하는 손님에게 자기는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개나 부모님이나 15-16년 후면 똑같이 떠날 거라고 한마리 더 사주라는 말도. 아저씨가 모든 종류의 아픔에 어느 정도 통달하거나 둔감한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얼만큼의 상실과 고통을 겪어야 이렇게 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사실 너무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은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한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이 반복되는 동안 조금씩 조금씩 감정을 무디게 조절하는 것. 외부의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다가는, 사라지는 모든 것의 상실을 슬퍼하다가는 멘탈이라는게 남아나지 않을테니까.

어느새 택시는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마지막에 내리는 순간까지도 아저씨는 나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다.

“부모님한테 개 한마리 꼭 더 사줘유! 알았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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