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2017년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은 데일 만큼 뜨거운 주제입니다. 함부로 끼어들지 못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침묵합니다. 갈등은 대화를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가두는 증오와 편견만을 끝없이 잉태합니다. ‘젠더 전쟁’ 4부작을 통해 작은 대화의 공간이나마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연하게도 이 글 소재에 대한 다양한 보론과 비판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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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서울의 새벽은 어느 때와도 같았다. 특히 강남의 새벽은 늘 그렇듯이, 도시권 인구 2천 400만과 세계 4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메가시티의 심장부답게도 화려한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영국 기자는 한국인을 두고 “종일 일하고 밤새도록 논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서울 시민들이 밤새도록 놀 수 있는 것은 이 도시가 밤이 내려앉아도 안전한 곳이기에 가능했다. 서울은 “밤거리에 혼자 걸어도 전혀 문제없는 곳”인데 누가 매사를 걱정하면서 이 도시의 새벽을 아깝게 흘려보내겠는가? 세계적인 여행 사이트인 ‘트립 어드바이저’는 서울을 세계에서 8번째로 안전한 도시로 선정하기도 했었다.
1. 그녀들만의 상식
하지만 그날만큼은 무언가 다른 날이었다. 밤거리도 걱정 없다는 이 나라에서 최고로 번화한 곳에서 한 여성이 칼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범인은 곧 경찰에 잡혔는데, 살해 동기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강남역 살인사건의 파급효과는 컸다. 범행 장소 주변이자 서울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의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태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여자라서’ 죽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이어졌다. 대다수 여성에게 5월 17일은 ‘특별히 다른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 항상 존재하는 공포에 가까웠다.
안전하게 밤거리를 걷고 싶다는 아주 사소한 바람들이 무더기로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감내해야만 했던 것들에 대한 분노가 쏟아져 곧이어 가해자가 속해 있는 집단, 남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당해온 경험이 너무나 많기에 사실상 남성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 집단’이라고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남성은 이에 대해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그 어리둥절함이 분노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해자는 그저 단순한 정신병자다. 정신병자가 돌아버려서 저지른 일로 왜 무고한 남성을 싸잡아서 욕하는 것이냐? 다수의 남성이 신경질적으로 항변했다. 여성은 자신이 언제나 의식하고 사는 것, 다시 말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희롱과 성추행, 때로는 강간과 살해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불안의 의식을 토로했다. 강남역은 젠더 전쟁의 전장으로 변모했다. 이는 오프라인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한 최초의 전투였다.
여성만의 공유지식 ‘두려움’
왜 이런 전투가 벌어졌을까? 이는 공유지식(Common Knowledge)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공유지식은 게임 참여자 모두가 아는 지식을 말한다.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고, 또 그렇다는 사실을 서로가 아는 상황이다. 공유지식은 집단이 조정 문제(개인의 선택이 타인의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게임 상황)를 극복하고 집합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로 기능한다.
박근혜를 탄핵한 것은 바로 이 공유지식의 힘이다. 광화문 시위에 나간 사람들은 단지 나만 박근혜를 퇴진시키겠다는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수백만, 수천만 시민과 나아가 이 나라 전체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 공유지식으로 만들어진 집합 행동의 에너지가 정치인과 검찰 등의 관료집단에 압력으로 작용해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되었다.
나는 여성이 아니라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다른 여성 또한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아는 것들이 있다. 강남역 사건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폭력이었다.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희롱이든, 출근길에서 갑자기 마주하게 된 불쾌한 성추행이든, 지인의 성폭력 혹은 데이트 폭력 피해 사례든 여성들 사이에서 이 모든 종류의 폭력과 그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공유지식이었다.
이것이 5월 17일 그 날이 ‘특별히 다른 날’이 아닌 이유다. 특별히 다른 날이 아니고 늘 평소와 같은 날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거리로 나왔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사건 직후 벌어졌던 ‘이 사건의 본질이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는 중요한 쟁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사회학자나 법학자에겐 중요한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그때까지 여성이 공유하는 어떤 한스러운 공포와 분노에 방아쇠를 당겼던 것에 있다. 여성들은 자신이 겪은 작은 불편에서 공포스러운 악몽까지 온갖 경험을 포스트잇에 담아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였다. 강남역은 여성의 공유지식을 통해 폭발했고, 이후 공유지식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 다시 여성을 행동에 나서게 했다.
남성만의 공유지식 ‘군대’
하지만 남성은 그런 공유지식이 없다. 남성 대부분은 남성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에 노출될 일이 없다. 따라서 5월 17일은 역시 ‘특별히 다른 날’이었다. 정신질환자에 의한 살인사건이 매번 있는 일은 아니니까. 자신을 포함한 남성 대다수는 그런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왜 여성들은 평소와 다르고 특별한 일을 왜 일상적인 남성의 폭력인 것처럼 말하는 것인가? 남성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대상화될 일(과 그에 따른 피해)은 여성의 그것에 비하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그녀들만의 상식’에 의해서 자신이 공격받는 것에 불쾌해했다. 반대로 여성은 그 공유지식 간의 간극에 불쾌해하며 ‘그녀들만의 상식’, 즉 자신의 공유지식을 남성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했다.
사실 이는 군 가산점 문제를 둘러싼 제1차 젠더 전쟁에서도 보이던 양상이었다. 상황이 그때와 조금 달랐을 따름이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대상화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는 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오직 남성만 겪는 기나긴 대상화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 바로 군대였다. 거의 모든 한국 남성은 군대 경험을 공유한다. 설령 군대에 가지 않더라도 군대에 관한 최소한의 상식은 집단 내부에서 사회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군대에 가기까지 한참 남은 10대들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고백하자면 나는 ‘초딩’ 때 군 가산점 제도의 폐지에 비분강개하는 댓글을 남긴 적이 있었다. 군대는 곧 남성만의 공유지식이었다. 여성 대부분은 이 공유지식의 바깥에 존재했고, 그때에도 남성은 그 간극을 메우고자 했다.
군 가산점을 둘러싼 제1차 젠더 전쟁 당시 여성은 또 다른 그들만의 공유지식을 동원해서 맞섰다. 바로 임신이었다. 남성이 임신의 고충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제1차 젠더 전쟁은 서로 다른 공유지식 간의 평행선만 그으면서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젠더 전쟁의 격전지라고 할 만했던 강남역 10번 출구는 그때와는 양상이 달랐다. ‘강남역 전투’는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 전투는 내가 제2차 젠더 전쟁이라고 칭하는 그 이전과는 구별되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
메갈리아의 탄생, 왜 하필 2015년인가
강남역 전투 이후 이는 넥슨의 성우교체를 둘러싼 ‘클로저스 전투’와 문화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폭로 활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라는 희대의 블랙홀 정국 속에서도 DJ DOC의 노래가 여성혐오적인 가사를 담고 있다고 그들을 무대에서 내리는 데 성공하며 전국적으로 존재감을 증명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2015년과 2016년의 인터넷을 불태웠던 키워드가 빠지지 않는다. 짐작하다시피, 메갈리아다.
조직으로서의 메갈리아는 탄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분열하면서 사라졌지만, 그 네 글자는 이후 벌어지는 모든 성 갈등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멸의 이름이 되었다. 메갈리아를 기점으로 제2차 젠더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전의 젠더 갈등과는 양상부터가 크게 달라졌다.
이전의 인터넷 젠더 전쟁은 주로 남성 측이 일방적으로 여성을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제2차 젠더 전쟁은 여성이 훨씬 적극적이고 조직된 행위자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오프라인으로 나왔으며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가득 채워 넣어 자신의 힘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2015년에 이 움직임이 시작되었는가? 그들의 말에 따르면 여성들에 대한 폭력 혹은 차별은 이전부터 늘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여성주의자는 그 이전 20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왜 이전에는 자매애에 따라서 궐기하는 일이 없었는가?
어떤 설명은 인터넷상에서 퍼져나가는 여성혐오에 대한 여성의 반발심으로 이 원인을 설명하곤 한다. 이 관점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그러나 현상 전체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메갈리아 혹은 온라인 페미니즘 운동은 본질에서 여성이 조직한 운동이다. 따라서 이를 알기 위해선 여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역사를 돌아보려고 한다.
2. 여성의 상승인가 계층의 분화인가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대학교에도 본격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비슷한 비율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곳은 여성주의의 제련실이 되었다. 이들은 여성주의 스터디를 조직하고, 시위에 나가고 자신의 퍼포먼스도 꾸려나갔다. 남성 편의에만 맞도록 구성된 대학 공간을 성 평등의 공간으로 만들려고 목소리를 냈다.
진보를 내걸고 투쟁하는 학생운동 조직도 극도로 성차별적이었던 것이 당시 풍토였다. MT 가면 혁명을 위해 여성이 설거지해야 한다는 소리를 했던 시대에 여성의 불만은 당연했다. 마지막 농업사회 세대이자 최초의 산업사회 세대들 간의 성별 갈등이 다시 점화했다.
대학가의 여성주의 운동
한편 당시 대학가의 다양한 학생운동 단체들은, 이미 조직에서 입지를 확보한 여성의 요구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면서 동시에 인적 자원을 확보해 조직 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여성총학생회가 생겼고, 여성휴게실도 생겼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80년대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이 흐름을 주도한 사람을 지금 우리는 국회에서 볼 수 있는데 바로 심상정 의원이다.
이런 여성주의 운동은 호주제 폐지까지 이어지는 숱한 성과의 사회적 기초였다.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해외 담론을 수입해 이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어나가며 빠르게 영향력을 확산해 나갔다. 조한혜정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만든 무크지 ‘또 하나의 문화’ 같은 플랫폼이 생겨났다.
대학교의 ‘여모'(여성주의자 모임) 등은 당시까지만 해도 건재했던 학생자치문화 속에서 번성했다. 이들은 우선 자신들이 자리 잡고 있는 지식인 사회와 대학의 문화와 관념을 바꾸어내고자 열렬히 투쟁했다. 어째서 너의 말이 여성 차별적인가? 성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숱한 논쟁이 오갔고, 많은 이들의 자기반성을 끌어냈으며, 의기양양한 승리의 기억도 있었다. 성에 관한 전통사회의 보수적인 담론은 무수한 공격을 받았다. 90년대를 회고하는 대중문화 생산물에 자주 나오는 ‘남성의 시각에 아랑곳하지 않고’ 흡연하는 여성은 이런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여성주의 운동 자체가 이루어낸 성과는 무척 제한적이었고,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지도 못했다. 90년대의 플랫폼들은 2000년대 이후 누적되는 변화 속에 와해되었고, 현재 대학에는 그 잔재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결국, 여성의 약진은 여성주의 운동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실상은 그 반대다. 한국이 산업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면서 여성들에게 교육 기회가 높아졌고, IMF를 계기로 여성의 경제 영역 참여가 늘자 자신들의 위치에 맞는 합당한 지분, 즉 성 평등을 요구한 것이다.
또다시 갈라진 세계
마치 가부장제가 남성의 지배를 확립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제가 가부장제를 만들었던 것처럼, 산업경제가 여성의 부상을 불러와 여성운동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는 온전한 그림은 아니다. 이는 여성 집단을 단일 집단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남성이 그렇듯 여성도 결코 단일 집단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집단 내부의 역학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왜 2015년인가?’라는 질문의 답일 수도 있다.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는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 기회를 잡는 사람들은 급속히 부를 쌓으나 기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게 돼 발생하는 불평등에 주목했다. 개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 다시 그 불평등은 완화된다. 이것이 쿠즈네츠가 제안한 쿠즈네츠 곡선이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도 이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어느 정도 경제적, 사회적인 여유가 있는 여성은 여권 상승의 직접적인 혜택을 봤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은 딱히 나아진 것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여성집단 ‘내에서’ 권리의 불평등은 그렇게 점차로 심화했다.
이를테면 일찍부터 대학에 들어가 자신들이 차별받고 있으며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싸워서 권리를 쟁취했다. 그 이후에 대학에 들어온 여성은 선배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린 상태에서 더욱더 자신의 권리를 확대하고자 여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심상정이 그 시작을 알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시대변화에 조응하듯, 심상정이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단체협의회에 참여하던 1988년에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살롱]은 그 이름을 [여성시대]로 바꾼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영역에서 여성의 본격적인 부상과 참여를 예고하는 신호였다.
그러나 초창기 대학가를 주름잡은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꿈꾸었던 ‘여성시대’는 그 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여성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대신 많은 여성에게 찾아온 진짜 여성시대는 현실에 있지 않았다. 진정한 여성시대는 20년쯤 뒤에 전혀 다른 곳에서 탄생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왜 현실에서 여성시대가 탄생할 수 없었을까? ‘또 하나의 문화’ 창간 2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조한혜정 교수가 한 대답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 ‘지식인’ 운동이죠. 근데 ‘지식인’을 어떻게 볼 거냐. 그게 중요하죠. 학교나 학력이 ‘지식인’의 조건은 아니거든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게 ‘지식인’이거든요. ‘또문’(또 하나의 문화)’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의 ‘지식인’이죠.” (조한혜정)
여성주의 운동은 대학가에서 그들 자신의 담론을 유통했고, 학계나 언론계 등 중산층 이상의 전문직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포괄해온 범위가 매우 작다는 데 있다. 조한혜정 교수 말마따나 학교와 학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그게 뭔지는 잘 감이 안 오지만,)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언어화 능력을 가진 사람의 절대다수는 대학을 통해 생산된다. 지식인 운동은 그래서 대학 밖으로, 공장, 저가 음식점, 마트 계산대 등 여성 노동력이 가장 좋지 못한 대우를 받는 곳의 여성에게는 퍼져나가지 못했다. 몇몇 사회주의적 여성주의 집단은 노동조합 등지에서 성 평등을 구현하고자 했지만, 그곳을 주름잡고 있는 정규직 노조는 97년의 사회변동도 버텨낸 사람들이었다. 굳이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고려해줄 이유도 없었다.
이렇게 여성주의는 광범위한 사회 일반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제한된 ‘여성계’와 대학 강단에만 남게 된다. 돈이 없어서 남자 형제에게 밀려 고등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적지 않은 여성들은 이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초창기 대학가를 주름잡은 여성주의 활동가가 꿈꾸었던 여성시대는, 그들이 알았든 몰랐든 제한된 소수 여성에게만 찾아온 것이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결국,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대학가에서 탄생하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여성주의 운동은 단일한 총체가 아니다. 가령 서울대 인문대 카톡방 사건이나 고려대 카톡방 사건 등은 해당 학교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비판 대자보가 작성되었고, 강력한 항의가 들어왔으며 학생들이 조직한 위원회를 통해서 사건이 해결되었다. 이는 그 이전 여성주의 조직들 혹은 학생운동 조직들이 만들어낸 자치문화의 유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뉴스를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신문 사회면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대학의 불합리한 선후배 문화, 속칭 ‘똥군기’로 여겨지는 그런 기행들 말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이런 ‘똥군기’가 자연스러운 대학, 선배가 후배를 오밤중에 불러내 갈구는 대학들에는 어떤 종류의 ‘카톡방 사건들’이 있었을까? 필시 ‘SKY’, ‘인서울’ 대학이라고 칭해지는 곳들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사건의 수위도 더 강했을 것이다. 그 대학들에선 정말 서울대나 고려대의 ‘단톡방 성희롱’류 사건이 없었을까?
만화 [송곳]에서 주인공 이수인은 이런 질문을 한다.
“프랑스는 노조에 우호적인 사회라고 들었는데 우리 회사는 프랑스 회사에 점장도 프랑스인인데 왜 노조를 거부하는 걸까요?”
그러자 노무사 구고신은 이렇게 답한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서울대학교의 성추행 사건과 만화 [복학왕]에 나오는 기안대학교의 성추행 사건은 같은 성추행 사건이지만, 같은 성추행 사건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 운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소수자 운동이었다. 사회경제적 피라미드의 상층에 가깝고, 더 좋은 인적 네트워크와 사회자본에 접근 가능한 사람들은 연애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구직시장에서도 활약하며 ‘골드 미스’로 나아갔다. 젠더 문제에 깊은 관심 있는 이는 페미니스트가 되거나 여성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성주의 운동의 혜택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들이 대개 진출하는 2차 노동시장에서는 노골적인 성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다양한 종류의 성폭력에 직면했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온갖 종류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가장 불만이 큰 집단이 이를 해소할 어떤 창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불만을 대체 어디서 해소하느냐는 것이다.
두 갈래로 나뉜 ‘그녀들만의 상식’
여성주의자는 이 모순과 부조리를 페미니즘의 보급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서울대학교에서 페미니즘을 통해 자정작용과 자기 감시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지방의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학, 저임금 단기 계약직으로 표상되는 알바생의 노동 현장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페미니즘의 보급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페미니즘의 보급에 실패했다. 그 둘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이는 마치 미국 실리콘밸리의 고급 엔지니어가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과학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여성이 공유하는 ‘그녀들만의 상식’은 그래서 두 가지로 갈라졌다. 계층 막론하고 여성이라서 공유하는 지식이 배경에 깔렸지만, 그 위에서 사회 속의, 일상 속의 성차별과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공유지식은 달랐다.
유리천장을 바라보는 여성들은 사회적 공론화, 법적 대처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이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집합행동을 위한 공유지식이 된다. 반대로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바닥 위를 걷는 여성은 이를 알기 힘들었다. 이들도 데이트 폭력이나 직장 내 성희롱은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들에게도 진정한 ‘여성시대’가 찾아온다.
그 여성시대는 바로 인터넷에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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