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2017년 대한민국에서 페미니즘은 데일 만큼 뜨거운 주제입니다. 함부로 끼어들지 못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침묵합니다. 갈등은 대화를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가두는 증오와 편견만을 끝없이 잉태합니다. ‘젠더 전쟁’ 4부작을 통해 작은 대화의 공간이나마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연하게도 이 글 소재에 대한 다양한 보론과 비판 기고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box]
2015년과 2016년의 한국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이슈 중 하나로 ‘젠더 전쟁’이 들어가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2015년 메르스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메갈리아라고 하는 전투적인 여성집단을 만들어냈고, 이들을 둘러싼 단층선은 계속 확장하여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과 성우-웹툰 사태로 번져 심지어 원내 진보정당 하나까지도 극심한 분열을 겪게 했다.
이 문제에 관해 입을 여는 자는 모두 각자가 치르는 지하드의 전사들이 되어야만 했다. 여기서 지하드는 성전(聖戰)이면서 성전(性戰)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과 증오, 광기가 엿보일 정도로 서로 대립했다. 어느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서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주체인 메갈리아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한쪽에서 메갈리아는 젠더 권력에 균열을 낸, 이 나라 수천 년을 지배해온 가부장제에 당해온 피해자의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메갈리아는 이전부터 남성혐오를 일삼던 자들이 수면 위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떠오른, 구제할 수 없는 혐오의 채널이었다.
나는 이 두 설명 모두 현상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메갈리아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나는 역사적 접근법을 취하고자 한다. 이는 메갈리아를 둘러싼 젠더 전쟁의 기원을 추적하고, 그들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이 갈등의 해결방향을 제시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단서 정도는 제시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는 문제 인식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해결해야 하고, 해결하기 위해선 그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
1. 쌀의 저주, 성 불평등의 사회·경제적 조건
젠더 불평등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가부장제 집중한다. 가부장 중심주의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것을 사회구성원에게 내면화하고 남성은 그 구조 속에서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물론 가부장제는 젠더 불평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문화의 설명력을 그렇게 높게 보지 않는다. 문화는 어떠한 사회, 경제적 이익에 맞춘 조정의 결과물이지 그 역이 아니다. 문화는 거시적 사회변동에 일정 부분 경로 의존성을 부여해줄 수는 있어도, 그 변동을 큰 틀에서 막을 수는 없다.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을 맨박스에 가두는 가부장제 문화가 만연하다면 나는 그 사회의 조직방식과 재화의 생산 및 분배 양상을 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약화되었다면, 그것은 문화운동의 결과물보다는 문화운동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조건의 변화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한국의 성 불평등의 역사를 보자면 이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젠더 불평등은 농업에서부터 왔다.
완벽한 농업 국가
1953년에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한국은 인구 대다수가 농촌에 거주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던 완벽한 농업 국가였다. 전근대 농업 문명에서의 삶은 비참했지만, 여성의 삶은 특히 더 비참했다. 노동집약적인 농업노동에 끊임없이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여성은 인생 대부분을 아이를 낳는 데 바쳐야 했다. 특히 성인까지 자랄 수 있는 아이의 수가 보건 환경의 열악함으로 상당히 적었기에, 낳아야만 할 아이들의 수는 더 많았다.
거기에 더해서 여성은 막대한 양의 가사노동과 농업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게다가 농경사회에서는 대가족을 부양하고 어떻게라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 윗세대로부터 내려오는 자산과 정보가 필수적이었는데, 이것이 또 여성을 족쇄로 묶어냈다. 가산 문제가 이전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미약하게 존재했던 상속 문제를 본격적으로 부각했기 때문이다.
남성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식에게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가산을 물려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배우자 여성이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농업 문명의 남성은 여성을 정조라는 틀로 묶어두는 문화적 억압 전략을 보편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여성은 태어나서는 아버지의 노예로, 결혼해서는 남편의 노예로 살았으며, 늙어서는 아들의 통제하에 살아가야만 했다. 가장 큰 비극은 여성이 피해자 집단에서 시어머니라는 극악한 존재로 변신하여 가해자 집단에 가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성은 이런 상황을 참고 살 수밖에 없었다. 농업사회에서는 매춘을 제외하면 여성이 경쟁력 있게 활약할 수 있는 노동시장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기에 여성은 남성의 농업노동과 가부장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상류층 사회에서는 몇몇 여걸들이 등장하였지만, 인구 대다수는 남성이 요구하는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다.
가정 내에서 남편은 어찌 되었든 기근이나 다른 사회적 폭력에 대비한 안전망으로 기능했다. 그 남편이 이를 빌미로 여성을 폭력으로 얽어매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중에서도 다른 노동보다 훨씬 노동집약적인 논농사 지역이자 남성의 근력이 생산에서 더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쟁기 농업지대였던 한국은 다른 어떤 사회보다 여성에게 가혹했다. 여성에게는 그야말로 쌀의 저주였다.
20세기 후반, 급속한 산업화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한국 사회는 농업사회를 탈피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는 1970년까지만 해도 농업 인구는 약 45%였으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고소득 산업국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 한국은 근대 산업사회가 되었다. 산업사회는 여성에게 훨씬 더 평등한 삶을 보장해줄 수 있었다. 토지에서 해방된 인간들은 학교와 공장 등 산업 문명이 실시간으로 탄생하는 곳을 찾아 자신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떠났다.
더는 노동력 그 자체가 중요해지지 않게 되자 아이를 많이 낳을 필요도 없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성이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체성을 키워갔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학교에 가서 배우겠다고 나선 여성, 도시에서 혼자 살면서 성폭력과 온갖 차별을 감수하면서도 노동시장에 참여한 최초의 여성은 이 사회를 산업사회로 바꿔나간 최초의 전사들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였다는 점이다. 한국만큼 빠른 속도로 가장 극심한 농업사회에서 가장 번영하는 산업사회로 도약한 사례는 적어도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기적을 보는 것은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회는 100년 이상에 걸쳐 이루어낸 대전환을 한두 세대 만에 이루어내다 보니 한국 사회는 선진 사회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몇 배를 감수해야 했다.
젠더 문제는 이런 갈등의 첨단에 있었다. 농업사회의 성 불평등을 산업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던 기득권은 모든 변화에 지금은 생각도 못 한 수준으로 저항했다. 여성의 성은 정조라는 틀 안에서 무조건 억압되어야 했다. 가사 노동은 원래부터 ‘엄마’들이 하는 것이었지 그걸 남성과 나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한국이 급속하게 산업사회로 변했음에도 이런 구조가 유지될 수 있던 것은 기존 농업사회의 관념이 실제 가정 경제나 고용 형태 등 사회적 조직방식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빠른 경제성장에 힘입어 다수의 남성 가부장은 도시에서도 혼자서 아내와 두 자녀를 부양할 수 있었다. 이는 공장에 다니든 사무직으로 일하든 상관없는 문제였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살인적 노동시간을 견디며 독점적으로 가정에 돈을 벌어다 주는 한, 남성은 여전히 여성에 대해서 권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가부장제와 남성 우월주의라는 지배적 관념은 여전히 그 관념을 필요로 하는 사회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여성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권익을 신장했지만, 여전히 남성과 비교하면 ‘이등 시민’에 불과했다.
2. 남성의 몰락과 제1차 젠더 전쟁
하지만 결국 한국 사회는 산업사회로 이동 중이었다. 사실 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준 면이 컸다. 전 국민의 3분의 2가 도시에 살게 된 1980년 이후 태어난 사람들, 즉 온전한 산업시대의 사람들이 사회의 인력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 중 특히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기존의 고루한 ‘남존여비’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한국의 여성주의 운동을 조직했다. 하지만 여성주의 운동은 한국 사회가 거쳐 온 더 거시적인 변동의 일부에 불과했다. 산업구조와 고용 양태, 노동시장이 바뀌자 여성과 남성이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 자체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IMF와 ‘초라한 아버지’
90년대 이래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충분히 성숙하자 한국의 산업구조는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더하여 외환위기로 시작한 사회적 대변동의 여파로 다수 남성 노동력이 양극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실상 남성의 몰락이었다. 양극화 결과로 위에 올라선 사람보다 아래로 떨어진 이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IMF로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시장은 사회의 극히 한정된 영역으로 후퇴했다. 다수 남성은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어야만 했다. 출근하는 척하려고 양복을 입고 공원으로 나가는 모습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초라한 아버지’ 상은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외환 위기는 여성에게도 재앙이었다. 여성들은 외환위기 당시 남성보다 우선하여 해고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후 여성과 남성의 격차는 사회 전반적으로 볼 때는 줄어들었다. 고용관계가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으며, 승진 기회가 주어져 왔던 1차 노동시장에서 남성 노동력은 대거 정리되었다. 그 대신 남성은 불안정한 고용관계, 저임금, 내부노동시장의 부재를 특징으로 하는 2차 노동시장으로 대거 진입했다. 우리는 이 2차 노동시장의 인력을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노동시장에 진입한 여성들
몰락한 남성 가장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맞벌이 가구’가 확산했다. 많은 여성이 식당, 사회복지, 청소 노동을 비롯한 각종 저임금 서비스업 영역에 뛰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90년대 산업구조 변동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footnote]김영미, [성과 계급 : 분포적 접근으로 본 한국 성별 불평등의 구조 변동], 1983-2004[/footnote]
세계화와 기술혁명이 추동해낸 정규직 노동력의 퇴조는 남성들이 가정경제 내에서 절대적 지배권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소수의 고소득 전문직 남성이 아니고서야 그들은 가정경제 내에서 여성들과 경제권을 분담해야만 했다. 몇 가지 통계가 이 경향을 입증해준다. 1998년 전체 가구 중에서 남성 혼자서 생계를 부양하는 가구는 47.4%였고 맞벌이 가구는 31%였다. 2013년이 되자 두 가구의 비중은 각각 36%와 42.2%로 역전되었다. 90년대 말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던 이러한 변화는 IMF의 충격과 이어지는 2000년대의 사회변동과 맞물려 강화했고, 이제 전체 가구의 60%를 웃도는 가구에서 여성이 생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footnote]장지연, 전병유, ‘소득계층별 여성 취업의 변화: 배우자 소득 수준을 중심으로'[/footnote]
한편 여성의 전체 고용율은 IMF 전후와 현재까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나, 이 또한 청년실업의 만연과 청년층 인구비중의 감소로 인한 노동시장의 신규 진입자의 감소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성 단독으로는 가족 부양이 불가능해진 대다수 가구의 중년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신규 진입자 감소분을 벌충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footnote] 이에스더의 ‘성인자녀가 중년여성의 노동공급에 미치는 영향’은 여성의 노동시장 재참여가 20대 자녀의 미취업 상태로 인한 경제적 불안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한편 금재호와 윤자영의 ‘외환위기 이후 여성노동시장의 변화와 정책과제’는 배우자의 임금 수준에 따라 여성 노동자의 참여 수준이 차이가 난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이 가정은 이 두 연구에 근거한 것이다.[/footnote]
기성세대의 노동시장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자녀 세대는 한국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젠더 운동을 만들어냈다. 이는 뒤이어 이어질 인터넷상의 기나긴 젠더 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최초의 발단은 대학가에서 산업사회 여성이 부상함으로써 만들어진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산업사회의 개명된 여성들은 농업사회의 가치를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담배를 피워 윗세대는 물론 같은 세대 남성도 경악하게 했다. 너희도 하는데 우리가 안 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대체로 여성의 제한적 상승과 남성의 극적 몰락이 빚어낸 결과이긴 했지만, 대한민국 사회는 성 평등으로 점차 이동 중이었다.
산업사회 신여성 vs. 산업사회 구남성
하지만 새로이 진입한 산업사회 세대는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사회 남성도 진입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동료인 산업사회 여성과는 사뭇 다른 존재들이었다. 산업사회 여성이 본격적인 산업사회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면, 그 거울 쌍처럼 산업사회 남성은 여러모로 농업 문명의 마지막 잔재와 다름없었다.
80년대~90년대 세대의 성비가 이를 증명한다. 초음파 검사를 통해 성별을 감별해낼 수 있게 된 농경 시대의 부모들은 그들의 남존여비 사상을 가감 없이, 놀랍도록 잔인하게 드러내었다. 여아에 대한 집단적 낙태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세대 한국 남성과 여성들은 성비 불균형이라는 그들 부모 세대의 짐을 떠안게 되었다. 당연히 이들은 애지중지 만들어낸 자기 아들을 산업사회의 가치가 아닌 농경사회의 가치로 키워내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농업시대의 문화적 관성에 젖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이 시대의 본격적인 젠더 전쟁이 시작된다.
노동시장과 연애시장
새로운 사회환경과 경제적 권력 구도 변화에 여성들이 빨리 적응한 것처럼, 농경사회의 마지막 남성들은 2000년대 초반 그들이 처한 여러 사회적 현실을 보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첫째로 그들이 본 것은 변화를 겪고 있던, 즉 자신들이 곧 참여해야 했던 노동시장이었다. 이들은 많은 유능한 여성이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본 첫 세대였다.
비록 통계적으로 전체 여성이 여전히 임금, 그리고 고용 안정성에서 남성과 격차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이미 남녀평등의 유토피아였다. 정작 본인은 이제 취업도 어려워졌고,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에 대한 우월적 지위가 확보되지는 않는다는 것에 적응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와 어머니 세대가 살아온 것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해야만 했던, 남성의 몰락과 여성의 (제한적) 상승을 고통스럽게 수긍해야만 했다.
둘째로 그들은 연애시장을 보게 되었다. 앞서 말한 성비 문제와 여성의 역량 신장은 연애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여성이 구태여 남성에 의존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자, 그리고 같은 세대 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지자 희소성이 높은 여성은 연애시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연애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남성들은 원활하게 연애하였고 마음에 드는 여성을 선택할 수 있었으나, 많은 남성은 1:1로 남녀를 매칭한다고 해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은 단순히 일자리를 얻게 되면 선을 봐서 결혼하는 세대가 아니었다. 연애시장에서 수요자의 수요에 맞춰 자신을 팔아야 하는 판매자가 되었다.
이 경우 마지막 농업사회, 그리고 최초의 산업사회 남성의 합리적 선택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인정하고 여성의 선호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겠다. 하지만 그들은 농업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었던 남성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싶지도 않았고, 여성이 우월적 지위를 조금이라도 확보해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제1차 젠더 전쟁
사실 이런 변화는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거시적 변화와 맞물린 것이었다. 세계화와 기술 혁명은 대다수 선진국 노동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한국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육체노동을 기반으로 한 숙련기술은 더는 중산층의 소득을 자동으로 보장해주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는 IMF로 인한 구조개편 압력을 제일 적게 받은 공무원이 엄청나게 매력적인 일자리로 떠올랐다. 공무원이 중요한 일자리로 떠오른 것은 숙련노동 몰락의 결과였고,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몰락, 공정하게 말하자면 남성이 여성과의 경쟁 압력에 훨씬 심하게 노출되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는 남성들이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내가 제1차 젠더 전쟁이라고 칭하는 사회 현상, 군 가산점 위헌 판결을 둘러싸고 온라인에서 대규모로 촉발된 젠더 간의 갈등은 당시의 산업구조와 노동시장 내부의 변화상을 그 배경으로 한다. 야만적인 군대의 인권유린으로 생긴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90년대부터 누적되어 온 한국의 사회변동으로 초래된 긴장을 갈등으로 바꿔주는 일종의 방아쇠였다. 그 이전의 군대는 훨씬 더 끔찍했는데 왜 그 이전에는 군대로 인한 피해의식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공무원 가산점에 목숨 거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는가? 그 때는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남성과 파이를 나누어야 하는 진지한 경쟁자로 여겨지지도 않았으며 공무원이 매력적인 일자리로 여겨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일부(?) 남성이 보기에 여성은 지나치게 긴 출산휴가와 근거 없는 생리휴가와 같은 식의 비양심적인 ‘특혜’를 받고 있었고(그것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일단 별론으로), 이미 여성의 능력은 자신들과 경쟁하기에 충분히 넘치고도 남게 보였다. 반면 2년의 세월을 그대로 허비하는 것으로 모자라 야만적 폭력에까지 노출되어야 하는 군 복무라는 페널티는 남성들에게 재앙처럼 보였다. 군 복무는 물론 인생에서 겪는 재앙이 맞았다. 하지만 여성들이 그 재앙에 대한 보상을 앗아갔다는 피해의식과 분노 또한 엄습했다. 이 점이 문제였다. 여전히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차별받았고,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성폭행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심리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을 느끼는 남성들에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받아온 차별에 비하면 차별도 아닌 것에 분노하는 여성들이 들어왔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이 바라보는 여성은 2년의 군 생활에 대한 공정한 보상에 분개하는 양심도 없는 이들이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위기의식과 분노는 여러분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왜냐면 이 시기 김대중 정부가 만들어놓은 정보고속도로 덕분에, 다시 말해 인터넷 네트워크가(역설적으로 숙련노동 시장을 파괴한 그 기술) 젊은 세대 모두에게 담론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데 엄청나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군 가산점 문제를 둘러싼 제1차 젠더 전쟁이 발발했고, 당시 인터넷을 하는 모든 세대는 이 전쟁에 영향받았다.
3. 제2전선: 연애시장
그와 동시에 제1차 젠더 전쟁은 두 번째 문제인 연애시장 문제로 확산되었다. 이는 한국의 젠더 담론을 풍미한 ‘된장녀’라는 전설적인 단어가 등장하며 그 절정에 달했다. 데이트 비용과 더치페이 문제도 이 시기부터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 보기엔 우스꽝스럽게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 허세인지 아닌지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
연애시장 전선에서도 문제는 간단했다. 이제 남성과 여성의 처지가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대체 남성이 뭐가 우월하느냐는 것이었다. 왜 남성이 돈을 더 내야만 하는가? 그리고 왜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는 메뉴판을 보면서 어렵게 커피를 주문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노동시장은 명백히 여성에게 불리한 공간이었다. 단지 남성이 몰락한 하락 폭이 엄청났기에 여성의 제한적 상승이 더 크게 보인 것에 불과했다. 즉, 노동시장에 있어서 남성의 피해의식은 착시현상이었다.
여성의 상대적 우위, 연애시장
하지만 연애시장은 노동시장보다 더 극적이었다. 연애시장에서 남성의 항변은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 열위에 있던 노동시장과 달리 연애시장에서 여성은 비교적 대등한 지위를, 때로는 상대적 우위까지도 누릴 수 있었다. 불균형한 성비로 발생한 여성의 희소성은 연애시장에서 선택권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 소득이 비슷하다면 더치페이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연애시장의 논리로만 보자면 여성은 그저 돈을 흔쾌히 내겠다는 남성을 자기가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편적인 연애의 문법이었다.
여성이 자신의 주도권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자, 연애와 관련된 여러 갈등 양상이 성 대립 구도로 나타났다. 각 행위자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시장 지위를 적절히 활용하는 법을 배워갔다. 그런 시행착오 과정에서 여성에게 맞춰야 할 남성의 (사견을 달자면, 상당히 당연한) 부담이 생긴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인터넷을 통해 연애 상황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동성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로맨스를 소재로 한 네이버 웹툰 등지의 댓글난은 연애의 특정 국면에서의 갈등의 책임 소지가 남자에게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로 오늘도 답 없는 논쟁이 계속되는데, 이는 이런 문화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루저의 난
그중에서도 세일즈맨의 위치에 새로 서야 했던 남성은 자신이 연애시장에서 여성에 의해 객체화되고 대상화된다는 것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다. 소위 ‘루저녀’ 사건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키가 180cm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말이 도덕적으로 옳은 발언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학생의 취업까지 막힐 정도로 다수 남자가 분노한 것은 단순히 보편도덕을 위배한 것에 대한 처벌 목적을 뛰어넘는 무언가였다. 그건 연애시장에서 자신을 판매하기 위해 상대방 요구에 맞춰 평가체계에 처음으로 노출되는, 여성의 상품화와 마찬가지로, ‘남성의 상품화’ 목전에 선 남성의 공포와 분노였다.
이런 맥락으로 미루어보면, 당연하게도, 소위 여성 혐오적 발언을 내뱉고 그런 컨텐츠를 생산하는 남성은 대개 진심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이들은 아니다. 그들은 연애시장에서 객체화하고, 더 나아가 탈락하는 패배자가 되기 싫은 나약한 존재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한편에서 그들은 연애 상대방에 대해서 온전히 통제권을 확보하고 싶은 농경 문화의 마지막 잔재일 수도 있다.
한 ‘여혐 장인’의 공포와 열망
내가 활동했던 인터넷 카페에 ‘여혐 장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사람이 하나 기억난다. 그가 퍼오는 게시글의 반은 무개념 ‘김치녀’를 질타하기 좋은 에피소드들이었다. 남성을 유혹해 그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고, 어머니 세대의 희생과 헌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정조 관념이 없고 권리만 원하지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말종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토로하는 것이 그 사람이 하는 인터넷 활동의 절반이었다.
재밌던 건 나머지 반은 아름다운 모델, 혹은 길거리 미인, 그리고 AV 배우의 화보를 모아놓은 게시글이었다는 점이다. 이 또한 안정된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길이 점차 좁아지는 시대적 경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연애와 결혼을 위해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은 점차 높아지고, 그것에 자신을 고통스럽게 맞추어야만 하지만, 언제든지 그런 계약관계 따위는 파기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여성혐오 게시물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그렇게 제1차 젠더 전쟁은 결국 남성연대와 성재기를 거쳐 김치녀 담론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제1차 젠더 전쟁이라고 임의로 붙이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온전한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인터넷에 여성보다 빨리 진출했던 남성들은 즉시 여성에 대한 그들의 피해의식을 성토하기 시작했고, 이는 분노한 남자의 일방적 메아리였을 뿐이다. 여전히 인터넷 담론 지형은 남성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밀물이 모든 배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정보혁명은 남성만 인터넷에 불러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곧이어 여성이 인터넷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이 인터넷에 대거 등장한 여성들은 이 글의 서두에 언급된 진짜 젠더 전쟁, ‘제2차 젠더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계속)
3 댓글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