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서울비 님이 학교에서 느낀 하루하루의 깨달음, 학생들과 함께 배워가는 그 시간과 풍경을 ‘학교 이야기’에 담습니다. (편집자)[/box]
“(관계지향성) 다른 학급 친구가 아이스크림을 자신의 교복에 쏟아버렸을 때 휴지로 직접 닦아줌.”
– 한 학생의 ‘생활기록부’ 중에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는 대학 입시에 직접 활용되는 중요한 서류입니다.
대학에서는 지원하는 학생의 학교생활을 상세히 볼 수 있다며 “학생부 종합 전형”을 확대하고 있는 가운데, 모 입시정보 사이트에서는 학부모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하라는 차원에서 세세한 항목들과 항목별 분량, 요령까지 정리해서 올리고 있지요.
이 와중에 학생부라는 상자에 그럴듯한 ‘스펙’과 진로 탐색 흔적을 잘 포장해서 양도 푸짐하게 담아주는 학교는 좋은 학교가 되고, 그렇지 못한 학교는 능력이 없거나 방만한 학교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학생들의 학생부를 입학 전형 과정에서 아주 많이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학교 역량에 따라 똑같은 학생의 경험이 풍부하게 또는 빈약하게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 맞습니다.
‘나의 진가’ 담긴 생활기록부…?
여러분은 나의 진가를 알아주고 꼼꼼하게 지도하고 멋지게 나에 대한 써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가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선생님께는 정신 차리고 나에 관하여 더 많은 내용을 기재하라고 압박해야 나중에 손해 보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비껴나 이런 과열된 분위기 이면에 학생부의 칸 나눔이 일조한 건 아닌지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항목으로 적도록 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면, 이 난리 통의 방향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보면 회의가 밀려옵니다.
가령 아이들의 인품에 대한 담임 선생님의 의견을 ‘(관계지향성)’, ‘(배려)’, ‘(나눔)’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서 구체적으로 적시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누가 자식을 키울 때 항목별로 특성을 고양하기 위해 계획을 짜나요? 피파 축구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아이들을 5각형에 집어넣어 평가해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구체적 칼날 앞에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들어갈 공간은 없습니다.
친구 샤프심 때문에 문방구 갔다 온 아이
다시 위의 인용 문구를 봅니다. 어떤 학생이 들려준 이 사례를 관계지향성 항목에 써주어도 좋을까요? 관계지향성은 무엇이기에 하나의 항목으로 분리되나요? 저는 이 학생에 관해 다른 학생에게도 물었는데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정의롭고 약자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또 사회에 관심이 많다. 논문을 쓰는데 정책이나 정치 같은 데에 비판의식을 가진다.”
그런데 정작 왜 본인은 멋있는 말을 두고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제게 들려주는 걸까요?
작년에는 샤프심이 없어서 대신 외출을 받아 친구의 샤프심을 사 준 이야기를 생활기록부의 학교생활 사례에 언급해달라는 아이가 있었죠. 웃고 넘어갈 에피소드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온종일 이 예쁜 아이들과 학교에서 먹고 사는 저는 아이스크림을 닦아주고, 미드에 푹 빠져서 잘생긴 배우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원피스를 챙겨 보고, 고작 친구의 샤프심 하나 때문에 점심시간에 문방구에 뛰어다녀오는 모습이 그 아이들을 더 잘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 사회에 관심이 있다. 논문을 쓰는데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멋있는 설명’보다도 말이죠.
생활기록부에 아이스크림 이야기는 얼마나 있을까?
만약 올해 유명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의 생활기록부를 입수하여 그 아이들의 “행동특성” 칸을 읽어본다면, 아이스크림 이야기는 얼마나 있을까요? 정치인들에게보다는 아이스크림을 닦아주며 그로부터 배우고 성장한 아이들이었는데 말이에요.
누가 생활기록부에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쓰는 게 창피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애인을 사귈 때는 항목별로 검토하지 않으면서 결혼 중개업소처럼 아이들의 됨됨이를 항목화하고 있는 걸까요?
사진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장 내 말 한 마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한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 해적에게 잡혀 눈이 가려진 채, 선상 끄트머리로 걸어가며 당장에라도 ‘멈춰’ 하는 말이 떨어지길 애원하는 선원의 심정이랄까.
– 필립 퍼키스, “책을 펴내며”, [사진강의 노트], 안목, 2011년.
대학에서도 평가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지 않을까요?
만약 됨됨이를 항목별로 객관적으로 적지 않고 선생님이 느끼는 그 아이에 대해서 생기부에 기록한다면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신과 더 친한 학생, 음료수 하나라도 더 챙겨준 학생을 더 좋게 생각할 수 밖에 없겠죠. 결국 그렇게 하는 것도 비합리적인 평가라고 생각해요. 검증된 행위로만 학생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