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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거나 뻔뻔하거나: 중앙일보는 다시 답하라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이하 ‘이진주’)가 자신이 10년 전 쓴 기사들에 관해 토로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글은 ‘사과문’의 형식을 띠었고, 사과문으로 불렸지만, 나는 이진주가 쓴 글이 사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다만 편의상 이 글에서는 ‘사과문’으로 표현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이진주 전 기자의 글 (클릭하면 펼쳐집니다)

이진주 전 기자의 글을 우선 직접 독자가 읽고 판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해당 게시물이 올려진 플랫폼(페이스북)의 성격상 수정·삭제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이에 이진주 전 기자의 글 전문을 최대한 옮깁니다. 다만, 이 사안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특정한 인물 언급한 도입 부분은 제외했습니다. (편집자)

이진주 7월 4일 오전 2:16

십 년 전 저는 중앙일보 기자였습니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서 시위대 반대편에 서고, 용산 참사 유족 분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노건호 씨를 취재했습니다.

나이 서른에, 메이저 언론사로는 아마도 처음으로 애엄마 수습기자로 들어가, 조직에 충성하고 선배들의 사랑을 받고자, 제 손에 여러 번 피를 묻혔습니다.

죄송합니다.

*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분노해서 시위대는 거리로 나왔습니다. 성난 시민들이 “조중동 아웃” “개와 조중동은 출입금지”를 외치던 2008년 초,

저는 중앙일보 44기 공채 기자로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하나 낳고 나이까지 서른이 꽉 차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었기에, 저를 뽑아준 조직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지금은 “기레기”라고 싸잡아 욕을 먹지만, 사실은 선배들도 동료들도 정말 좋았습니다. 삼성도 다녀보고, 국회도 구경했으나, 그처럼 우아하고 유능하며 지적인 이들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직을 믿고, 사람들을 믿었습니다.

성난 시위대 속에서 동기들이 고립되고, 매일 밤 거리에서 날 선 말들이 오갈 때, 일개 수습기자의 노트북 가방을 짊어지고 함께 취재에 나선 데스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 취한 시위대가 어린 기자들을 향해 소리지르면, “잘못했다” “죄송하다”고 대신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나왔습니다.

아직까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어린 것들이, 조직의 이름 때문에 한꺼번에 싸잡아 욕먹을 때는, 저희도 조금은 억울했습니다.

저희는 단지, 시험을 봐서 회사에 들어간 것뿐인데. 개중에는 시를 쓰는 친구도 있었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친구도 있었고, 그저 안정된 직장이 필요한 친구도 있었는데요. “왜 우리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느냐” “왜 대화의 기회조차 주지 않느냐”고 항변하려 들 때마다 그 데스크는 우리를 달래 끌고 나왔습니다.

“다치면 안돼. 여기서 누구도 다치면 안된다.”

그는 한 때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이였습니다. 누구보다 우직하게 조직에 충성했지만,”업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앵커를 했고, 지금은 아주 뜨거운 현역에서는 물러났습니다.

일년에 한 번이나 연락을 드릴까 말까 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 밤 그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고등학생 시위대라는 어린 친구들과 촛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새벽까지 토론을 했습니다. 어차피 집에는 못가고, 남대문경찰서 기자실은 돼지우리고, 저는 사우나 티켓을 끊어 겨우 씻던 시절입니다.

그 중 유독 이론이 풍부하고 화술이 대범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헤어질 무렵, 그 친구가 제게 “고백할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 이념 동아리에서 나온 친구였습니다.

당혹감이 지나간 뒤에는 배반감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지, 왜 했을까.”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고민하다 당시 시경 캡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역시 제가 신뢰하고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캡이라는 위치는 현장의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모아 선별하고 아젠다를 만드는 역을 했습니다. 조중동 데스크였던 그는 제게 “쓰지 말자.”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이걸 쓰면, 너무 많은 어린 친구들이 다친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기레기라고 비난받는 걸 보며, 그래도 누구 한 사람은 변호를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아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쭉 기레기인 사람은 오히려 드물 겁니다. 그는 제게 좋은 기자였습니다. 연락도 한 번 못해 보고, 개인의 능력이나 성정을 뛰어넘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만 여겼습니다.

수습을 시작하고 조금 지나 저에게는 경찰과 시위대의 정보가 동시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과는 유독 다른, 기이한 어떤 특성이란 게 있을 텐데요, 제게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상반된 성향의 사람들이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종류의 재능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보거나 들으려 하는 게 아닌데, 어쩌면 그것은 무당과도 비슷한 일일 겝니다.

그렇게 지위고하를 막론한 양측의 핵심 정보원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를 그러쥐고 있으면, 때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이중간첩 같은 심정이 되곤 했습니다.

사실은 제 존재부터가 그랬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온갖 것들이 뒤섞인 “키메라”라고, 정체를 모르는 “혼종”에 “잡종”이라고, 오래 생각해왔습니다.

*

저는 결혼을 통해 상위 중산층의 삶으로 본격적으로 편입했으나, 사실은 공부만 잘하는 “천출”이었고, 사춘기 시절 기생충의 “반지하방”을 오래 경험했으니 “로얄” 같은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조중동 기자가 되기 전에는 꼴보수 아버지를 뺀 온 가족이 “노빠”였습니다. 저는 노무현 탄핵에 폭주해 대학원을 작파하고 열린우리당 대변인실에 들어간 뒤, 총선 승리를 지켜보곤 미련 없이 물러나와 석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중산층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전라도 광주의 가난한 정치 낭인의 딸이었고, 무학에다, 교사에 의한 미성년 성폭력의 생존자이기도 했습니다.

외가는 당연히 모두가 김대중의 사람들이었고, 저도 자연스럽게 노무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 “근본 없음”이 닮았으니까요. 제 외사촌 오라비는 노무현 당시 최연소 청와대 행정관이었고, 지금도 정권 실세 누군가의 친구라고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로얄로 신분 상승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력서에 올라가거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펙들은, 저의 본질을, 비밀을, 우울을, 그림자를, 그러니까 달의 뒷면을, 섬세하게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늘 무언가를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는 듯,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때론 지주보다 더한 마름처럼 앞장서 위악을 떨기도 했습니다.

진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 건, 마흔을 넘겨 불과 얼마 전부터의 일입니다. 제 마음이 부대껴 더는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근본을, 제 계급을, 제 자신을 배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씻을 수 없는 업보가 되었습니다.

*

용산의 정보를 받은 것은 한 형사로부터였습니다.

저는 사람의 목숨값을 돈으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게 어느 쪽에서 어떤 목적으로 생산된 정보인지를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지면 판형을 바꾸고 특종 한 방을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좋아하고 따르는 워킹맘 선배들이 아름다운 교육정책 기사를 기획했지만, 조직은 스트레이트를 원했습니다.

그때 데스크는 아까와는 다른 분이었는데요, 저는 그 데스크를 인간적으로 좋아했습니다. 그가 기죽어 있는 게 싫었습니다. 저를 신뢰하는 그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용산의 비극을 쓰면서는 다시금 분열을 느꼈습니다. 저희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편 중에는 개포동 구룡마을의 “하꼬방”이 있었습니다. 재개발이란 말을 듣자마자 어쩔 수 없이 그 시절이 떠올라 괴로워졌습니다.

그 때 저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엄마는 무리를 해서 저와 동생을 영어 수학 보습학원에 보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학원 차가 구룡마을까지 들어오는 게 끔찍하게 싫었지만, 엄마는 그런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실용적이고 안전하게 다니는 걸 바랐을 뿐.

별 같은 눈빛을 가진 남자아이가 저를 위해서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던 저녁이었습니다.

허름하고 다닥다닥한 “난쟁이”들의 집에, 학원 차가 우리 남매를 내려놓자, 남자아이 하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쳤습니다.

“허, 진주 너 여기 살았어? 공주인 줄 알았는데 그지였구나.”

저는 그 때 제 동생을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응, 나 여기 살아. 그래서 뭐? 우리 집안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너희 집안은 너로 인해 끝날 거야. 똑똑히 기억해 두길 바래.”

그리고는 더 이상 그 학원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별 같은 눈의 소년은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용산의 기사가 나간 뒤, 유족들의 편에 섰던 대학 선배 하나가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조각 같은 미모로 유명했던 법대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어 탄성과 비아냥을 동시에 받는 종류의 사람이었고요.

사시를 보지 않고 여태 빈민운동을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박하게 나이들었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제게 짧게 물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었습니다만, 사과할 때를 놓쳤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용산의 비극을 다룬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읽고, 온통 불에 타는 악몽을 꾸며, 다시금 알았습니다. 이 손이 쓰지 말아야 할 것을 썼다는 것을.

며칠 전, 그 트라우마로 돌아가신 분의 기사를 읽고 다시금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습니다.

*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일부가 된 건,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하느님의 실수 같습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돌이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일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십 년이 되어도 이 일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평생 그럴 겁니다.

어느 날, 데스크가 말했습니다.

“지금 당장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

가방에는 여권이 있었고, 저는 일을 잘했고, 모든 것이 남들보다 조금씩 빨랐습니다. 저보다 훨씬 유능했던 선배도 구하지 못했다는 표를 구하고, 남편과 아이에게는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아침에 출근했던 그 차림으로 건너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메일이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노건호 씨를 취재하라”고.

제게는 마침 스탠포드의 친구들이 있었고, LG의 친구들이 있었고, 국정원과 검찰과 경찰의 모든 곳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저밖에는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저를 아끼던 데스크가 만약에 진짜 제 모습을 알았다면, 결코 시키지 않았을 일이었기도 했습니다.

팔로알토에서 저는 서른 명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노건호 씨의 집, 회사, 자동차, 투자, 여행, 골프 모든 사소한 것들을 탈탈 털어 말해주었습니다. 언제 어느 비행기를 타고 누구와 어디를 다녀왔는지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한때 대통령의 아들과 다투어 어울렸던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모두 다 말씀드릴게요. 제 이름은 빼주세요. 사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망하고도 슬펐습니다. 사자의 새끼가 고작 이런 자들과 어울렸다니. 그의 아비는 우리 가족의, 저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의, 우상이었는데, 그를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아 참담했습니다.

술에 취한 그의 아들을 인터뷰하고, 며느리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사가 나갈 때마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로 불이 났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은 타사의 선배와 동료들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진보 거물 기자 하나는 “휴, 잘했다.”라며 비난, 격려, 아쉬움, 안타까움,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한숨을 쉬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숭배하는 꼴보수 아버지가, 어느 날 미국까지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거, 그만 해라. 시골서 밀짚모자 쓰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 보기 좋더라. 이제 그만 해라.”

“아버지, 알아요. 근데 멈출 수가 없어요. 제가 막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전화기를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그 집이 그다지 비싼 집이 아니고, 그 자동차가 그렇게 비싼 차가 아니며, 그 골프장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란 건 저도 알고 저의 데스크들도 모두 알았습니다만, 어찌 됐든 기사는 그렇게 나갔습니다.

제가 쓴 것들과 제가 쓰지 않은 것들로 세상의 모든 비난을 들었습니다. 목숨까지 위협받을 때, 친구들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진주야, 제발 네가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해.”

“내가 댓글을 달까? 너 그런 사람 아니라고 내가 댓글을 달까?”

그 때 저는 말했습니다.

“아냐, 내 이름이니까, 내가 함부로 내 이름을 빌려주었으니까, 대가를 치를게. 괜찮아. 너까지 다치지 말고, 그냥 내가 다 받을게.”

그 때도 우리 선배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직은 사람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진보는 부패의 크기가 아니라, 부패했다는 사실 자체로 무너진다.”

그 말들이 우리를 움직였습니다. 조직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지향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저는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어느 날, 그의 며느리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을 적은, 익명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선배들은 무시하라고 충고했습니다. 몇 번은 침묵했지만 저는 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하다고, 정말 죄송하다고. 저도 유산을 하였다고.

그 계정으로 다시는 메일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하혈이라고만 밝혀왔지만, 그 때 저는 아마도 아이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한 달 내내 하혈을 하면서 아이가 사라진 것을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제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참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퇴사를 고하고 한 달 동안 집에 누워있는데, 매일처럼 저희 집에 들러 죽을 사주며 함께 울었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죽어버릴까 봐, 데스크가 선배를 저희 집으로 출근시켰던 겁니다. 그 선배가 요즘 그럽니다.

“진주씨, 십 년 전이랑 똑같구나. 내가 죽 사주고 싶다.”

저는 온 국민의 우상을 제 손으로 무너뜨렸고, 매일, 매순간, 그의 죽음을 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제 손에 묻은 피를 다 닦아내지 못할 것을 압니다. 몇 번 이 일을 고백한 바 있지만, 평생 동안 몇 번이고 계속해서 사죄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서른 살의 죄가 마흔 살의 죄로 다시 돌아온 지금, 그 죄를 부인할 마음은 없습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역사의 죄인이며, 그 트라우마를 안고 어떤 방법으로든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

시간이 흘러 조직을 떠나고 보니, 조금 더 선명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기사를 쓰는 일부 후배 기자들을 볼 때 저는 안타까웠습니다. 시를 쓰고, 세상을 바꾸고 싶고, 그저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은 어린 친구들이, 조직 속에서, 조직의 좋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죄를 지을 때, 십 년 뒤 저 죄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만큼은 아니어도, 평생 그 이름과 살아가야 하는 친구들 때문에 슬펐습니다. 그들은 꼭 과거의 저 같았기 때문입니다.

노회찬 때도, 김용균 때도 그랬습니다. 슬펐습니다.

그 때도 제 미래를 조금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판사 한 분이 저를 불러 말씀하셨죠.

“앞장 서 칼을 휘두르다 화살받이가 되지 마세요. 로얄들은 손에 피 안 묻혀요. 어쩌려고 그래요?”

*

광우병과 용산과 노무현을 거치며, 사람이란 얼마나 모순적이고 오류가 많으며, 가슴 아픈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 죄가 얼마나 큰지도 새록새록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조직 때문에, 사람 때문에, 스스로에게 거슬리는 일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저는 교사에 의한 성폭력 생존자의 딸이어서, 이 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웅크려 유예된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제대로 된 사과를 위해선 최소한 아래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 수치심 표명과 사죄: 우선, 사과하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관한 수치심을 표명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명확하게 표시해야 한다. 그것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최소한이다.
  2. 잘못된 행위의 폭로: 더불어 누가 언제 어디서 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는지 그 행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사죄하기 위해선 그 사죄가 도달해야 할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고, 잘못된 행위가 특정되어야 하며, 그 행위의 책임자들이 특정되어야 한다. 잘못된 행위의 정체가 무엇인지 끝까지 응시하고, 자신이 아는 최대한을 객관적으로 밝혀야 한다.
  3. 약속과 다짐(재발방지): 그 잘못된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약속하고 다짐하며 함께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개 사과의 기술]의 저자 바티스텔라 교수는 ‘완전한 형태의 사과’를 위한 다섯 가지 요소를 함축적으로 지적한다(참조: 새알밭, 박근혜의 두 번째 사과와 ‘공개 사과의 기술’에서 재인용).

ㅇㄴㄴ

  1. 사과하는 이의 수치심과 유감 표명
  2. 특정한 규칙 위반의 인정과 그에 따른 비판 수용
  3. 잘못된 행위의 명시적 인정과 자책
  4. 앞으로 바른 행동을 하겠다는 약속
  5. 그리고 속죄와 배상 제시

이진주의 사과문 혹은 반성문에는 이 요소들이 전혀 혹은 거의 없거나 최소한 다른 것들로 가려져 있다.

인간과 캐릭터 

이진주의 사과문에는 수치심과 사죄의 표현도 없고(있더라도 다른 장식적인 요소에 의해 가려져 있고), 잘못된 행위의 구체적인 폭로도 없으며, 그 잘못된 일이 만들어진 구조와 관련 책임자에 대한 성찰이나 자각도 없다. 잘못된 일에 책임이 있는 관련자들(‘선배’와 ‘데스크’로 표현되는)은 모두 ‘좋은 사람’이고, 자신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불행한 초년병 기자일 뿐이다.

이진주의 글에는 스스로 고통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인간’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비극의 주인공과 같은, 어떤 가련하고 그래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가 보인다. 그 캐릭터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속한 매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건 속에 휘말리는 비극적 존재로 묘사된다. 그래서 나에게 이진주의 글은 사과문이라기보다는 사과문의 형식을 띤 논픽션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이진주의 글이 재현하는 건 잘못된 일이나 그 잘못된 행위를 집행한 개인과 집단의 구조, 그 정체가 아니다. 그로 인해 죽을만큼 고통받은 피해자들도 아니다. 고통스럽고 혹독한 자기 반성의 과정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아닌 채로 그 사과문에 남은 건 운명적으로 혹독한 사건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비극적 ‘캐릭터’ 이진주 자신이다.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 (출처: 걸스로봇) https://www.facebook.com/GirlsRobot/photos/a.1522350701425120/2315779672082215/?type=3&theater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 (출처: 걸스로봇)

슬픔이나 고통이 악세사리가 되어선 안 된다. 그 슬픔과 고통이 역사적인 거짓을 조장한 저널리즘의 치욕스런 기록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이어야 하고, 그 행위와 책임자는 폭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피해자에게는 최소한의 보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게 반성이다.

‘작문’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이진주 기자의 글이 ‘기술적으로 아주 잘 구성된’ 글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수사적인 현란함과 극적 구성이 넘쳐난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까지 쓸 수 있는지 사실 좀 놀랐다. 하지만 이건 내 ‘느낌’이고, ‘해석’에 불과하다. 이진주 사과문을 진심어린 사과로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나는 그 마음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것이 선한 의지에 바탕한 것으로 믿는다. 다만, 나는 이진주 사과문에서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내 나름으로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반성과 성찰은 글쓰는 사람에게는 가장 기본에 속한 덕목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는 드물게 발견하는 보석같은 재능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실천하는 지성으로 불렸던 고 부르디외의 마지막 강의가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부르디외 자기 자신’이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상징 권력을 획득한 사회적 상징자본가들. 그 상징은 그들에게는 자본이고, 권력이며, 출세의 수단이다. 그들의 이미지와 권력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해체되고 분석되며 다시 맥락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저널리즘은 말할 것도 없다.

이진주의 사과문에 있는 건 슬픔과 고통의 '정체'(책임)이 아니라 그 고통과 슬픔으로 장식된 어떤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드라마틱한 자기합리화다.

이진주의 사과문에 있는 건 슬픔과 고통의 ‘정체'(책임)가 아니라 그 고통과 슬픔으로 장식된 어떤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드라마틱한 자기합리화다.

중앙일보의 입장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렇게나마 ‘사과 비슷한 무엇’을 고백하는 일마저 우리나라 저널리즘 환경에서는 귀하다는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 악질적이고, 더 위선적인 ‘쓰레기 기사’들을 썼던 기자들, 쓰게 한 데스크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산다. 그리고 어쩌면 정권의 부침에 따라 신분 세탁을 위한 알리바이를 모색하거나 잠시 숨을 고르고, ‘다른 정권의 도래’를 위한 시나리오를 준비 중일지도 모른다.

이진주에게 사과문을 쓰게 계기는 지난 6월 24일에 숨진채 발견된 용산참사 철거민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계기로 촉발된 사과문인지는 몰라도, 이진주의 사과문은 결과적으로 그 의미를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진주의 사과문은, 최소한, 중앙일보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중앙일보의 ‘입장’이 좀 이상하다.

중앙일보

중앙일보는 이진주의 사과문에 관해 이런 ‘입장’을 밝혔다.

[알려드립니다]이진주 전 기자 글 관련 중앙일보 입장

이진주 전 중앙일보 기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과거 자신이 작성한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관련 기사들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이를 일부 언론이 인용 보도하는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유포되고 있습니다. 본지가 당시 중앙일보 간부와 데스크들에게 확인한 결과 당시 보도가 허위기사였다는 등의 일부 언론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용산참사 등 허위기사 의혹 보도 사실무근

1. 일부 언론은 이 전 기자의 용산참사 관련 보도가 허위보도였다고 보도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 전 기자의 페이스북 글에도 용산참사 관련 보도가 허위 보도였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2. 일부 언론은 이 전 기자가 작성한 노건호씨 관련 보도에 대해 중앙일보 간부와 데스크들이 의도를 갖고 취재 내용을 왜곡, 과장 보도했다는 취지로 보도하고 있으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기사는 취재된 내용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것이며 의도적인 왜곡, 과장은 없었습니다.

3. 따라서 이 전 기자 글과 관련해 청와대 국민청원 글에 명시된 “이 전 기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 및 용산 유가족에 대한 허위 기사를 작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사 데스크의 사주를 받았다”는 표현 또한 사실과 다릅니다.

해당 기사들은 이 전 기자가 먼저 취재해 보고한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것들이며 데스크의 사주나 지시로 작성된 것들이 아닙니다. 이 전 기자의 페이스북 글에도 데스크의 사주가 있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멍청하고, 무책임한 언론사의 ‘입장’ 표명은 정말 오랜만이다.

멍청하거나 뻔뻔하거나

중앙일보의 입장이 왜 무책임한지 하나의 사례, ‘용산참사 관련 기사’를 통해 살펴보자. 아래 기사는 당시 이진주 기자가 쓴 용산참사 관련 기사다. 중앙일보가 이 기사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건 둘 중 하나다. 그 잘못이 뭔지도 모를만큼 멍청하거나 그 잘못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부인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중앙일보의 이런 반응은 설명하기 어렵다.

https://news.joins.com/article/3531461 중앙일보 이진주 기자, 정부 "용산 유족에 위로금 주겠다" (2009. 3. 16.) 캡처. 당시 용산 참사 유족들은 이진주 기자의 보도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용산 철거민 범국민대책위는 "유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라고 논평을 낸 바 있다(재인용 출처: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032

중앙일보 이진주 기자, 정부 “용산 유족에 위로금 주겠다” (2009. 3. 16.) 빨간색 밑줄 강조는 편집자. 당시 용산 참사 유족들은 이진주 기자의 보도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고, 용산 철거민 범국민대책위는 “유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라고 논평을 낸 바 있다(재인용 출처: 미디어오늘).

위에 캡처한 이진주의 과거 기사를 간단히 분석해보자.

이 기사에는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문장이 있다. 그 한 문장은 “~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는 서술로 끝나고, 나머지 한 문장은 “~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로 끝난다.

  1. 유족 측은 “사과 표명과 함께 정식 절차를 밟으면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 수배 중인 남경남 전철연 의장 측도 “장례 절차를 조기에 마무리하는 데 동의한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쉽게 말해 사건 핵심 당사자인 유족 측과 전철연 측 입장의 ‘출처’가 ‘전해 듣은 말’(그냥 쉽게 말하면 ‘풍문’ 혹은 ‘전문’)이다. 그러니까 민감하기 짝이 없는 용산참사 사건에 관한 ‘단독'(특종) 기사의 출처가 ‘풍문’이라는 이야기다.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풍문'(전문)을 근거로 기사를 쓰면 안 된다. 영역은 달리하지만, 법률적으로도 전문의 증거능력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부인된다.

이토록 민감한 사안에 관해 풍문(전문)을 근거로 기사를 쓴다? 기사 작성자인 기자 차원에서도 말이 안 되고, 해당 기사를 최종적인 단계에서 절차적으로 책임지는 데스크 차원에서도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용산참사 관련 보도가 허위보도였다고 보도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에요? 

더 황당하고, 참혹한 일은 유족들과 사건의 핵심 당사자와 관련자들이 이진주의 해당 기사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그 해당 내용을 다룬 ‘민중언론 참세상’의 기사를 보자. 위 이진주의 기사와는 다르게 취재원이 특정돼 있다. 이들(당시 사건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전할 만한 권한과 책임이 있는 구체적인 취재원들)은 이진주의 기사 내용을  ‘전면 부인’한다.

참세상, '중앙일보 이진주 기자 용산 유족 가슴에 대못' (유영주 기자, 2009.03.16)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45781

참세상, ‘중앙일보 이진주 기자 용산 유족 가슴에 대못’ (유영주 기자, 2009.03.16)

이진주의 ‘용산 참사 위로금’ 날조 기사가 쓰여지고, 발행되며, 부인된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풍문을 근거로 어떤 기자가 ‘단독'(특종) 기사를 썼다.
  2. 그 단독 기사를 데스크는 승인해 발행했다.
  3. 해당 기사가 뜨자 당사자(권한 있고, 책임 있는 진짜 취재원들)는 그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우린(중앙일보) 책임 없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 전 기자의 페이스북 글에도 용산참사 관련 보도가 허위 보도였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란다. 날조 기사를 쓴 이진주의 페이스북 게시물이 다시 진실을 확정하는 시금석인양 말하는 중앙일보의 ‘입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정도면 멍청하거나 뻔뻔한 수준을 넘어서 정말 기괴할 정도다.

취재원을 특정할 수 없는 ‘풍문’의 방식으로 ‘단독’ 기사를 쓰고, 데스크는 그 형식적 절차적 흠결을 모른 척 하거나 알면서 묵인한 채로 기사를 발행했으며, 그 기사가 사건의 핵심 당사자, 진정한 취재원들에 의해 전면 부인되었다. 그게 허위기사가 아니면 어떤 게 허위기산가?  

중앙일보는 다시 답하라 

‘잘못된 기사로 생겨난 이 역사적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이진주 기사의 사과문은, 그 내용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기사로 인해 생겨난 역사적인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를 질문한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한번도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반성한 적 없다. 이 질문에 가장 통렬하게 답해야 하는 의무를 진 집단이 ‘조중동’이라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한경오’라고 그 책임이 없을까. 언론 환경의 주체인 대다수 국민, 언론소비자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진 않다.

반성과 성찰, 우리나라 언론에는 한번도 있어본 적 없는 미덕이다. 사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기본이지만, 그 기본을 충족한 언론의 존재를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다. 혹시라도 그런 언론을 만나본 적 있는 사람은 나에게 그런 언론을 좀 알려주시기 바란다. 진심이다. 그러니, 반성과 성찰이 언론의 기본 조건이라면, 어쩌면 우리나라엔 언론은 있어 본 적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치욕을 응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최소한이다. 첫걸음이다.  중앙일보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오를 응시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이고, 그것이 출발점이다. 그리고 중앙일보에 요구해야 한다.

‘중앙일보는 다시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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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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