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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기에서 ‘기술’은 대체로 가볍고 표피적이라는 느낌을 함께 안기는 테크닉이나 스킬이 아니라 ‘예술’에 가까운 ‘아트’임을 주지하자.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도 실패했다. 세월호의 참극에 따른 국민의 분노와 불신을, 적어도 여론의 50%는 돌려놓았던 박근혜 대통령의 가공할 ‘눈물’도 이번에는 먹히지 않았다. 의지할 사람 없이 혼자 살다 보니 최순실에 기댔고, 거기에서 뜻하지 않은 불운을 만나고 말았다는 신파는, 박근혜가 그동안 넘치게 보여준 불통과 아집과 부패와 권력 남용의 시궁창 속에 속절없이 파묻히고 말았다.

‘부모를 비명에 잃은 불쌍한 공주’의 이미지는 더는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최순실 주변의 권력 농단과 전횡이 불러온 공분의 깊이와 규모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만큼 두 번째 사과의 언어와 방식은 더더욱 긴요할 수밖에 없었다.

[toggle style=”closed” title=”박근혜의 두 번째 대국민담화”]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먼저 이번 최순실씨 관련 사건으로 이루 말할수 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정을 맡겨주신 국민여러분께 돌이키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드려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저와 함께 헌신적으로 뛰어주셨던 정부의 공직자들과 현장의 많은 분들, 그리고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 여러분께도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의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의 큰 책임을 가슴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어제 최순실씨가 중대한 범죄 혐의로 구속됐고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등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철저하고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검찰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엄정한 사법 처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이미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에도 검찰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습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줬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이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국민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각오로 노력해왔는데 이렇게 정 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어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입니다. 심지어 제가 사이비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온 국정 과제들까지도 모두 비리로 낙인 찍히고 있는 현실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부의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성장동력 만큼은 꺼뜨리지 말아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다시 한 번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었지만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습니다. 그동안의 경위에 대해 설명을 드려야 마땅합니다만 현재 검찰의 수사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자칫 저의 설명이 공정한 수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오늘 모든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것 뿐이며 앞으로 기회가 될 때 밝힐 것입니다.

또한, 어느 누구라도 이번 수사를 통해 잘못이 드러나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며, 저 역시도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내외의 여러 현안이 산적해 있는 만큼 국정은 한시라도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 되어야만 합니다. 더큰 국정 혼란과 공백상태를 막기 위해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은 검찰에 맡기고, 정부는 본연의 기능을 하루 속히 회복해야만 합니다.

국민들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각계의 원로님들과 종교 지도자분들, 여야 대표님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국민여러분과 국회의 요구를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시한번 국민여러분께 깊이 머리 숙여 사죄 드립니다.[/toggle]

박근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은 박근혜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박근혜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은 박근혜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물론 박 대통령의 사과가 실패한 더 근본적인 원인은 사안의 규모와 심각성이, 이미 ‘사과’의 수준을 압도해 버린 데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처럼 사과가 공감은커녕 더욱 거센 역풍을 몰고 온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번 사과 또한 진정한 사과의 자격에 한참 미달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사과의 요소 

바티스텔라 교수 [공개 사과의 기술]을 쓴 바티스텔라 교수(사진)에 따르면 완전한 형태의 사과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담고 있다. 사실 차분히, 상식에 기대어 보면 누구나 쉽게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을 법한 요소들이다.

  1. 사과하는 이의 수치심과 유감 표명
  2. 특정한 규칙 위반의 인정과 그에 따른 비판 수용
  3. 잘못된 행위의 명시적 인정과 자책
  4. 앞으로 바른 행동을 하겠다는 약속
  5. 그리고 속죄와 배상 제시

공개 사과의 기술

바티스텔라 교수가 정리한 다섯 요소는, 그러나 지나치게 자주 간과되거나 무시된다. 사과해야 할 처지에 놓인 많은 이들(특히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은 사과하기에 앞서 위와 같은 요소들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대개는 그저 주먹구구 식으로, 뭐 어떻게 대충 되겠지 하는 안이한 태도로 일관한다.

예컨대 얼마 전 새누리당이 ‘죄송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 내걸고 넙죽 절을 하며 사과한 행태는 대체 무엇을 잘못했고, 그 잘못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바로잡을지 전혀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국민(유권자)의 동정심에 기대어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 ‘사이비 사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미안한 척하는 ‘연기’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특히 피해자는 가해자의 사과에 더욱 민감하고 날카롭다. 그게 진심인지 가식에 불과할 뿐인지 금방 알아챈다.

박근혜의 두 번째 사과가 실패한 이유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위 다섯 요소를 모두 조금씩 담고 있다. 그러나 실패했다. 아래 예시들은 사과로서의 진실성을 흐린다.

  •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변명: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의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믿기 힘든 주장: “그 과정에서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 국민이 납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해법 제시: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철저하고 신속하게 수사를 진행”

특히 그 뒤에 이어지는 자신의 개인사는 국민의 동정심에 호소해 사태를 반전시켜 보려는 의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던가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는데 이런 사태가 발생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2016년 11월 4일에 있었던 박근혜의 두 번째 대국민 사과. (출처: JTBC 갈무리)
2016년 11월 4일에 있었던 박근혜의 두 번째 대국민 사과. (출처: JTBC 갈무리)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은 그뿐이 아니다. 검찰의 독립성이 사실상 붕괴한 지 오래라는 사실을 국민이 잘 아는데도 “현재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일일이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박근혜는 여전히 국민에게 진실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고, 잘못을 인정하거나 바로잡을 의도 또한 없음을 시사한다.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사과 

두 번째 사과문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박 대통령이 여소야대의 정치적 지형을 전혀 인정하지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화와 토론의 상대, 국정의 동반자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맨 마지막에, 각주처럼 달린 “사회 각계의 원로님들과 종교 지도자분들, 여야 대표님들과 자주 소통하면서”라는 말이 아무런 실질적 힘도 지니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박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사태를 해결하고 난국을 타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야당 대표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해법을 모색하겠다는 (거국내각 구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내용이 사과문의 핵심 내용으로 들어갔어야 마땅하다. 엄연히 국민 선택으로 구성된 정치적 힘의 관계 아닌가.

박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는, 설령 사과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다 갖추었더라도 그 실속이 없으면, 다시 말해 구체성과 진정성이 없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한, 사과받는 쪽에서 사과를 사과로 인정하지 않아도 사과는 사과가 될 수 없다.

Martin Hudacek, Memorial for Unborn Children
Martin Hudacek, “Memorial for Unborn Children” (2012)

“사과는 어느 단계에서든 실패할 수 있다”라고 바티스텔라 교수는 경고한다. 지금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사과가 그런 것 같다. 박근혜 정부와 국민(혹은 여론)은 어떤 잘못이 저질러졌는지에 대해 공통된 이해를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사과는 만약 가해자 (박근혜 정부)와 피해자 (국민)가 사과의 필요성을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면 잘못될 수밖에 없다.

잘못의 내용이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적시되지 않은 채 가해자(박근혜 정부)가 불완전하고 모호하게 얼버무리면 그 사과는 성공을 기약할 수 없다. 어떤 잘못과 피해가 저질러졌는지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면, 다시 말해 출발점이 다르다면, 그 사과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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