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지금 당장 ‘마케팅 프로세스’를 검색해보라. 정석으로 여겨지는 필립 코틀러의 방법론부터 다양하게 변형된 프로세스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다. 필립 코틀러의 R-STP-MM-I-C 프로세스 각 단계 중 코틀러의 순수 창작은 없다. 이미 존재했던 개념을 결합해 ‘마케팅 프로세스’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지만 이를 수학 공식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방법론은 그저 방법론일 뿐이다. 마케팅의 역사를 알면 익숙한 여러 기법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본질을 이해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스스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어설픈 컨설턴트를 걸러낼 능력도 생긴다.
이 연재 ‘마케팅의 역사’가 형식보다는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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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 그는 런던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집은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학창 시절 우울증을 앓았다. 옥스퍼드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오길비였으나 우울증으로 인한 학업 부진은 낙제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대학에서 쫓겨나야 했다.
두 명의 거물
암울했던 그의 인생에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쓴 한 권의 책 덕분이었다. ‘아가 쿠커’의 세일즈맨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를 쓴 책 [아가 쿠거 판매의 이론과 실제(Theory and Practice of Selling the AGA cooker)]가 포춘지에 소개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매더 앤 크로더(Mather & Crowther)라는 영국의 광고 에이전시에 스카우트된다.
광고 세계에 눈을 뜨게 된 오길비는 영국이 광고 후진국인 것을 알게 되었다. 광고의 최첨단을 달리는 국가는 미국이었고, 영국과는 30년 정도의 격차가 있었다. 오길비는 뉴욕의 메디슨 애비뉴를 동경했다. 메디슨 애비뉴는 IT로 치면 광고계의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었다. 당시 메디슨 애비뉴에는 두 명의 거물이 있었는데, 한 명은 선전의 대가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 다른 한 명은 광고의 대가 레이먼드 루비컴(Raymond Rubicam)이었다.
버네이스
버네이스는 기존의 광고인들을 ‘구시대적 선전가’로 재 포지셔닝하고, 자신은 그들과 다른 ‘새로운 선전가 (The New Propagandists)’라고 포지셔닝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광고는 직접 제품을 알리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었고, PR 활동 중에 필요에 따라 행할 수 있는 부수적인 도구였다.
반면 자신이 하는 선전은 대중과의 관계(Public Relations)를 개선하는 활동, 즉 PR을 통해 제품이 판매되는 환경을 만드는 고도의 지능적인 전략이었다. 그는 광고 에이전시들이 좀 더 고차원적인 선전을 하기 위해 PR 고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버네이스는 자신을 광고의 시대에서 새로운 선전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인물로 여겼다.
루비컴
버네이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광고는 루비컴 같은 인물에 의해 선전과 다른 별개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광고가 실효성 없는 시간 낭비라는 인식이 팽배한 당시 분위기에서 루비컴이 빼 든 무기는 팩트였다. 그는 광고효과 측정을 위해 세계 최초로 전화 표본조사를 했다. 1935년에는 모회사인 영 앤 루비컴(Young and Rubicam, Y&R)의 산하에 자회사 미국여론연구소(American Institute of Public Opinion)를 설립하여 400여 명의 조사원을 동원, 광고가 효과가 있었는지를 조사하고 광고 성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오길비는 두 사람 중에서 루비컴을 존경했다. 버네이스는 “기업이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제품을 만들거나 소비자가 제품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 결과가 초래하는 낭비와 마찰을 해소하는 것이 PR”이라 말했다. 그 말에는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 제품도 원하게끔 만들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오길비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길비,
나는 광고인들이 대중을 현혹하지 않고도
제품을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네.
마치 버네이스를 의식하고 한듯한 이 말은 훗날 인생의 막바지에 루비컴이 오길비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루비컴이 어떤 생각으로 광고 비즈니스를 해왔는지, 또 오길비가 루비컴의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27세 청년 오길비, 갤럽에 입사하다
1938년, 27세의 청년 오길비는 꿈을 좇아 메디슨 애비뉴로 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루비컴이 대표로 있는 Y&R로 달려가 이력서를 내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는 대학을 낙제했고 쓸만한 경력이라고는 매더 앤 크로더에 잠깐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에 비해 Y&R은 최고의 프로들이 모인 세계 최고의 광고 에이전시였다.
오길비는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었을 것이다. 루비컴은 다섯 살에 부모를 여의고 고아처럼 자랐기 때문에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었다. 누군가 출신 대학을 물어보면 루비컴은 항상 존재하지도 않는 조지 대학을 나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직원들에게 상냥한 리더였다. 루비컴이라면 아마도 오길비를 편견 없이 대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길비는 당시에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길비는 Y&R 대신 조지 갤럽(George Gallup, 사진)이 대표로 있는 청취자조사연구소(Audience Research Institute)에 입사했다. 갤럽? 뭔가 귀에 익은 단어 같지 않은가? 맞다. 당신이 떠올린 여론조사의 대명사! 그 갤럽이 이 갤럽이다.
갤럽은 몇 년 전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명 잡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는 여론조사 분석 결과를 두고 당시 컬럼비아 대학의 저널리즘 교수였던 갤럽과 대결을 펼쳤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공화당의 알프레드 랜든이, 갤럽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될 것으로 예측했다. 결과는 갤럽의 승리.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이 일로 신뢰도가 추락하여 폐간하기에 이른다. 반면 갤럽은 여론 조사 분야에 있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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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나는 설문이나 인터뷰를 통해 무언가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이러이러하게 말했다.’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누군가를 설득할 목적이라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특정 제품의 판매량과 같이 확정된 값들을 통해 분석하는 것 역시 타당하다. 그러나 설문이나 인터뷰로 무언가를 예측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
실제로 갤럽은 이후의 중요한 여론 조사에서 끊임없이 예측에 실패했다. 갤럽이 실패할 때 여론조사 업계에서는 예측에 성공한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한다.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 당선을 운 좋게 맞춘 무속인이 스타가 되는 느낌이다. 갤럽은 2012년 미국 대선에서도 23개의 여론조사 기관 중에 꼴찌를 기록했다. 예측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설문이나 인터뷰보다 관찰이 훨씬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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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마침 여론조사를 통해 광고 효과를 입증하려 했던 루비컴은 1937년에 갤럽을 Y&R의 부사장으로 영입한다. 갤럽은 교수직을 그만두고 루비컴의 파트너가 되었다. 오길비가 갤럽의 회사에 입사한 이유는 아마도 갤럽과 루비컴의 이러한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길비는 갤럽과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조사와 분석의 노하우와 방법론은 물론이고 통계자료를 통해 미국인의 취향에 대한 통찰도 얻었다.
오길비가 조사 분석의 전문가가 되어갈 무렵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영국 대사관에서 조국을 위해 정보 분석 임무를 수행했다. 그 무렵 버네이스가 1933년에 히틀러의 영입 제의를 거절했다는 사실이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버네이스가 거절한 그해에 나치의 선전부 장관이 된 괴벨스가 버네이스 선전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 역시 큰 화제가 되었다. 버네이스 본인은 이러한 사실들을 숨기기는커녕 은근히 즐기는 듯 보였다. 괴벨스와 자신의 관계가 자신의 명성에 유익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선전’이라는 용어는 1차 세계대전 이래로 정부가 지껄이는 헛소리 혹은 거짓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버네이스는 새로운 선전을 주장하며 선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인물이었다. 그의 업계에서의 실력은 천재적이었기 때문에 얼마간은 선전이 긍정적인 의미로 변화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그는 괴벨스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선전에 대한 인식에 스스로 먹칠을 하기 시작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과테말라에서는 군부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아레발로(Arevalo) 대통령의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미국 바나나 수입량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던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는 그동안 군부 독재정권과 결탁하여 큰 이익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정부가 들어선 탓에 이권을 빼앗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 버네이스가 개입한다. 버네이스는 선전 조작을 통해 과테말라가 빨갱이 국가인 것으로 미국 내 여론을 몰아갔다. CIA는 여론에 힘입어 과테말라 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결국, 1954년 6월 18일, 아르마스 중령이 쿠데타에 성공했고 과테말라에는 다시 군부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footnote]조금 벗어난 이야기지만, 이 사건은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남미 민중의 가난함에 마음 아파하던 그는 이 사건 때문에 미국에 환멸을 느꼈고, 폭력 외에는 민중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졌다. AK-47을 집어 든 그는 체 게바라가 되었다.[/footnote]
1949년, 메디슨 애비뉴에 입성하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오길비는 농부가 되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났다면 광고의 대부 오길비도, 이 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오길비는 농부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화창한 어느 봄날에 오길비는 길을 가다가 눈이 먼 사람이 구걸하는 것을 보았다. 돈 통에는 돈이 한 푼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가 쥐어 든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눈먼 사람입니다. 도와주세요.”
(I am blind. Please help.)
오길비는 양해를 구하고 종이에 새로 메시지를 적어서 쥐여주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서 돈 통에 돈이 가득 찼다. 오길비가 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눈먼 사람입니다.”
(It is spring, and I am blind.)
1948년 오길비는 ‘휴잇 오길비 벤슨 앤 매더(Hewitt, Ogilvy, Benson & Mather)’라는 이름으로 광고 에이전시를 창업했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에는 ‘오길비 앤 매더(Ogilvy & Mather)’로 이름을 바꾸어 그가 그토록 동경하던 메디슨 애비뉴에 입성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브랜드 이미지’의 탄생
1951년, 오길비 앤 매더에 볼품없는 신사가 찾아왔다. 그는 오길비를 붙잡고 3만 달러로 광고해 줄 순 없겠냐며 빌며 사정했다. 그의 이름은 앨러튼 제트(Ellerton Jette). 해서웨이라는 작은 셔츠 회사의 사장이었다. 해서웨이는 업력이 꽤 되는 회사였지만, 대형 의류업체들에게 치여서 망해가고 있었다.
광고를 단 한 번도 집행해본 적이 없는 작은 회사였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길비를 찾아온 것이었다. 제트는 오길비가 만들어준 광고에 절대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해서웨이가 큰 회사가 되더라도 은혜를 잊고 대행사를 바꾸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오길비를 설득했다. 오길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하아,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오길비는 제트의 의뢰를 수락했다. 그리고 1951년 9월 22일 뉴요커지에 오길비가 만든 해서웨이 셔츠의 광고가 실렸다. 광고에는 귀족풍의 남자가 마치 해적을 연상케 하는 멋진 검은색 안대를 하고 있었다. 헤드라인 카피는 “해서웨이 셔츠를 입은 남자(The man in the Hathaway shirt)”였다. 이 광고는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포춘지, 타임지, 라이프지에도 광고가 실렸다. 돈을 내고 실은 게 아니었다. 저명한 잡지들이 앞다투어 이 광고를 취재하고 기사로 내보냈다.
오길비의 해서웨이 광고는 마케팅 역사에 ‘브랜드 이미지(Brand Image)’라는 용어를 남겼다. 이후 오길비의 모든 광고는 브랜드 이미지로 귀결된다. 오길비는 제대로 된 제품이라면 소비자에게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곧 제품의 개성이고, 광고는 제품의 개성을 소비자에게 알기 쉽게 보여주는 중요한 채널이라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광고를 통해 알기 쉽게 보이는 제품의 개성이 곧 브랜드 이미지였다.
제조자보다 그 제품을 더 잘 알아야 한다
소비자의 욕구는 허기를 채우고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원초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자아를 실현하는 고차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수없이 많은 욕구 중에서 제품이 어떤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알아내려면 광고인은 제품을 만든 사람보다 제품을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오길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오길비 앤 매더의 사람들은 제품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오길비는 갤럽에게 배운 노하우를 이런 식으로 응용한 것이다.
오길비는 광고 카피가 곧 소비자에게 하는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그 약속은 물론 제품이 해결해줄 수 있는 소비자의 욕구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과 상관없는 것은 카피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오길비는 통계 수치를 통해 남자의 셔츠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해서웨이 셔츠는 광고를 통해 그녀들에게 말한다. 해서웨이 맨을 선물해 주겠노라고.
해서웨이 맨은 귀족적이다. 그렇다고 유약한 이미지는 아닌데 그의 안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안대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왕년에 진짜 해적이었을 수도 있고, 전쟁터에서 용감히 싸우던 육군 중령일 수도 있다. 눈을 잃은 것은 아마도 영웅적인 어느 전투에서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아한 품위와 동시에 야성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해서웨이 셔츠가 구축한 브랜드 이미지다. 아내들은 해서웨이 광고를 통해 남편의 전성기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가 해서웨이 맨이 되기를 꿈꾼다.
30년
오길비는 이런 브랜드 이미지가 30년은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30년인지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30년이면 아이가 자라나 성인이 되어서 부모의 취향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기간인 것 같다. 다시 말해 30년은 세대 간에 브랜드 이미지가 전수되기에 적합한 시간이란 것이다.
해서웨이 맨이 언제까지 지속하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최소한 오길비가 광고 불변의 법칙을 저술한 1983년에도 해서웨이 맨은 계속됐다. 해서웨이 맨은 1956년부터는 카피가 빠지고 사진으로만 광고되었는데 해서웨이 맨의 검은색 안대만 보고도 사람들은 그게 무슨 광고인지 알았다.
“저를 아십니까?”
브랜드 이미지가 30년은 지속해야 한다는 것은 30년 동안 똑같은 광고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은 브랜드 이미지다. 예를 들어 해서웨이 셔츠의 경우 변함이 없는 부분은 해서웨이 맨이었다. 그는 광고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도 있었고, 와인을 마실 때도 있었고, 총을 장전할 때도 있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의 경우 변하지 않는 부분은 카피였다. 오길비가 1975년에 만든 카피 “저를 아십니까?(Do you know me?)”는 2007년까지 계속되었다.
오길비가 만들지 않은 광고에서도 브랜드 이미지는 발견된다. 깜짝 퀴즈를 내겠다. 말보로의 브랜드 이미지는 무엇인가? 그렇다. 야성적인 카우보이다. 1955년에 탄생한 말보로 카우보이는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말보로는 그런 남자가 피우는 담배로 자신들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한 것이다. 맥도날드는 로날드가, KFC는 샌더스가 브랜드 이미지이다.
백종원, ‘요리 잘하는 푸근한 남자’
한국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잘 구축한 예로 나는 백종원 씨를 들고 싶다. 그가 보유한 다양한 브랜드들의 광고에서는 하나같이 백종원 자신이 등장한다. 어떤 광고에서는 고기를 썰고, 어떤 광고에서는 면을 말아 든다. 광고는 다양하지만, 백종원이 등장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요리 잘하는 푸근한 남자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약속이다. 이것이 백종원 프랜차이즈의 브랜드 이미지인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가 쉽게 변해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하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자주 바꾸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30년 정도는 가야 하는 것이다. 제품이 안 팔리는데도 브랜드 이미지를 30년이나 유지해야 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답은 간단하다.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음에도 제품이 안 팔리는 것은 당신이 소비자에게 쓸모없는 약속을 했다는 증거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아무나 붙잡고 내일 면봉으로 귀를 팔 거라고 약속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면 내일 백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하면 사람들은 그 약속이 정말로 이루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에게 행해지는 약속은 철저하게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절대 거짓말이어서는 안 된다. 오길비는 자신이 광고하는 제품이 소비자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광고를 내렸다. 소비자를 향한 정직과 진실은 오길비가 존경하는 루비컴으로부터 받은 강력한 유산이었다.
오길비의 롤스로이스 광고, 전설이 되다
1960년, 오길비는 역사적인 광고를 탄생시킨다. 광고 사진은 차를 탄 주부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슈퍼 앞에 차를 대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슈퍼에서 식료품을 사서 나오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하굣길인 것 같다. 헤드라인 카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신형 롤스로이스 안에서 가장 큰 소음은 시계 소리입니다.”
At 60 miles an hour the loudest noise in this new Rolls-Royce comes from the electric clock.
이 단 하나의 광고에 든 비용은 2만 5천 달러였다. 이 광고가 나간 후 경쟁사 포드 자동차는 롤스로이스보다 소음이 더 적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수억 달러를 쏟아부어야 했다. 오길비의 카피는 거짓이 아니었다. 롤스로이스 안에서 가장 큰 소음은 확실히 시계 소리였다. 그러나 오길비는 광고를 중단했다. 롤스로이스가 미국에 수출한 자동차 중 500대에서 결함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제품이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고객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가 오길비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오길비는 롤스로이스 카피를 그저 운 좋게 쓴 것이 아니었다. 오길비는 롤스로이스 광고를 만들기 전에 자동차를 연구하는 것에 3주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오길비는 이렇게 말한다.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광고의 기본은 우선 광고할 제품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거인들의 회사’
누군가 오길비 앤 매더의 지사 중 한 곳에 최고 책임자가 되면 오길비는 그에게 러시아 인형을 선물로 준다. 인형을 열고 열어서 가장 작은 인형을 열면 그 안에는 오길비가 적은 메시지가 적혀있다. 메시지의 내용은 이랬다.
우리가 우리보다 작은 사람을 채용하면 우리는 난쟁이들의 회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큰 사람을 채용하면 오길비 앤 매더는 거인들의 회사가 될 것입니다.
당시는 테일러리즘(Taylorism; 관리와 통제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관리 전략)의 영향으로 사람을 기업의 부속품으로 여기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조명의 밝기는 어느 정도가 좋고 테이블의 높이와 사무실의 동선 따위가 중요시되던 시대였다. 오길비가 직원을 대하는 자세는 좀 달랐다. 그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뇌가 있는 신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비자를 상대하려면 창의력이 생명인데 기존의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에서는 창의적인 발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직원은 하나하나가 스스로 연구하고 창의력을 발산하는 지식 경영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문화는 그가 젊은 시절 동경했던 Y&R의 문화이기도 했다.
오길비는 광고계뿐만 아니라 경영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학계에서는 제품과 광고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제품이 탄생하기 전부터 광고를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바꿔 말하면 우선 제품을 만들고 팔아치우는 게 아니라, 우선 소비자의 욕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케팅의 개념이 서서히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롤스로이스의 경쟁사 중 하나였던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 GM)는 전성기의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유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기업 문화 때문이었다. GM의 내리막길을 우려하며 경고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재미있게도 오길비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는 GM이 구성원들을 관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성원들을 부속품으로 여기지 말고 지식 경영자로 대우하라고 했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GM의 기업 문화는 포드를 따라잡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이제 업계 1위인 상황에서 수평적인 문화로 바꾸지 않으면 업계를 이끌 혁신의 힘을 상실하고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오길비와 똑같이 런던에서 살다가 오길비보다 1년 이른 1937년에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외롭게 경영학의 길을 열었다. 그는 경제학 교수 선배들로부터 “경영학이 무슨 학문이냐? 때려치우라!”는 모욕을 자주 들었다.
그의 이름은 피터 드러커였다. (계속)